[박래용 칼럼]'슬기로운 여당 생활'

박래용 논설위원 2020. 6. 9.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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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어떻게 걱정했던 건 꼭 현실이 되는가. 더불어민주당 얘기다. 4·15 총선 승리 이후 시민들은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을 주문했다. 처음엔 민주당도 말 한마디, 행동 하나 각별히 조심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말뿐, 시민의 눈엔 그렇게 비치지 않았다. 여당은 총선 후 두 달 동안 무슨 일을 했는지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박래용 논설위원

첫째, 일의 순서를 잘 헤아리고 있는가. 21대 총선 지역구 득표율은 민주당 49.9%, 미래통합당 41.5%다. 득표율로만 치면 8.4%포인트 차이에 불과하다. 정당투표에서는 통합당에 뒤졌다. 선거를 2~3월에 치렀다면 민주당은 제1당을 빼앗겼을지 모른다. 유권자가 민주당에 힘을 실어준 건 코로나19 국난을 극복해달라는 주문이었다. 총선 승리는 민주당에 대한 호평의 결과가 아니다. 민주당이 뭘 하더라도 시민 다수가 찬성해줄 것이란 건 착각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수차례 “지금은 전시(戰時)상황”이라고 했다. 정세균 총리는 등교개학을 전시 천막학교에 비유했다. 그 말대로라면 지금 국회는 전시 국회다. 모든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해 국난 극복에 쏟아부어야 할 때다. 한데 민주당은 “잘못된 현대사에서 왜곡된 것을 하나씩 바로잡겠다”고 했다.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 건 중요하다. 그러나 일에는 순서가 있다. KAL 858기 폭파사건 재조사, 국립묘지 친일파 파묘 얘기가 전시 국회에서 맨 먼저 꺼낼 만큼 시급한 현안인가. 현대사를 다시 쓰는 것은 정치의 영역도 아니거니와 국회 의석을 앞세워 밀어붙일 일은 더욱 아니다.

둘째, 시민의 지지에 부응하고 있는가. 전례 없는 위기는 그동안 해오던 관행으로는 극복할 수 없다. 위기 극복을 위해선 전 시민의 동참과 협조가 필요하다. 전시 상황에서는 없던 협치도 만들어내는 것이 집권여당의 책무다. 총선 민의도 정부·여당이 책임 있게 국정운영을 하되 야당과 협치하라는 것이다. 21대 국회에선 완충지대 역할을 했던 제3당 세력도 소멸한 상태다. 그럴수록 거대여당엔 절제와 신중함이 필요하다. 힘없는 자의 양보는 굴욕이지만, 힘 있는 자의 양보는 미덕이다. 합의를 위한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도저히 안 되겠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있을 때 표결해야 시민들도 수긍할 것이다. 한데 민주당은 국회 ‘반쪽개원’을 강행했다. 여당은 시한은 지켰으나 협치를 잃었다.

정치학자 박상훈은 “정당과 의회가 중심이 되어 일을 풀어가는 것이 당장은 어렵고 복잡해 보여도 결국에는 사회통합에 기여하고 더 오래 지속하는 변화를 만든다”고 했다. 정치는 협상이고 협상은 곧 대화다. 이 틀이 무너지면 결국 정치는 사라진다. 분열과 갈등보다 대화와 타협의 정치가 결과적으로 더 이득이 된다는 건 자명하다. ‘정치는 작은 생선을 삶는 것과 같다(若烹小鮮·약팽소선)’고 했다. 이리저리 뒤집지 말고 가만히 지켜보는 게 낫다는 의미다. 여당은 기다리지 못하고 생선을 바짝 태웠다.

셋째,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엔 산업구조부터 국제질서까지 기존 패러다임에 대대적인 변화가 쓰나미처럼 닥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대한민국은 산업화세대와 민주화세대의 수십년 독과점 구조에 미래세대의 도전이 시작된 역사적 전환기를 맞고 있다. 혁명적 시기에 국정을 이끌어가려면 새 시대에 걸맞은 국정좌표를 설정하고 담대한 발상, 과감한 도전이 필요하다. 젊은 세대, 젊은 생각, 젊은 정책이 넘쳐흘러야 한다. 반대의견은 다양한 사고를 자극하고, 더 많은 대안을 찾도록 도와준다. 반대의 놀라운 힘이다. 일류기업들은 일부러 사내에 ‘레드 팀’을 두고 반대의견만 내는 역할을 맡기고 있다. 그러나 민주당은 반대의견을 징계하고, 다른 목소리에 함구령을 내렸다. 항구에 묶인 배는 안전하지만, 그것이 배의 존재 이유는 아닐 것이다. 열혈 지지층은 꼭 필요한 자산이지만, 지지층만 바라보며 판단하고 행동하는 게 정치의 전부가 되어선 안 된다. 지지층 결집이나 친정체제 강화 같은 낡은 방식으로는 ‘K정치’를 만들 수도, 미래를 열 수도 없다.

TV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악역도 없고 막장 전개도 없지만 큰 인기를 얻었다. 젊고 유능한 의사들이 소소하지만 진정성 있는 태도로 따뜻한 위로와 힐링을 주었기 때문이다. 시민들은 177석 거대 여당이 ‘슬기로운 여당’이기를 바란다. 그건 진심과 신뢰와 겸손과 실력이 뒷받침돼야 가능하다. 수가 많다고 되는 게 아니다.

박래용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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