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박유하 "정대협의 위안부 운동 30년, 무엇 이뤘나"

CBS노컷뉴스 김태헌 기자 2020. 6. 9.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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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11명에게서 고소당한 '제국의 위안부' 저자
이용수 할머니 향한 도넘은 비판, "주객 전도..비난 멈춰야"
"일부 할머니 생전 정대협 운동 방식에 의문 품기도"
"2014년 심포지엄에서 할머니 목소리 공개한 것 미움 받았다"
"일본 설득하지 못한 것이 운동 본질적 한계..공과 평가해야"
책 '제국의 위안부' 저자인 세종대 박유하 교수(사진=윤창원 기자/자료사진)
정의기억연대(정의연)와 윤미향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후원금 투명성 문제를 제기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92) 할머니를 향한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를 복잡미묘한 심정으로 지켜본 이가 있다.

저서 '제국의 위안부'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민·형사 재판을 받고 있는 세종대학교 박유하(63) 교수다. 박 교수는 지난 2014년 6월 나눔의집에 거주하는 위안부 피해자 9명(이후 2명 추가)으로부터 명예훼손죄로 고소당했다.

이 할머니도 박 교수를 고소한 위안부 피해 당사자 중 한 명이다. 그런데도 박 교수는 "이 할머니를 향한 폭언을 멈추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지난 30년 간 주도해 온 위안부 운동을 겨냥한 이 할머니의 문제 제기와 수년 전 박 교수가 세상에 내놓은 목소리는 여러 지점에서 맞닿아 있다.

CBS노컷뉴스는 이 할머니의 내부고발과 이 할머니를 향한 언어 폭력, 정대협(현 정의연) 중심의 위안부 운동에 대한 박 교수의 생각을 들어봤다. 이달 초 서울 모처에서 이뤄진 인터뷰에서 박 교수는 "위안부 문제 해결단체를 비판한다는 이유로 이 할머니를 비판하는 것은 주객 전도"라면서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비판을 멈춰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정대협 주도의 위안부 운동 30년은 '공론화'에 성공했지만, 방법과 알린 내용에 문제가 없는지 되짚어봐야 한다"며 "무엇보다도 협상 당사자인 일본을 설득하지 못한 것은 한계점이다. 전체적인 운동의 공과 평가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용수 할머니 폭로, 뜻밖이었지만 반가웠다…할머니 비판 멈춰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사진=이한형 기자/자료사진)
▶이용수 할머니 폭로 등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소회는?

=우선 반가웠다. 의외의 곳에서 의외의 목소리가 나왔다. 정대협은 할머니, 나눔의 집은 내부 직원으로부터였다. 위안부 운동 방식에 대한 문제의식이 오래 전부터 내가 갖고 있던 생각과 겹치는 부분이 있었다.

▶이 할머니와는 법정에서 부딪히지 않았나?

=그렇다. 사실 지금도 (이용수)할머니가 왜 고소에 동참했는지 궁금하다. 자택을 방문해 차려주시는 밥을 먹기도 했다. 뭔가 오해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할머니를 향한 헤이트 스피치가 도를 넘고 있는데.

=위안부 운동의 주체가 돼버린 지원단체를 비판하는 할머니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할머니를 비난하는 것은 주객이 거꾸로 된 것이다. 위안부 운동이 30년쯤 이어오다보니 윤미향 대표(정의연 전 이사장이자 현 국회의원으로, 정대협의 문제를 지적하는 박유하 교수의 문제의식이 담긴 호칭을 그대로 사용한다)가 사회 곳곳에 여러 인맥들이 생겼다. 개개인이 누구인지보다 정대협이라는 위안부 단체에 더 집중하게 되고, 정대협 인사라는 것 만으로 신뢰하고 아낌없이 지원하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그러다보니 더불어민주당 등 정치권에서도 윤 대표를 보호하려고 나선 것도 이해가 되지만, 아무리 그래도 할머니를 비판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윤 대표가 국회로 가면서 이번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 이 할머니의 주장인데.

=시민사회가 정치에 진출하는 것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거나 문제시하지 않는다. 정치권에 진출하는 것보다 그곳에서 어떤 일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그동안 위안부 운동 진영에서 정치권에 진출한 인물은 윤미향 대표가 처음이 아니다. 예를 들면 5선 의원인 이미경 의원은 정대협 총무 출신, 지은희 전 여가부 장관은 정대협 대표였다. 문재인 정부에서 여가부 장관을 지낸 정현백 교수도 '정의기억재단' 이사를 지냈다. 하지만 이들이 정치권에 들어간 후 위안부 문제 해결에 진전이 있었는지는 의심스럽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로 생긴 화해치유재단은 이번 정부들어 해산은 했지만 하지 않은 애매한 상태로 남아있다.

=50억원이 넘는 돈이 공중에 떠있는 것으로 안다. 정대협 등 단체들이 반대해서 일단 해산을 시켰는데 정부는 정식으로 위안부 합의를 파기했다고는 하지 않는 아주 애매한 입장을 펴고 있다. 한일 합의에 문제가 없지 않았지만 정대협의 말과는 달리 처음으로 전부 국가예산으로 시도된, 명확한 사죄보상 표시였다. 정대협의 주장만 들을 게 아니라 한일합의에 대한 제대로 된 토론이 필요하고, 그 이전에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국민적 인식의 재검토도 필요하다.

◇1990년대 초 위안부와 첫 만남, 한일 관계 악화 지켜보며 책 출간 결심

박유하 세종대 교수(사진=윤창원 기자/자료사진)
▶위안부 할머니 문제에 처음 관심을 가진 계기는.

=1991~1992년 일본 도쿄에서 위안부 할머니들이 증언 집회를 했다. 그때 자원봉사로 통역 요청이 들어와서 처음 만나게 됐다. 당시 아직 5,60대였던 분들이 하얀 치마 저고리를 입고 증언하던 모습이 생생하다. 그 당시에 통역하면서 많이 울었다.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눈물이 날 수밖에 없었다. (창설 당시) 정대협은 이화여대 여성학과 민주화 투쟁, 기독교 세 그룹이 만나서 만들어진 집단이다. 나는 셋 중 어느 곳과도 접점이 없어서 이후 같이 운동할 계기도 없었다.

▶본격적으로 위안부 할머니 문제를 다뤄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언제인가.

=2001년 교과서 문제가 불거지면서 양국 관계가 급격하게 나빠졌었다. 갈등은 쌍방에 원인이 있지만 한국 사회가 위안부 문제는 물론, 전후 현대일본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있는 것이 큰 원인이라 생각했고 그래서 한일갈등의 중심이 되곤 했던 몇 가지 문제를 중심으로 2005년 '화해를 위해서'라는 책을 썼다.

하지만 위안부 문제에 대한 나의 의견은 정작 비판대상이었던 정대협에는 무시당했고, 2011년에는 한국에 처음 소녀상이 생겼다. 그 무렵 식민지 지배의 본질을 고찰하는 다른 책을 준비중이었는데 방향을 바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책을 다시 한 번 쓰기로 했다. 그것이 '제국의 위안부-식민지지배와 기억의 책임'이다.

결정적으로 2012년 봄에 일본 민주당 정부가 한국에 위안부 해결을 위한 제안에 나섰는데 청와대가 거부했다는 뉴스 보도를 봤다. 일본이 제시한 세 가지 방안은 △대사의 방문 사과 △수상의 사죄문 발표 △보상금 지급 등이었다. 보도에서 청와대는 '정대협이 반대할 것이다'라는 이유로 거부했다고 했다. 그래서 책을 일본보다 한국에 먼저 내야겠다고 생각하고 2013년에 <제국의 위안부>를 낸 것이다.

◇위안부 할머니와 친밀한 관계 "할머니들 위안부 운동에 의문 품었지만…"

(사진=연합뉴스)
▶위안부 피해자인 고(故) 배춘희 할머니(2014년 6월 8일 별세)와 각별한 사이였다고.

=2013년 책을 낸 후 사죄와 보상에 대한 당사자(할머니)들의 생각을 직접 듣고 싶어서 만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가령 배 할머니와 친해져서 만나러 가면, 단 한시간 앉아 있는 동안도 직원이 몇 번이고 와서 보고 가곤 했다.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도 만날 수 도 없는 상황이었다. 한번은 할머니가 많이 아프셔서 경기 광주시의 한 병원에 문병을 갔는데 얘기를 하고 있는 도중에 병원 간호부장이라는 사람이 와서 "보호자가 아니면 나가야 한다"면서 쫓아내다시피 한 적도 있다.

▶나눔의 집 직원들 폭로 보면서 어땠나.

=배 할머니는 통화할 때 종종 "누가 듣는다"면서 전화를 끊기도 했다. 병이 나도 내키는대로 병원에 가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병원비도 할머니가 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사실 나눔의 집에서 나오고 싶어 하셨던 배 할머니를 구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있다. 할머니가 춥다는 이야기를 2014년 1월쯤부터 자주 했었다. 추운데 방에 커튼도 제대로 안 해 외풍이 심하다고도 하셨고. 그해 4월 병원에서도 충분히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국면을 맞으면서는 할머니도 원하셔서 보호자가 되어 드릴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이후 할머니의 의지에 반해 병원에서 나눔의집으로 옮겨졌고 이후 몸이 급격하게 나빠지셨다.

▶배 할머니 유산을 두고도 최근 의혹이 불거졌다.

=배 할머니는 유산을 모두 승가대학에 기부하신다는 말을 했었다. 그런데 이번에 나눔의 집이 유족들로부터 소송을 해서 빼앗았다는 사실을 알고 많이 놀랐다.

▶배 할머니가 한 말 중 기억에 남는 말이 있나.

=배 할머니도 정대협 운동 방식에 대한 비판을 자주 하셨다. 전체적으로 위안부 개념에 대한 이해도 정대협과는 달랐다.

▶돈 문제였나.

=돈과 배상에만 집착한다는 비판을 정대협과 나눔의집 양쪽에 대해 하셨다. 단체가 당연한 듯 주장해 배상요구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갖고 계셨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말씀하시는 것을 두려워 했다.

◇"정대협, 위안부 공론화 성공했지만…일본 설득 못한 것 한계"

(사진=황진환 기자/자료사진)
▶다른 할머니들도 정대협 운동 방식에 의문을 품었나.

=배 할머니뿐 아니라 다른 할머니들도 몇몇 분이 사죄 보상 방식에 대해 지원 단체와는 다른 이야기를 내게 했었다. 그래서 2014년 4월에 행한 '위안부 문제, 제3의 목소리' 심포지엄에서 "정대협 말고 나에게 보상금을 달라"고 말한 할머니의 목소리를 내보내기도 했다. 나는 내가 할머니들과 친밀한 사적인 관계를 갖고, 그런 과정에서 들은 목소리들을 여과 없이 세상에 알린 것 때문에 그들의 미움을 받았고, 결국 법적 분쟁에 휘말렸다고 생각한다.

※책 '제국의 위안부'는 2013년 8월 출간됐다. 위안부 할머니들로부터 박 교수가 고소를 당한 것은 이듬해 6월로, 위의 심포지엄이 열린 지 2개월 만이었다. 검찰의 수사 끝에 재판에 넘겨진 박 교수는 17년 1월 1심에서는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같은해 10월 2심에서는 벌금 1천만원형을 받았다. 최종심은 대법원에 계류중이며 위안부 할머니들이 박 교수를 상대로 제기한 민사소송은 이 형사재판 때문에 1심에서 멈춰있다.

▶정대협 중심의 위안부 운동, 어떻게 봐야 할까?

=정대협은 위안부 중심의 운동을 이미 오래 전부터 '변형'해 왔다. 우선 미군 기지 출신 여성들과 연대했고, 그 다음에는 베트남 성폭력 여성들과 연결했다. 아프리카 지역의 내전성폭력 피해 여성들과도 연대를 시작했다. 김복동 센터를 아프리카에 만들려고 했다는 것도 그런 연장선의 일이다. 여성주의 운동으로서 성폭력을 당한 여성을 돕는 취지는 100% 찬성한다. 운동의 외연을 잘 넓혀온 것으로 봐야 한다. 문제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내전 성폭력'과 '위안부'를 같은 것처럼 이해하도록 했다는 점이다. 어떻게 보면 '기만'이라고 할 수 있다. 외연을 넓히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아프리카에서 일어난 '부족간 강간'과 '위안부'를 같은 선상에 놓고 이해하도록 만든 것이다. 위안부 운동이 세계적인 운동이 됐다고 하지만 과연 운동의 내용과 방식이 정직했나. 그 점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위안부 운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이번 일을 대하는 정의연의 태도가 '왜 우리에게 흠집을 내냐'는 식이어서 실망했다. 쏟아지는 의혹에 대해 아무런 반성없이 '대의'라는 말로 모든 것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다. 정대협은 자신들이 세계적인 성과를 이뤘다고 강조한다. 위안부 운동의 공론화에 성공한 것은 맞다. 하지만 그 내용은 꼭 정확하지 않고 그 때문에 반발만 샀다. 현재 한일관계 악화 배경에는 위안부 문제가 있다.

일본도 잘못을 인정하고 완벽하지 못했을지 모르나 두번에 걸쳐 사죄하고 보상했다. 그 사죄보상을 받아들인 할머니는 80% 정도다. 그런데도 일본의 보상 시도는 전부 거부되었고, 과장된 내용만을 전세계에 유포해 억압하려는 활동이 해결로 이어질 리 없다. 그럼에도 (정대협은) 한국이나 다른 나라를 향해 일본이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았거나 진정성이 담기지 않은 시도인 것처럼 선전해 왔다. 30년 위안부 운동은 자신들이 내세운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으니 그것이 한계점이다. 공은 공대로 인정하더라도, 냉정한 평가가 이뤄져야 하는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진정한 당사자 주의가 아니었다는 것이 여러 번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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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노컷뉴스 김태헌 기자] siam@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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