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와 싸우는데.. 더위에 쓰러진다

대구/박원수 기자 2020. 6. 11.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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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진, 폭염에 방치돼 잇단 탈진.. 정부, 뒤늦게 "예산 지원하겠다"

낮 기온이 32도까지 오른 10일 오후 1시쯤 서울 서초구 보건소 코로나 선별진료소로 사용 중인 컨테이너 안에서 나온 감염병관리팀 진료의사 김영일(65)씨의 이마와 코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눈에 쓴 고글에도 뿌연 김이 가득 서려 있었다. 김씨의 방호복을 살짝 젖혀 방호복 내부 온도를 재보니 38도에 육박했다. 그는 "레벨 D 방호복이 워낙 두껍기도 하고, 감염 위험 때문에 환자가 들어오면 에어컨을 켜지 않아 이렇게 땀을 흘릴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날 최고기온이 35도까지 치솟은 대구 중구보건소의 선별진료소에는 긴팔 가운을 착용한 검사요원의 볼이 빨갛게 익어 있었다. 간호사 오모(35)씨는 "너무 더워서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일하고 있다. 대구의 보건소들은 다 이럴 것"이라고 했다.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면서 코로나 방역의 최일선에서 싸우고 있는 선별진료소 의료진의 건강이 위협받고 있다.

서울 낮 최고기온이 32도까지 올라갔던 10일 서울 강서구보건소 선별진료소에서 방호복을 입은 의료진이 옷 안으로 바람을 집어넣고 있다. 이에 공기가 통하지 않는 방호복이 눈사람처럼 부풀어올랐다. 의료진이 내부 온도가 38도까지 올라가는 ‘찜통 방호복’을 입고 일하면서 탈진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장련성 기자

지난 9일 인천 미추홀구 선별진료소에서는 보건소 직원 3명이 야외에서 두꺼운 보호복을 입고 일하다 더위에 탈진해 병원으로 이송되기도 했다. 전국의 다른 진료소에서 근무하는 의료진 역시 비슷한 고충을 겪고 있다. 정부는 인천 보건소 직원들의 탈진 소식에 이날 부랴부랴 선별진료소 냉난방기 지원 방안을 내놓았다. 선제적으로 무더위 대책을 마련했어야 하지만 정부가 현장의 목소리를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우나 속에서 일하는 것 같다"

서초구 보건소에서 일하는 의사 김씨는 지난 2월부터 선별진료소에서 하루 4시간씩 진료를 보고 있다. 야근 당직을 한 다음 날 하루 쉬는 것을 제외하고, 주 6일을 한 주도 거르지 않고 일했다. 진료소 밖으로 나가거나 화장실에 다녀오면 방호복을 갈아입어야 하기 때문에 진료를 보는 중에는 음식은 물론 물도 거의 마시지 않는다. 김씨는 "최근엔 하루 검사자가 30~40명대로 줄었지만, 130~140명에 달할 때도 있었다. 일을 마치면 말도 하기 힘들 정도로 녹초가 됐다"며 "그나마 컨테이너에는 에어컨이라도 있지만, 밖에서 일하는 간호사들이 더 걱정"이라고 했다.

서울 낮 기온이 32도까지 오른 10일 오전 서울 양천구보건소 코로나 선별진료소에서 한 의료진이 얼음팩을 이용해 더위를 식히고 있다(왼쪽). 야외에서 일하는 간호사들은 보호 가운과 마스크, 장갑 등을 착용하고 일하다가 근무 교대 시간이 되면 벗는다(오른쪽). 코로나 방역 최일선의 의료진들이 더위와 사투를 벌이는 가운데 정부와 지자체가 현장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장련성 기자·연합뉴스

선별진료소는 검사자들이 대기하거나 검체 채취를 하는 야외 텐트, 증상 유무를 검사하는 컨테이너 박스 등으로 이뤄져 있다. 컨테이너 진료소에서 일하는 의사와 간호사들은 레벨D 방호복을 착용하고, 검사자 대기와 문진표 작성 등을 돕기 위해 야외에서 일하는 간호사들은 방호복보다 얇은 보호 가운과 마스크, 안면 보호구(페이스 실드), 장갑 등을 착용하고 일한다. 샤워 시설 등이 따로 갖춰져 있지 않아 이전보다 가운을 자주 갈아입는 것 말고는 특별한 대책이 없다. 서초구 관계자는 "지난주부터 '너무 덥다'는 민원이 쏟아져 대형 선풍기와 야외용 냉풍기 등을 진료소에 가져다 놓긴 했지만, 냉방 기기 사용을 최대한 자제하라는 정부 지침상 주로 대기하는 시민들 쪽으로만 틀어놓고 있다"고 했다.

진료소뿐 아니라 구급차 이송을 담당하는 의료진 역시 무더위로 몸살을 앓고 있다. 구급차는 대부분 선팅이 돼 있지 않고, 확진자를 이송하는 경우가 많아 침방울이 날릴까 봐 에어컨을 틀 수도 없다. 양천구 보건소의 오서윤 간호사는 "어제 환자 이송을 위해 구급차로 왕복 3시간 반 거리를 다녀왔는데, 마치 사우나 안에 있는 것 같았다"고 했다.

더워지면서 시민들 짜증까지 늘어

기온이 오르며 진료소를 찾은 시민들의 짜증이 느는 것도 의료진에겐 고역이다. 이날 오후 1시쯤 서울 양천구 보건소는 최근 실내 탁구장 중심으로 집단감염이 확산하면서 수십명이 검사받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한 중년 남성은 문진표도 작성하지 않고 다짜고짜 방호복을 입은 의료진에게 "검사해달라"고 했다. 간호사가 "문진표를 먼저 작성해달라"고 하자 "뭘 자꾸 하라는 거냐"며 언성을 높였다.

이곳에서 일하는 이은지 간호사는 "날이 더워지고 검사자가 하루 60여명 수준에서 140~160명으로 대폭 늘면서 대기 시간이 길어지자 진료소를 찾는 시민들이 불만을 터뜨리는 경우가 늘었다"고 했다. 서울 노원구 보건소 이은주 소장은 "'더운데 사람을 왜 이렇게 세워놓느냐'며 화내는 사람이 늘어 고충이 많다"고 했다.

손 놓은 정부에 자구책 찾는 지자체

정부는 뒤늦게 예산 30억원을 투입해 선별진료소 냉난방기 설치 지원 방안을 내놓았다. 진료소에서 냉난방기를 먼저 설치한 뒤 정부에 비용을 청구하면 설치비 전액을 지원받을 수 있다. 현장에서는 "사후적인 지원 대신 정부가 선제적으로 더위 대책을 마련해달라"는 목소리가 나오지만, 정부는 "진료소별로 상황이 달라 일괄적인 지침을 내리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이에 지자체들은 자체적으로 무더위 대책을 내놓고 있다. 양천구 측은 이날부터 개당 6만원인 쿨링 조끼를 의료진에게 지급했다. 조끼에 배터리와 작은 선풍기가 달려 있어 입으면 등쪽으로 바람이 나와 더위를 식혀주는 방식이다. 다음 주부터는 서울시 지원 예산 3000만원을 투입해 공중전화 부스 형태의 검체 채취 컨테이너를 설치하기로 했다. 음압 설비를 갖춘 공중전화 부스 크기만 한 진료소 안에 내원자가 들어가면, 의료진이 벽에 부착된 장갑을 끼고 구멍 안으로 손을 넣어 환자의 검체를 채취하는 방식이다. 검사자와 의료진이 있는 공간이 분리돼 의료진이 있는 곳에는 에어컨을 틀 수 있게 된다. 이재기 중구보건소 보건과장은 "여름 동안만이라도 교대 시간을 앞당겨 1시간 단위로 근무할 수 있도록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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