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여권 소식통 "연내 日기업 자산매각 불가피..靑도 기정사실화"

김다영 입력 2020. 6. 15. 05:01 수정 2020. 6. 15.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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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구 없는 강제징용, 시한폭탄된 한·일관계 上]
강제징용 배상 8월부터 집행 가능
"청와대서도 기정사실화 분위기"
보복 충격 크지 않을 것이라 판단
일본 "자산처분, 양국관계 레드라인"
2018년 10월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이춘식(가운데) 씨와 유가족들이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앞두고 일본 기업의 사죄와 보상을 촉구하고 있다. 이날 대법원은 일본 기업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으며, 최근엔 이 배상 판결을 근거로 압류된 일본 기업의 재산 현금화가 진행되고 있다. [연합뉴스]


최근 법원이 강제징용 피고 기업의 국내자산 매각절차에 돌입하면서 정부 안에서 “올해 안에 일본 기업 자산의 현금화가 불가피하며, 일본의 2차 보복 조치에 대비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우세해지고 있다고 복수의 소식통들이 14일 밝혔다.

아직 외교부의 공식 입장은 “현금화가 되기 전에 최대한 일본 정부와 해법을 찾아보겠다”는 것이지만, 청와대 등 여권 핵심부에서는 ‘현금화 이후’를 대비하자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이대로라면 결국 ‘현금화→일본의 2차 보복 조치→한국의 추가 조치’로 이어져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55년 만에 양국 관계가 최악의 상황을 맞을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여권 내부 사정에 정통한 한 소식통은 이날 중앙일보에 “법원이 올해 안에 일본제철의 국내 자산을 강제 매각하는 것에 대해 청와대 내에서도 이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라며 “이에 따라 일본의 2차 보복에 대비하는 움직임이 있다”고 밝혔다.

이 소식통은 “지난해부터 (현금화 이후) 일본의 예상되는 각종 경제보복 조치를 검토해본 결과 일본이 쓸만한 카드가 많지 않고, 그 충격파도 생각보다 크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 작용하고 있다”고 전했다.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이 지난해 8월 28일 청와대에서 일본의 한국에 대한 경제 보복 조치인 '화이트리스트 배제'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정부의 이런 판단의 배경에는 지난해 일본의 ‘수출 규제' 예방주사 효과가 작용하고 있다고 한다. 일본 경제산업성이 지난해 7월 1일부로 한국의 주력 수출품목인 반도체 소재ㆍ부품 3종에 대해 규제를 했지만, 체감 타격이 그다지 크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

소식통들에 따르면 청와대 경제수석실 주도로 산업통상자원부ㆍ외교부는 이 무렵부터 일본의 각종 보복 시나리오를 검토해 왔다.

이와 관련, 또 다른 소식통은 “일본이 취할 수 있는 조치가 많지 않다는 게 현재 정부 내 판단”이라며 “1차 수출규제 때처럼 현금화로 인한 추가적인 보복도 견딜 수 있을 거라는 분위기가 있다”고 전했다.

2018년 10월 30일 고노 다로 일본 외상(왼쪽)이 도쿄 외무성에서 이수훈 주일 한국대사(오른쪽)를 초치해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해 항의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앞서 대구지법 포항지원은 지난 1일 강제징용 피고 기업인 일본제철이 국내 보유한 피앤알(PNR) 주식 등을 압류하겠다는 서류를 공시송달했다. 오는 8월 초 일본 측이 서류를 받았다고 간주하고 자산 처분 절차에 착수하게 된다. 실제 현금화까지는 압류 자산에 대한 감정 평가 등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하지만, 8월 초 이후에는 언제든 현금화가 이뤄질 수 있다.

이와 함께 지난 3일 산업통상자원부는 일본의 수출 규제 문제로 세계무역기구(WTO) 제소 절차를 재개했다. 이같은 일련의 조치는 일본의 2차 보복 조치가 '견딜 만하다'는 여권 핵심부의 판단에 따른 실행 조치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한국 정부는 지난 2일 수출규제 조치를 유지 중인 일본을 상대로 세계무역기구(WTO) 분쟁해결 제소 절차를 6개월 만에 재개한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일본은 강제징용 문제에서 자국 기업의 국내 자산 처분을 한·일 관계의 레드라인으로 수차례 언급해왔다. 모테기 도시미쓰(茂木敏充) 외상은 이달 3일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의 통화에서 “일본 기업의 한국 내 자산 현금화는 심각한 상황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한 것을 비롯해 수차례에 걸쳐 일본의 입장을 전달해왔다.

일본 측은 또 자국 기업의 한국 내 자산이 강제 매각되면 보복 조치를 하겠다고 공언해왔다. 지난해 3월에는 “일본 정부는 현금화가 될 때를 대비해 100개 안팎의 보복 리스트를 짜고 있다”는 교도통신 보도도 있었다.

정부가 검토해온 일본의 2차 보복 조치 중 유력한 방안의 하나로 일본 내 한국 기업의 ‘자산 맞몰수’ 조치도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한국 측이 일본제철 등의 재산을 강제 처분하는 것과 똑같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보복 조치다.

외교부 등에 따르면 상대 국가가 국제법을 어겨 자국에 손해를 입히면, 비슷한 수준으로 맞대응하는 것이 국제적인 관례인 것은 맞다. 2001년 유엔 산하 국제법위원회(ILC)의 ‘국가 책임에 관한 협약 초안’의 “국제적으로 잘못된 행동을 한 국가에 대해 대응조치를 할 수 있다”(제49조)는 규정에 따라서다.

이 경우에도 한국이 국제법을 어겼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것은 일본 쪽이 될 수 있다. 이기범 아산정책연구원 국제법센터장은 “일본이 자산 맞몰수를 하려 해도 어떤 기업을 대상으로, 어떤 명분으로 할지 논란의 여지가 있다”며 “일본으로서는 부담스러운 선택지”라고 말했다.

지난 3월 10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별관에서 열린 제8차 한일 수출관리 정책대화 영상회의 화면에 한국 수석대표 이호현 산업통상자원부 무역정책관(위)과 일본 수석대표 이다 요이치(飯田陽一) 경제산업성 무역관리부장이 회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뉴스1]


이외에도 일본의 2차 보복 조치는 통화 스와프 불연장 등 금융 조치와 비자 제한 연장 등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일본과의 통화 스와프는 독도 문제 등으로 2015년 2월 이미 중단됐고, 한국은 현재 미국(600억 달러ㆍ약 71조원)을 비롯해 중국ㆍ스위스ㆍ캐나다 등 9개국과 1932억 달러(약 231조) 규모의 통화 스와프를 체결하고 있다.

비자 제한 또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응을 이유로 지난 3월부터 사실상 시행 중이다. 더구나 한국인에 대한 사증 면제제도 중단과 신규 비자 발급 중단은 한국인 관광객 감소로 이어져 일본의 지방경제와 관광산업에 타격을 줄 것이라는 우려가 일본 안에서도 나오고 있다.

한 외교 소식통은 “일본 측도 보복 조치의 실효성이 크지 않다는 걸 알고 있지만, 자국 기업의 자산에 대한 경매 단계로 접어들면 국내 정치적인 차원에서라도 무엇이든 보복 조치를 하려 할 것”이라고 말했다.


양국 외교 당국의 공식 입장은 “실제 현금화가 되기 전까지 최대한 해법을 찾겠다”는 것이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다. 한국 정부는 “사법 절차에 관여할 수 없다”는 입장이고, 일본 정부는 “일본 기업이 돈을 내는 대법원 판결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강제징용 대법원 판결이 나온 후 1년 8개월 동안 양국 정부는 각자의 국내 정치적 이유로 사실상 해법 마련에 손을 놓아왔고, 결국 이제 한·일 관계는 마주 보고 달리는 열차가 충돌하기 일보 직전인 상황이 되고 말았다.

다만, 일본의 수출 규제와 맞물려 있던 한ㆍ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ㆍ지소미아)의 경우 정부는 일단 미국과의 관계를 고려해 “(종료 여부는) 신중하게 검토해야 할 사안”이라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유정·김다영 기자 kim.dayou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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