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차례 반성문에도 법정최고형..'로리대장태범' 엄벌 이유는?

장예지 2020. 6. 18.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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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THE) 친절한 기자들] 재판부, '제2 n번방' 운영자
'로리대장태범' 장기 10년형 단기 5년형 선고
판결문서 '치밀한 범행, 피해자 고통' 강조
본인 반성문, 가족 탄원서 '공세'에도 감형 안해
‘엔번방’을 모방해 이른바 ‘제2의 엔번방’을 만든 닉네임 로리대장태범의 재판이 진행된 지난 3월31일 춘천지법 앞에서 여성단체 회원 등이 손팻말을 들고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처벌 강화와 피해자 보호 등을 요구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지난 5일 춘천지법 형사2부(재판장 진원두)는 텔레그램 ‘제2엔번방’을 운영하며 미성년자를 협박해 성착취물을 제작·배포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주범과 공범들에게 디지털 성범죄 사건으로선 흔치 않은 중형을 선고했습니다. 닉네임 ‘로리대장태범’을 쓰는 배아무개(19)군은 고등학생 소년범에 해당했지만, 법정 최고형인 징역 장기 10년에 단기 5년을 선고하며 10년간의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을 명령한 것입니다. 공범인 닉네임 ‘슬픈고양이’ 류아무개(20)씨에게도 징역 7년이 선고됐습니다.

배군의 형량은 검찰이 요청한 구형과 일치합니다. 류씨의 형량도 검찰 구형인 징역 8년보다 1년만 깎였습니다. 디지털 성범죄 재판에선 통상 검찰이 높은 형량을 구형해도 법원 선고 단계에선 절반 이상 깎이거나 집행유예형이 나오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번 재판부는 “갈수록 교묘하고 집요해지는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관련 범죄를 근절하고, 아동·청소년을 두텁게 보호해야 할 사회적 필요성이 매우 크다”며 중형을 선고한 것입니다.

배군 등은 조직적으로 중학생 등 미성년자인 피해자들을 모집해 69개의 성착취물을 제작하고, 유아부터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178개를 배포한 혐의로 구속기소됐습니다. 배군은 텔레그램에서 이런 성착취물 사진과 동영상 3천개를 단체대화방 회원 6천여명에게 배포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범행을 인정했지만 재판 과정에서 ‘형량 줄이기’를 위한 반성문을 거듭 냈습니다. 지난 1월 재판이 시작된 뒤 주범인 배군은 19차례, 공범 류씨는 7차례 반성문을 썼습니다. 선처를 구하는 가족 등이 탄원서를 낸 횟수도 16번에 달했습니다. 반면 피해자는 재판에 대한 두려움이 컸기 때문에 방청과 의견 진술 모두 원치 않았습니다. 상대적으로 피해자의 목소리는 피고인에 비해 재판부에 직접 닿기 어려운 상황이었지요.

그러나 18일 <한겨레>가 확인한 이들의 판결문을 보면, 재판부는 법원이 형량을 정할 때 관행적으로 반영해온 ‘진지한 반성’이나 ‘사회적 유대관계’ 등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양형이유를 보면, 유리한 사정은 ‘피고인은 소년이고 아무런 형사처벌 전력이 없다(배씨)’거나 ‘피고인은 아무런 형사처벌 전력이 없다. 피고인은 수사에 협조하였다(류씨)’는 단 한 줄에 불과했습니다. 반면 이들이 엄한 처벌을 받아야 하는 ‘불리한 사정’은 판결문 한 쪽을 넘겼습니다. 재판부는 이들이 조직적으로, 치밀하게 범행을 기획한 점을 근거로 피고인이 아닌 ‘피해자의 고통’을 다음과 같이 강조했습니다.

“피고인들은 정신적으로 미성숙해 위험을 인지하거나 자신을 방어할 능력이 부족한 피해자를 표적으로 삼아 교묘하게 옭아맨 후 그들을 성적 도구로 삼고 착취하였다. 피고인들의 범행으로 피해자들은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겪었거나 현재도 겪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피해자) 정보 탈취부터 협박, 추행, 음란물 제작 등의 범행 특성과, 한 번 피해영상 등이 제작된 이상 계속 유포되거나 재생산될 우려가 있고, 피해자들은 그로 인한 불안감에 시달릴 수 있다. 피고인들이 저지른 범행은 심각하고 지속적인 피해를 발생시킬 수 있는 중대한 범죄이다.”

특히 연일 반성문을 냈던 주범 배군에 대해서는 “범행이 발각될 경우 ‘꼬리 자르기’를 어떻게 할 것인지까지 대비하는 등 매우 치밀하게 범행을 실행했고, 범행 과정 중 피해자들이 고통을 호소함에도 집요하게 범행을 계속하였으며, 범행 과정을 텔레그램 대화방에서 자랑하기도 했다”며 그 죄질이 매우 나쁘다고 판단했습니다. 또 위치추적 전자장치 청구 조사관의 의견 등을 토대로 “재범의 위험성이 있다”며 성인에 비해 처벌 수위가 낮은 소년범임에도 전자발찌를 채우는 강도 높은 처벌을 결정했습니다.

법원의 이런 판단은 텔레그램 사건 수사와 재판이 이어지고, 디지털 성범죄 양형기준을 만들어 나가는 현 시점에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비록 개별 사건에 대한 판단이지만, 디지털 성범죄의 잔혹성과 특수성을 강조하고 엄벌 필요성을 법원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피해자를 대리한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의 백소윤 변호사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이번 판결처럼 하급심에서부터 (양형이 높은) 판결들이 쌓이면 양형기준 설정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앞으로 진행될) 텔레그램 사건 재판에서도 이번 판결을 근거로 피고인이 아무리 많은 반성문을 낼지라도 유리한 양형 사유로 보지 않아야 한다는 의견을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장예지 기자 pen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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