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우려되는 여권의 "남북 관계의 과감한 돌파"..우리만의 '희망 사항' 아닌가

이유정 입력 2020. 6. 18. 18:42 수정 2020. 6. 19. 0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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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이 지난 2018년 4월 27일 경기 파주시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서 자리에 앉고 있다. 오른쪽은 김여정 당 중앙위 제1부부장. [연합뉴스]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의 17일 담화는 이달 초부터 이어진 북한의 ‘몽니 해설서’로 치자면 일종의 종합판이었다. 김여정은 “더이상 북남 관계를 론(논)할 수 없”으며, “앞으로 남조선 당국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후회와 한탄뿐”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미련한 주문을 한두 번도 아니고 연설 때마다 제정신없이 외워대고 있는 것은…정신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고 한 대목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을 직접 겨냥했다. 쓸데없는 희망은 그만 접으라는 얘기다. 전날 국민 혈세 168억원이 투입된 개성 남북연락공동사무소를 예고없이 폭파하는 만행에 이어 북한이 결국 남북을 잇는 다리에 불을 놓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종합해보면 김정은(북한 국무위원장)ㆍ여정 남매는 단순한 분노 표시를 넘어 여러 계산 끝에 임기가 2년 남짓한 문재인 정부와는 “더이상 거래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17일 2면에 개성의 남북 공동연락사무소 폭파 현장을 공개했다. [뉴스1]


이런 북한의 선언에도 여권 한쪽에서는 여전히 ‘희망 사항 내지는 희망적 사고(wishful thinking)’를 버리지 못하는 모습이다. “북한이 화를 내고 있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해석 말이다.

대표적인 게 윤건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우리 정부가 과감한 돌파를 해야 하는 시기다. 남과 북이 손을 잡고 가야할 지점이 온 것은 아닌가”(18일 MBC 라디오 대담)라는 발언이다. “한·미 워킹그룹의 중지라든지 구체적인 실천이라도 하나 나와야 되는 것”(홍익표 민주당 의원)이라거나, “미국이 반대해도 개성공단ㆍ금강산 관광을 재개해야 한다”(김두관 민주당 의원)라는 반응도 같은 맥락이다. 이에 앞서 지난달 말 “제재를 방어적으로 해석해선 안 된다. 남북합의를 강하게 이행해야 한다”고 했던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의 상황 인식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서훈 국정원장(왼쪽)이 2018년 4월 27일 오후 판문점 평화의 집 앞에서 열린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판문점 선언이 끝난 뒤 눈물을 훔치고 있다. 앞쪽은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 [청와대사진기자단]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겠다는 건 좋다. 문제는 희망에만 기대다 현실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 하거나, 상황을 오히려 악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2018~2019년 남북ㆍ북미 대화의 흐름을 보면 북한의 요구 사항은 결국 “정상국가로 기능할 수 있도록 제재를 풀어달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하노이 북ㆍ미 정상회담(2019년 2월)에서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의 최근 5건 해제-영변 핵 시설’ 맞교환을 요구했다. 북한으로선 대화에 나선 이유가 제재를 걷어내는 것인데, 그걸 못 얻어냈으니 남북 관계도 더이상 지속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이달 7일 김 위원장이 직접 주재한 당중앙위 정치국 회의에서 “평양 시민의 생활 보장과 관련한 시급한 대책”이 논의됐는데, 북한 통치체제의 기반인 평양까지 제재의 어려움이 닥쳤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올해는 코로나19 여파로 경제적 어려움이 배가 됐을 것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해 6월 30일 오후 판문점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배웅을 받으며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측으로 돌아가다 잠시 뒤돌아보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대북 제재의 키를 쥐고 있는 미국도 북한만큼이나 입장이 분명하다. “영변만으로 제재 5건 값을 쳐줄 수 없다”는 것이다. 물건을 내놨는데 사려는 사람이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면, 값을 깎는 건 북한 쪽이어야 할 수 있다. 지금의 남북관계 파탄은 한국이 북ㆍ미 사이에서 의중을 정확히 전달하지 못한 탓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북한이 원하는 것을 한국 홀로 얻어줄 수 없다는 데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여권 일각이 말하는 “남북문제의 과감한 돌파” 만으로 북한이 만족할지는 불분명할뿐더러, 미국을 움직이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러 국내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오히려 한국을 적으로 돌리면 얻을 수 있는 게 더 적어질 수 있다는 점을 김정은ㆍ여정 남매에게 분명히 인식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번 일을 기회로 남북관계 개선의 틀과 방향을 다시 고민해보자는 목소리도 설득력이 있다. 오늘날 1980년대생 밀레니얼 세대인 김정은ㆍ여정 남매가 이끄는 북한과 그들이 바라는 남북 관계는 현 여권ㆍ청와대 주류인 ‘86그룹’이 바라보는 북한의 모습과 다를지도 모른다. 민족의 가슴 뭉클함이나 혈육의 애틋함보다, 철저히 실리주의적인 계산이 앞설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7일 오후 판문점 도보다리에서 산책하고 있다. [연합뉴스]


목표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는 것과 현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건 별개의 문제다. 지금은 우리만의 '희망적 사고'를 잠시 접고, 보다 냉정한 시각으로 현실적인 해법을 찾아가는 계기로 삼는 게 어떨까.

이유정 국제외교안보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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