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인계 쓰고, 돈 붙여 날리고..남북 '70년 삐라 전쟁'

정경훈 기자 2020. 6. 21.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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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1g 폭탄' 삐라 - ①
북한 주민을 회유할 의도로 만들어진 삐라 /사진=e뮤지업 전국박물관소장품 검색

남북의 ‘삐라전’은 휴전선이 막지 못한 소리 없는 전쟁이다. 남북은 한국전쟁 시작과 함께 ‘삐라(전단)’를 뿌렸다. 한국전쟁 당시 한반도에 떨어진 삐라만 28억장으로 추산된다. 한반도를 20번 덮는 양이다.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된 올해까지 삐라전은 이어지고 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삐라의 내용을 바뀌었다. ‘미인계’가 쓰일 때도 있었다. 지속된 '종이 폭탄'은 결국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를 불러왔다.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은 "현 사태가 쓰레기들의 반공화국삐라살포망동과 그를 묵인한 남조선당국때문에 초래됐다"며 남북공동연락사무소까지 폭파했다. 이어 북한 노동신문은 19일 "최대 규모의 무차별 삐라 살포 투쟁에 전격진입할 열의에 넘쳐 있다"며 삐라전을 예고했다.

"적을 삐라로 파묻어라"...하늘에 날린 삐라 28억장
한국전쟁 때 폭격기가 지나가면 폭탄 대신 삐라가 떨어졌다. 한국전쟁 당시 프랭크 페이스 미국 육군부 장관은 "적을 삐라로 파묻어라"는 명령을 내릴 정도였다. 휴전 협정이 체결된 1953년 7월 27일까지 뿌려진 삐라는 총 28억장. 남한과 유엔군이 25억장, 북한, 소련 등이 3억장을 뿌렸다.

연구에 따르면 한국전쟁이 같은 민족 간 벌어진 전쟁이라는 특징은 '심리전' 수단인 삐라를 적극 사용하도록 만든 배경 중 하나로 꼽힌다. 언어·문화 장벽이 없어서다.

북한군을 유엔군으로 넘어오도록 회유하는 삐라 /사진=e뮤지엄 전국박물관소장품검색


한국전쟁에서 '삐라'는 주로 상대방의 귀순(투항)을 유도했고, 향수를 자극해 전의를 상실하게 만들거나 이간질을 획책하는 데에도 사용됐다. 상대방 지도부를 비난하거나 휴전회담을 촉구하는 데에도 쓰였다.

'지휘자가 북한 출신이니 와서 이야기를 들려달라' '배고픔과 추위를 이길 수 있다' 등의 내용이 주를 이뤘다. '중공군은 못쓸 무기만 북한에 준다'거나 '미국 자본가들은 총탄으로 돈 번다' 등 내부를 이간질하거나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을 강조하는 내용도 있었다.

전쟁 당시 삐라는 상대방의 귀순 결정이나 전의 상실에 유의미한 영향을 줬다. ‘'종이 한 장에 담긴 치열했던 심리전'에 따르면 1950년 10월 1737명의 북한·중국군 포로 가운데 742명(42.7%)가 삐라를 보고 결정했다.

"체제 과시부터 미인계까지…요란했던 삐라 전쟁“
유효한 전쟁 무기였던 삐라는 휴전 후에도 계속 사용된다. 북한이 경제력 우위에 있던 1950~1970년대에는 북이 남으로 뿌리는 삐라의 양이 많았다.

특히 1950~1960년대에는 남한을 대상으로 사상적 우월성을 강하게 내세웠고, 실제 월북한 인사도 다수 존재했다. 당시 북한은 '김일성 장군님'에 대한 자랑과 함께 북한에서는 치료비가 없다거나 배불리 먹고 살 수 있다는 등의 경제 공세까지 내세웠다. 남한 주민들이 읽도록 '달러'를 붙여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남한이 체제경쟁에서 우월성을 가지기 시작하며 삐라 전쟁의 양상도 바뀐다. 남한 삐라에 그전에는 없던 백화점, 공원의 사진이나 '자가용 1000만대 생산' 등의 내용이 담긴다. 1999년 탈북한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는 "컬러풀한 백화점, 자가용 사진 등은 경제력 차이에 대한 '팩트'를 제공해 많은 탈북민들의 탈북 동기가 됐다"고 말했다.

미인계와 물질적 번영을 내세워 탈북을 권하는 목적의 삐라 /사진=e뮤지엄 전국박물관소장품검색


삐라에는 상대 정부에 대한 비난, 체제 우월성 과시와 더불어 '미인계'나 잡다한 물품도 사용됐다. 선정적인 여성의 사진이 선전 도구로 이용된 것이다. 예컨대 남한의 경우 중앙정보부가 1980년대 여성 모델의 사진을 삐라에 담아 보냈다. 이 외에 콘돔, 시계, 담배, 화장품 등이 포함됐다.

북한은 체제 경쟁에서 패배가 확정된 1990년대 이후 선정적인 사진을 늘렸다. 대통령과 여배우의 잠자리 합성 사진, 한국 연예인이 북한 체제를 찬양하는 가짜 사진 등을 삐라에 담아 보냈다.

남한 정부는 '삐라' 중단...탈북민이 보내는 삐라
1990년대 이후 북한은 체제 경쟁에서의 패배를 인식한듯 삐라 살포를 크게 줄였다. 그러나 2016년에도 동해에서 '주한미군 철수' 등을 다룬 북한 삐라가 발견되는 등 살포는 지속되고 있다. 남한은 2004년 정부 차원의 삐라 살포를 공식 중단했다.

그러나 이때부터 탈북민 출신 인물들이 꾸린 민간단체가 삐라 살포에 나섰다. 지난달 31일 삐라를 살포한 박상학 자유북한운동연합 대표나 이민복 대북풍선단장 등이 대표적이다.

2016년 동해에서 발견된 삐라 /사진=뉴스1


이들은 삐라와 함께 쌀이 든 페트병을 살포하고 최근에는 드론을 이용하기도 한다. 삐라에는 주로 '한국전쟁은 김일성이 일으켰다' '남한 경제력이 북한을 압도한다' '김정일이 모스크바 출신이며 러시아식 이름은 유라' 등의 내용이 담긴다.

일부에선 삐라전이 수명을 다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동엽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2000년대 넘어서는 북한 사람들이 '삐라'를 보고도 시큰둥해 한다"며 "이미 암암리에 스마트폰이나 드라마로 한국 사회에 대해 다 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2010년대 이후 넘어온 사람들은 '사상적 전향'이 아니라 '경제적 탈북'"이라며 "오히려 사상교육이 투철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최고 지도를 관계인을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전보를 뿌리면 반감만 커진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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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훈 기자 straight@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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