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이야기] 일본 관리들 몰려와 '독도는 일본 영토' 표지판 설치

이선민 선임기자 입력 2020. 6. 21. 11:00 수정 2020. 6. 21.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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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민의 독도이야기]
[8] 일본, 독도를 불법 침범하다
1953~54년 중앙·지방정부 번갈아 독도 상륙
한국은 상주경비대 파견해 무력으로 몰아내

※독도를 둘러싼 한국과 일본의 갈등은 한편의 대하드라마와 같다. 수많은 집념어린 인물들이 등장하고, 여러 가지 쟁점을 놓고 격론과 공방이 오간다. 그리고 무대 위에는 주인공인 한·일 양국뿐 아니라 심판 격인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사회가 있다. 1945년 일제 패망 이후 본격화된 ‘독도 문제’의 역사와 현황을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들을 포함하여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매주 일요일 연재한다. /편집자

1954년 8월 독도에 설치된 등대와 그 밑 바위에 새겨진 '한국령' 표지.

일본은 1945년 8월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1952년 1월 한국이 평화선을 선포할 때까지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적이 없다. 1947년 6월 일본 외무성이 만든 팸플릿이나 미국을 대상으로 한 막후 공작에서는 독도가 일본 영토라고 주장했지만 직접 한국을 상대로 독도 영유권을 내세우지는 않았다. 연합국최고사령관지령(SCAPIN) 제1033호에 의해 일본 선박의 독도 접근이 금지돼 있었기 때문에 일본 관리들이 독도를 찾지도 않았다. 1949년 7월과 1951년 5월 일본 민간인이 표류하거나 독도에 들른 적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조인을 앞두고 일본 내의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8월 30일 시마네현이 대일(對日) 평화조약에서 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것을 확인해 달라는 진정서를 외무대신에게 제출했다. 10월 22일 일본 국회에서 외무성 고위 당국자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이 독도를 일본 영토로 확인했다고 발언했다.

이 발언이 나온 직후인 1951년 11월 아사히(朝日)신문이 일본 중앙언론으로는 처음 독도를 방문해서 보도했다. 아사히신문의 취재기자와 사진기자는 11월 13일 오후 돗토리현 사카이항을 출발하여 이튿날 아침 독도에 도착했다. 이들은 취재 결과를 11월 24일자 아사히신문에 실었다. ‘일본에 돌아온 무인(無人)의 다케시마(竹島)’라는 제목을 단 장문의 기사는 독도에 기괴한 강치 무리가 살고 있고, 한국인의 조난비가 설치돼 있다고 적었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일본 중앙언론으로는 처음 독도를 답사 보도한 아사히신문 1951년 11월 24일자./ '독도 1947'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체결을 앞두고 독도와 관련해 한국과 벌인 외교전에서 우위에 섰다고 생각했던 일본은 한국이 예상치 않게 평화선을 선포하며 독도에 대한 실효적 점유 의지를 분명히 하자 당황했다. 하지만 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주장의 근거가 약했기 때문에 직접적인 대응은 자제하고 우회적인 방법으로 독도 분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고 했다. 평화선 선포를 비난하는 성명을 계속 발표하고, 독도를 주일 미 공군의 폭격 연습장으로 지정하는 등의 술책이 그런 것이었다.

◇독도에 일본 공권력 행사하는 쪽으로 방침 바꿔

그러나 1953년 5월부터 일본의 전략이 달라졌다. 한국 정부의 항의를 받은 미군이 독도를 주일 미 공군의 폭격 연습장에서 해제하자 독도에 직접 일본의 공권력을 행사하는 쪽으로 방침을 바꾼 것이었다. 지방정부는 물론 중앙정부 관리들이 잇달아 독도를 불법 침범하기 시작했다. 해상보안청은 독도 부근에 순시선을 파견했다.

1953년 5월 28일 시마네현 수산시험선이 독도 앞바다에 나타났다. 선원 등 30명이 타고 있었고, 그 중 6명이 독도에 불법 상륙했다. 당시 독도에는 한국인 어부들이 고기를 잡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이들과 대화를 시도했지만 말이 통하지 않자 물러갔다. 그로부터 한 달 가량 지난 6월 25일 미국기를 게양한 목조선 한 척이 독도에 접근했고, 9명이 내렸다. 이들은 한국 어부들과 독도조난어민위령비를 촬영한 뒤 떠났다.

두 차례에 걸쳐 독도 사정을 탐색한 일본은 행동에 나섰다. 1953년 6월 27일 역시 미국기를 단 함정 두 척이 독도 부근에 도착했고, 30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이 배에서 내렸다. 이들은 일본 법무성 입국관리국, 국립경찰 시마네현 본부, 시마네현청 소속 관리들로 권총과 사진기를 들고 전투모를 착용하고 있었다. 이들은 앞뒤에 검은 글씨로 ‘시마네현(島根縣) 오치군(隱地郡) 고카무라(五箇村) 다케시마(竹島)’라고 쓴 표주(標柱) 2개와 ‘주의. 일본 국민 및 정당한 수속을 거친 외국인 이외는 일본 정부의 허가 없이 영해(도서 연안 3리) 내에 들어감을 금(禁)함’ ‘주의. 다케시마(연안도서를 포함)의 주위 500미터 이내는 제1종 공동어업권이 설정되어 있으므로 무단 채포(採捕)를 금함. 시마네현’이라고 쓴 게시판 2개를 한국 정부가 설치한 독도조난어민위령비를 둘러싸고 사방으로 포위하듯 설치했다.

1953년 6월 27일 독도를 침범한 일본 관리들이 설치한 '일본 영토' 표주(오른쪽)와 게시판. /'독도문제개론'

일본의 거듭되는 독도 불법 침범은 한국의 여론을 악화시켰다. 6·25전쟁이 끝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독도를 침탈하는 일본의 행태에 대해 한 신문은 “‘화재 터의 좀도적’ 같다”고 분개했다. 국회와 경상북도 의회는 대통령에게 독도 수호를 위한 적극적인 조치를 촉구했다. 이에 따라 한국 정부는 1953년 7월 8일 외무부·국방부·내무부·해군 등 관련 부서의 국장급이 참여하는 ‘독도 문제에 관한 관계관 연석회의’를 열고 대책을 마련했다. 해군 함정 파견, 등대 설치, 측량표 설치, 역사적·지리학적 조사의 4개 항이 결정됐다.

1953년 7월 11일 울릉도경찰서는 김진성 경위, 최헌식 경사, 최용득 순경으로 구성된 ‘순라반(巡邏班)’을 독도에 파견했다. 이들에게는 경기관총 2문이 주어졌다. 이들이 독도에 도착한 다음날인 7월 12일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이 독도에 접근했다. 순라반이 한국 영해를 침범했으니 울릉도경찰서까지 동행할 것을 요구했지만 일본 순시선은 이를 거부하고 달아났다. 순라반은 정지를 명령했지만 듣지 않자 경기관총을 위협 발사했다.

이후로도 일본 관리들은 1953년 8월~10월 한국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여러 차례 독도에 불법 상륙하거나 독도 해역을 침범했다. 이 가운데 10월 17일 독도 앞바다에 나타난 일본 순시선에는 독도 문제에 관한 일본 쪽 최고이론가인 외무성 사무관 가와카미 겐조, 일본제국의 육군대좌 출신으로 일본 우익의 대변자였던 쓰지 마사노부 중의원 의원 등이 타고 있었다. 일본의 중견 외교관과 중진 정치인이 직접 독도 시찰에 나선 것은 이 무렵 독도 문제에 일본이 기울인 관심과 열의를 보여준다.

◇한·일 양국 영토 표지판 설치와 철거 반복돼

독도를 계속 침범하는 일본과 이를 막으려는 한국의 마찰이 극명하게 드러난 것은 영토 표지판 설치를 놓고 벌어진 공방이었다. 1953년 6월 27일 독도에 일본 영토 표주(標柱)를 설치한 일본 관리들은 1947년 8월 한국산악회의 제1차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대가 설치했던 두 개의 한국 영토 표목(標木)을 뽑아버렸다. 일본인들이 설치한 표주는 일주일 뒤인 7월 3일 경상북도 경찰국이 철거했다. 8월 7일 일본이 다시 독도에 불법 상륙해서 일본 영토 표주를 설치했지만 이번에도 9월 17일 울릉경찰서가 제거했다. 일본은 10월 6일 세 번째로 영토 표주를 설치했고, 10월 13~16일 독도를 찾은 한국산악회의 제3차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대가 이를 철거하고 한국 영토 표석을 설치했다. 하지만 이 표석은 10월 21일 독도에 온 일본 관리들이 철거했다. 10월 23일 일본이 설치한 네 번째 영토 표주는 독도에 들어가기 어려운 겨울철을 지나 이듬해인 1954년 5월 말 철거됐다. 불과 4개월 사이에 여섯 번이나 독도에 한국과 일본의 영토 표지판이 번갈아 설치되고 철거되는 ‘전투’가 벌어진 것이었다.

일본 관리들이 설치한 '일본 영토' 표주를 한국인들이 뽑아내고 있다.

1953년 10월말 이후 잠잠했던 일본의 독도 불법 침범은 1954년 봄이 되자 다시 시작됐다. 3월부터 6월까지 시마네현과 돗도리현, 해상보안청의 선박들이 줄을 지어 독도에 불법 상륙하거나 독도 해역을 침범했다.

이에 대한 한국 정부의 대응도 본격화됐다. 1954년 6월 독도에 상주경비대가 파견됐고 이들이 거주하는 막사가 건설됐다. 8월에는 높이 6m의 등대를 설치하고 미국·영국·프랑스·교황청에 이를 알렸다. 또 경비용 초소와 무선통신시설도 독도에 들어섰다. 독도 등대 아래 바위에는 ‘한국령(韓國領)’이라는 커다란 글씨가 새겨졌다. 9월에는 독도의 모습을 담은 기념우표도 2환·5환·10환 세 종류가 발행됐다. 일본 정부는 “일본 영토인 독도가 그려진 한국 우표가 붙은 우편물은 한국에 돌려보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다.

1954년 9월 발행된 독도 우표 3종.

◇두 차례 총격사건, 박격포까지 발사돼

한국과 일본이 독도 관련 활동을 강화하면서 긴장이 높아지는 가운데 1954년 8월 23일 또 한 차례 총격사건이 발생했다.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이 독도에 접근하자 한국 독도경비대는 600여 발의 총격을 가했고, 일본 순시선도 응사하면서 도주했다. 이 소식은 주한 외교사절들을 통해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이 사건이 일어난 뒤 한국 정부는 1954년 8월 31일 국무회의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독도를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수백 명의 경관을 상주시킨다”고 결의했다. 10월에는 독도에 박격포가 설치됐다. 11월 21일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 두 척이 독도를 다시 침범하자 박격포탄 5발이 발사됐다.

한국이 이처럼 독도 수호의 강력한 의지를 물리력을 동원하며 거듭 분명히 밝히자 일본은 더 이상 독도를 불법 침범하지 못했다. 한국 정부의 단호한 대응이 독도에 대한 일본의 야욕을 다시 한 번 꺾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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