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병 돌때 초가집서 '자가격리'..장원급제한 조선 선비 있었다

김준희 2020. 6. 22. 05:0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국립전주박물관 '선비, 역병을 막다' 주제전
휴대용 동의보감 등 조선 선비 자료 전시
박물관 "코로나19 시대 깊은 울림 줄 것"
휴대용 동의보감. [사진 국립전주박물관]

경북 영천시 임고면 선원리에 살던 조선 시대 문인 정중기(1685∼1757)는 역병(전염병)으로 부모 모두를 잃었다. 역병이 확산하자 매곡 지역(현 삼매리)으로 이주해 '간소(艮巢)'라는 서재를 짓고 공부에 몰두했다. 간소는 소박한 초가집이라는 뜻이다.

지금으로 따지면 스스로 자가격리에 들어가 전염병을 피하면서 학문에 매진한 셈이다. 정중기는 결국 43세에 과거에서 장원 급제를 해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정치계를 떠나 매곡으로 돌아와 후학을 양성했다. 출세 대신 새로운 세상을 이끌 싹을 키운 것이다.

국립전주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주제전 '선배, 역병을 막다'. [사진 국립전주박물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전 세계를 휩쓰는 요즘 수백 년 전 '정중기식 거리 두기'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국립전주박물관은 21일 "지난 12일부터 다음 달 31일까지 상설전시실 2층 역사실에서 전염병에 대처하는 조선 시대 선비들의 역사 자료와 기록·유물 등 12점을 모아 전시하는 '선비, 역병을 막다'라는 주제전을 연다"고 밝혔다.

조선 선비 문화를 탐구할 목적으로 기획된 이번 전시에는 조선 후기 학자인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이 저술한 의학서 『마과회통(麻科會通)』에 담긴 가슴 아픈 사연도 소개된다. 국립전주박물관에 따르면 『여유당전서』 『목민심서』를 비롯해 방대한 저술을 남긴 정약용은 슬하에 아들 여섯과 딸 셋을 뒀다. 그러나 천연두와 홍역으로 아들 넷과 딸 둘을 잃어 깊은 슬픔에 빠졌다.

약을 빻는 도구 '약연'. [사진 국립전주박물관]

정약용은 죽은 자식들과 세상의 아이들을 위해 1797년 천연두·홍역 예방법을 다룬 의학서 『마과회통』을 완성했다고 한다. 국립전주박물관 정대영 학예연구사는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정약용이 겪어야 했던 슬픔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라며 "자신의 고난을 사회에 헌신으로 환원시킨 그의 모습에서 진정한 선비 정신을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역병이 창궐하던 시기에 친구의 안부를 묻는 절절한 내용의 편지도 전시된다. 조선의 선비 심진택은 친구 김경로가 역병으로 아우를 잃고 부모님마저 건강이 악화하자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강하게 먹고 몸이 약한 어른을 잘 모셔야 한다"는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내 건강도 그리 좋지는 못해 미안하다"고 털어놓았다.

조선 시대 역병 유행 때 친구의 안부를 묻는 편지. [사진 국립전주박물관]
동의보감. [사진 국립전주박물관]
김정호가 만든 동여도 지도. [사진 국립전주박물관]
본래 25권으로 된 허준의 『동의보감』을 요약해 소매 안에 넣을 수 있는 포켓북 형태로 만든 '휴대용 동의보감'도 눈길을 끈다. 백성들이 잘 걸리는 병과 간단한 처방이 적혀 있어 위급할 때 언제든 꺼내 참고했다고 한다. 배앓이를 할 때 따뜻하게 데워 배에 문질렀다던 '배밀이(도자기 재질 숟가락)', 약재를 갈아 가루로 만드는 기구인 '약연', 약의 무게를 측정하는 데 쓰인 '약저울' 등 조선 시대 의료 기구들도 볼 수 있다.

천진기 국립전주박물관장은 "조선 시대에는 전통 의학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전염병에 대해 어떤 이들은 자포자기하거나 무속의 힘을 빌려 회복을 시도했다"며 "하지만 좌절과 현실 회피가 능사는 아니다. 역병에 맞선 선비들의 현실 극복 의지와 사람 사이의 연대, 따스한 인간애는 코로나19 시대를 살아가는 현재의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전주=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