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 비판 대자보 붙였다고 유죄..2020년판 국가원수모독죄

이가영 2020. 6. 26. 14:23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건조물 침입 혐의로 벌금형을 선고받은 김모(25)씨가 지난해 11월 단국대학교 천안캠퍼스에 붙인 문제의 대자보. [사진 유튜브 캡처]

문재인 대통령을 비판하는 내용의 대자보를 대학교 건물에 부착한 20대에게 유죄 선고가 내려지자 일각에서는 국가원수모독죄 부활이 아니냐는 논란이 일고 있다.

국가원수모독죄란 이름의 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유신정권 때 만들어졌다가 1988년 민주화를 거치면서 폐지된 국가모독죄를 흔히 이렇게 부른다. 당시 해외에 거주하는 한국인이 정권을 비판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제정된 법으로 7년 이하 징역 또는 금고형이 가능했다.

논란은 대전지법 천안지원 형사3단독 홍성욱 판사가 지난 23일 건조물 침입 혐의로 기소된 김모(25)씨에게 벌금 50만원을 선고하면서 시작됐다. 김씨는 지난해 11월 단국대학교 천안캠퍼스에 “나(시진핑)의 충견 문재앙이 한미일 동맹 파기, 공수처를 통과시키고 미군을 철수시켜 중국의 식민지가 될 수 있도록 준비를 마칠 것” 등의 내용이 담긴 대자보를 붙인 혐의를 받는다.

무료로 김씨 측 변호를 맡은 이동찬 변호사는 “2020년 대한민국의 현실이 이렇다”며 “정치적 자유의 기본인 표현의 자유가 이토록 처참하게 짓밟혔다”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처음부터 단국대에서 경찰에 신고한 것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임명 당시 대학생 보수 단체 ‘우파 전대협’이 캠퍼스에 이를 비판하는 대자보를 게시하자 경찰은 수사에 나섰고, 학생처 과장에게 “다음에도 이런 게시물이 부착되면 알려 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학생처 과장이 경찰의 요청에 따라 연락을 한 것이라는 게 이 변호사의 말이다.

반면 홍 판사는 피해자 측의 의사를 유죄의 이유로 설명했다. 홍 판사는 “김씨가 이 학교 직원이나 학생이 아니며 캠퍼스와 건물이 24시간 모든 사람에게 개방된 장소는 아니다”고 봤다. 또 “김씨가 정치적 내용의 대자보를 붙이기 위해 캠퍼스와 건물에 들어오는 것을 알았다면 이를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피해자 측의 의사로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피해자로 지목된 단국대 학생처 과장은 증인으로 출석해 “피해 본 것이 없고, 피해자인 줄도 몰랐다. 표현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서 학생이 재판받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증언했다고 한다. 이 변호사는 “피해자는 단국대가 아니라 대자보를 보고 기분 나빴을 문재인 대통령”이라며 “대학 갓 졸업한 청년을 전과자로 만들면 학생은 공무원도 될 수 없고 취업에도 제약이 있다. 다시는 그런 대자보를 붙이지 말라고 협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정권의 문제가 아닌 권력에 우호적인 사법기관의 문제라는 지적도 있다. 양홍석(법무법인 이공) 변호사는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정부 때도 정권 비판 표현 행위를 건조물침입죄나 경범죄처벌법, 옥외광고물등 관리법으로 처벌하는 일은 얼마든지 있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대법원은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을 풍자하는 전단을 살포한 팝아티스트 이하씨에게 경범죄처벌법 등 혐의로 벌금 200만원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10년에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앞두고 정부가 설치한 홍보물에 쥐 그림을 그려 넣은 대학 강사 박모씨가 공용물건 손상 혐의로 벌금형을 확정받았다.

양 변호사는 “양형이 세지는 않더라도 형사처벌이 이루어진다는 것만으로 일반인에게는 충분히 경고의 메시지가 될 수 있다”며 “대통령이 누구냐, 정부의 기조가 어떠냐의 문제라기보다 권력에 우호적인 사법기관들의 형식적 법 해석이 만들어낸 비극”이라고 말했다.

이가영 기자 lee.gayoung1@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