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명 채워라" 비상..정의당 등 군소 정당의 비애

김홍범 2020. 6. 28.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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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금지법은…(중략)…혐오를 처벌로써 대가를 치르도록 하는 법이 아니라, 모든 시민의 안전과 존엄을 위해 민주주의의 원칙을 세우고, 인권에서 물러설 수 없는 가이드라인을 설정하자는 것입니다.…(중략)…발의부터 좌초되었던 20대 국회의 모습을 반복하며, 차별금지법을 기다리는 국민을 실망시킬 수 없습니다.”

장혜영 정의당 의원이 지난 4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임현동 기자

장혜영 정의당 의원은 25일부터 여ㆍ야 의원들에게 이같은 내용의 친전(親展)을 전달하고 있다. 보좌진이 299명 의원 전원을 찾아갈 예정이라고 한다.


군소정당에 높게만 느껴지는 발의의 벽

장 의원의 친전은 정의당의 1차 목표인 의원 입법안 발의요건 ‘10인의 서명’을 채우기 위한 몸부림이다. 차별금지법은 21대 국회에서 정의당이 내건 최우선 입법과제지만 다른 정당의 도움 없이는 법안을 제출할 수도 없는 게 정의당의 처지다. 텔레그램방 단체방에 법안을 올리면 1분도 안 돼 발의요건을 채우는 민주당 의원들의 여건과는 대비된다.

장혜영 정의당 의원 및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차별금지법 제정연대 회원들이 18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차별금지법 조속 제정 촉구를 위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스1


정의당은 지난 14일 여야의 동참을 호소하는 기자회견도 열었지만 25일까지 의원 10명의 서명을 채우지 못했다. 20대 국회 때도 정의당은 같은 법안을 추진했다가 10명을 채우지 못해 포기했던 기억이 있다.

차별금지법은 합리적 이유 없이 성별ㆍ성정체성ㆍ나이ㆍ외모ㆍ종교ㆍ인종ㆍ혼인 및 출산 여부 등을 이유로 고용, 재화와 용역의 공급 및 이용, 행정서비스 제공 등을 차별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내용이다. 이를 어기는 사람 또는 기관에 대해선 국가인권위원회가 즉각 시정을 명령할 수 있고, 피해자는 징벌적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도 담겨 있다.

최근 미래통합당 초선 의원 9명이 조지 플루이드의 죽음을 애도하며 “모든 차별에 반대한다”고 외치는 등 분위기 변화에 기대를 걸고 있지만 전망은 밝지 않다. 민주당의 핵심당직자는 “아직 진지하게 검토해 보지 않았다”며 “종교계의 거센 반대를 신경쓰는 의원들이 많다”고 말했다.

정의당은 20대 국회 때도 6석이었지만 민주당의 숙원 사업인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 문제와 연동시켜 선거법 개정(준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주요 의제로 끌어 올리는 데 성공했었다. 그러나 21대 국회에선 꿈꾸기 어려운 그림이다. 과반 의석을 달성한 민주당은 더 이상 국회 운영을 위해 정의당의 협조가 필요하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20대 국회 민주당의 마지막 원내대표였던 이인영 의원은 심상정 정의당 대표를 수시로 찾아갔지만 김태년 원내대표가 심 대표나 배진교 정의당 원내대표를 찾아다니는 모습을 보기 어렵다.


발로 뛰기, 눈치 보기 필수, 존재감 사라질까 걱정

1인 의원 정당인 기본소득당의 용혜인 의원은 지난 22일과 23일 2건의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제출했다. 국회의원ㆍ지방자치단체의 장 등에 입후보할 수 있는 피선거 연령을 현행 25세에서 18세로 낮추고, 청년 입후보자에게는 중앙선관위에 내야 하는 선거 기탁금도 기존의 30% 수준으로 내리자는 내용이다. 두 법안에는 각각 10명과 11명의 의원이 서명했다. 용 의원은 “처음 국회에 들어와 10분을 모시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20여 일 동안 친분을 쌓기 위해 다른 당 의원이 개최하는 토론회 등 모임에 참석한 뒤 문자를 남기고, 기회를 잡아 전화하거나 찾아가 법안의 취지를 설명하는 일을 반복했다고 한다.

기본소득당 용혜인 의원이 22일 오후 서울 국회 소통관에 청년국회4법 발의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1인 의원 정당이 겪는 법안의 ‘산통’은 나름의 정책연구소나 원내 행정조직을 갖춘 정의당보다 더 심하다. 국회 입법조사처나 국회사무처 법제과 등 국회내 기구들이 제공하는 입법 지원에 기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용 의원은 “21대 의원 중 국회사무처에 전화를 가장 많이 한 의원이 나일 것”이라고 했다.
“입법노동자가 되겠다”고 했던 시대전환의 조정훈 의원은 지난 18일 ‘플랫폼노동자 경력증명서법’을 1호 법안으로 삼겠다는 기자회견을 했지만 아직 법안을 내지 못했다. 조 의원실 관계자는 “‘플랫폼 노동’ 문제가 관심이 많은 사안이라 10명의 공동발의자를 찾는 것은 가능하지만 입법에 성공하려면 여권의 스텐스를 살필 수밖에 없는 여건”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29일 21대 국회의원 임기가 개시된 이후 지난 24일까지 발의된 법률안은 총 911건이다. 이중 정의당ㆍ열린민주당ㆍ국민의당ㆍ시대전환ㆍ기본소득당 등 군소정당 소속 의원 14명이 발의한 법률안은 모두 13건으로 1인당 1건에 못미친다. 류호정(정의당)ㆍ최연숙(국민의당) 의원 등은 아직 1호 법안을 내지 못했다.

조혜민 정의당 대변인은 “속도로 승부하는 정당이 아니기에 법안 발의가 늦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원내정당으로서의 존재감이 사라질까 걱정하는 당원들이 적지 않다. 정의당의 한 당직자는 “10석이 그래서 중요한 목표였다”며 “발의가 어려우니 상임위 활동에서도 자기 의제를 어필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시대전환 조정훈 의원이 2일 오후 서울 국회 소통관에서 현안 관련 기자회견을 열고 발언하는 모습. 연합뉴스

의원 입법안 발의에 요구되는 정족수는 2003년 20명에서 10명으로 줄었다. 군소 정당 의정활동의 허들을 낮춰야 한다는 주장 때문이었다. 이는 17대 국회 당시 6387건이던 의원 입법 발의 건수가 20대 국회(2만 4994건)까지 가파르게 늘어나게 된 계기가 됐다. 국회 상임위원회 한 수석전문위원은 “군소정당들의 고전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지금 이미 질보다 양으로 승부하는 의원들 때문에 국회 기능이 마비 직전”이라며 “고군분투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홍범 기자 kim.hongbu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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