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단 3점.. 900년 만에 돌아온 '고려 꽃무늬 나전합'

허윤희 기자 입력 2020. 7. 3. 05:02 수정 2020. 7. 3.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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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엔 없던 '귀물 중의 귀물'.. 일본서 환수

"자, 실물을 공개합니다. 하나 둘!"

유물을 덮고 있던 하얀 천을 젖히자 탄성이 터져 나왔다. 길이 10㎝, 무게 50g. 한 뼘도 안 되는 꽃잎 모양의 합(盒·뚜껑이 있는 그릇)에 자개가 촘촘히 박힌 국화 꽃송이가 조명을 받아 반짝거렸다. 2일 오후 서울 국립고궁박물관 강당. 900년 만에 고국에 돌아온 고려시대 국보급 나전칠기합이 언론에 공개된 순간이었다.

◇청자·불화와 함께 고려 미술의 정수

문화재청과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국내에 한 점도 없었던 고려 나전국화넝쿨무늬합〈사진〉(이하 나전합)을 지난해 12월 일본 개인 컬렉터에게서 구입했다"며 이날 실물을 공개했다.

/문화재청

나전칠기는 청자·불화와 더불어 고려 미술의 정수로 꼽히지만, 전 세계를 통틀어 완형은 15점만 남아 있다. 이 중 나전합은 5점. 그중에서도 꽃잎 3개를 붙인 형태는 3점뿐이다.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일본 교토의 사찰 게이슌인(桂春院) 소장품, 그리고 이번에 돌아온 일본 개인 컬렉터 소장품이다.

환수의 주역은 국외소재문화재재단. 김동현 재단 유통조사부장은 "고려 나전 명품의 상당수가 일본에 있는데 대부분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거나 박물관·사찰 소장품이어서 이 작품이 유일하게 매입 가능한 유물이었다"며 "소장자를 끈질기게 설득해 1년간 교섭한 결과"라고 했다. 금속공예 전공인 최응천 재단 이사장은 "2004년 처음 이 작품을 도쿄에서 보고 한국에 꼭 가져오고 싶었는데 이제야 소원을 이뤘다. 밀고 당기는 협상 끝에 작년 12월 성사됐는데 곧바로 코로나가 터졌다. 협상이 더 길어졌다면 몇 년 뒤로 미뤄졌거나 영영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1㎜ 자개 조각 촘촘히 붙인 명품

고려 나전칠기는 당대에 이미 명성을 떨쳤다. 12세기 송나라 사신 서긍이 '고려도경'에 "고려의 나전 기술은 세밀하여 귀하다" "극정교(極精巧)"라고 극찬했을 정도다. 전문가들은 ▲아주 잘게 썬 자개 조각을 조합해 무늬를 엮어 치밀하며 ▲대모(바다거북 등딱지)의 뒷면을 채색한 뒤 기물 표면에 붙여 붉은빛·주황빛·노란빛이 환상적으로 빛나는 기술은 중국·일본에는 없는 고려만의 것이고 ▲무늬에 금속 선을 넣은 고난도 기법을 이유로 꼽는다.

이번에 돌아온 나전합은 국화와 넝쿨무늬가 뚜껑과 몸체를 휘돌고, 뚜껑 테두리는 작은 원들이 연달아 이어지는 연주문(連珠文)으로 촘촘히 장식했다. 종잇장처럼 얇게 갈아낸 1㎜ 미만의 자개 조각을 일일이 붙이는 고된 작업 끝에 탄생한 12세기 명품이다. 뚜껑 가운데의 큰 꽃무늬와 국화의 꽃술에는 은은하게 색감이 스며 나오는 대모복채법을 썼고, 금속선 두 줄을 꼬아 외곽선을 장식했다.

◇왜 국내엔 안 남았나

고려 나전칠기가 국내엔 없고 일본 등에만 극소수 남아 있는 이유는 뭘까. 전문가들은 나전칠기의 재질 특성상 워낙 약해서 깨지고 부서지기 쉬운 데다 온·습도에 취약해 보존이 어렵다고 말한다. 재단은 "대모, 야광조개 등 최고 고가의 수입품을 사용해 극소수 제작했기 때문에 고려 때에도 매우 귀했다"고 했다.

고려 나전칠기는 당시 외국 왕실에 보내는 '호화 선물'로 인기가 좋았다. 현재 남아 있는 고려 나전칠기는 대부분 오래 전부터 일본 사찰에서 소장해오던 것들이다.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는 "당시 일본 사찰이 적극적으로 고려에서 수입해갔고 '귀물 중의 귀물'로 소중히 간직해왔다"며 "국내에선 사라진 나전칠기가 일본 사찰을 통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는 게 역설"이라고 했다.

이로써 한국은 온전한 형태의 고려 나전칠기 유물을 3점 보유하게 됐다. 이번에 돌아온 나전합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다. 박물관은 올해 하반기 특별전 '고대의 빛깔, 옻칠'에서 이 유물을 전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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