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가 장악..'조형물 공해' 개선 3년 서울은 어찌 바뀌었나
대한민국은 ‘조형물 공화국’이다. ‘조형물 피로증’ 을 호소할 정도로 거리에 조각물이 넘쳐난다. 정부가 일정 규모 이상 신축 건물에 조각 등 미술품을 설치하도록 의무화한 때문이다. 거대한 조형물 시장이 형성되며 판박이 조각, 특정 작가들로의 쏠림, 리베이트 비리 등 부작용이 생겨났다. 급기야 서울시가 먼저 나서 2017년 가을 제도개선책을 마련한 지 3년 가까이 흘렀다. 국민일보는 그간의 제도 개선 효과와 제도적 미비점 등을 진단하는 기획물을 2회에 걸쳐 싣는다. <편집자 주>
심승욱(48) 조각가는 2018년 1월 기획사로부터 상상도 못 했던 제안을 받았다. 서울 마포구 홍익대 인근 AK몰에 설치할 공공 조형물로 그의 작품을 제안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영국의 사치갤러리가 아시아 현대미술작가에게 수여하는 ‘사치 & 푸르덴셜 아이 어워즈’ 조각 부문 대상을 받은 그였지만 미술관에서만 전시를 해왔던 터였다. 그는 지난 2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공공 조형물은 ‘그들만의 리그’인 줄 알았는데, 제게도 이런 행운이 오다니…. 변화를 실감했다”고 말했다.
제도 바꿔놓고 보니 비엔날레 성향 작품도 거리로
서울시가 2017년 11월 ‘건축물 미술작품’ 조례를 개정한 뒤 거리의 예술 풍경이 바뀌고 있다. 시는 ‘미술작품 심의위원회’ 구성방식을 기존의 80명 풀제(임기 2년 1회 연임)에서 20명 고정 위원제(임기 1년, 3회 연임)로 바꿨다. 심의위원의 책임성을 강화해 예술품의 수준을 높이겠다는 취지였다. 심의위원 ㄱ씨는 “풀제는 15명만 참석하면 돼 심의위원과 작가가 결탁할 수 있는 구조였다. 출품자들이 지인을 찾아 ‘이번에 신청할 테니 당신이 심사에 들어가 통과시키는 데 힘 좀 써주시게”라며 부탁하는 등 도덕적 해이가 있었다”고 전했다. 바뀐 조례에서는 심의 시점도 ‘건축물 사용 승인 전’에서 ‘건축물 허가 시’로 앞당겼다. 작품의 사전 제작 기간을 충분히 갖도록 한 것이다.
제도가 바뀌며 심사가 깐깐해졌다. 자연스레 신청 건수에 대한 승인율이 낮아졌다. 서울시에 따르면 승인율은 2015∼2016년 80%가 넘었으나 제도 개선이 이뤄진 2017년 65%로 낮아지더니 2018년 44%, 2019년 40%로 뚝 떨어졌다. 심의위원 ㄴ씨는 “창의력이 없고 표절 의혹이 있거나 자기 복제가 심한 경우도 배제했다”고 말했다.
승인율은 낮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신규 진입자는 늘었다. 1년에 1개 작품 승인받는 작가의 비중은 2016년, 2017년 각각 76%, 77%였으나 2018, 2019년 각각 84%, 83%로 높아졌다. 말하자면 독과점 구조가 약화하며 참여 작가의 저변이 확대된 것이다.
그 결과 신축 건물에 들어서는 조형물의 표정이 다양해진 것으로 평가된다. 2018년 여름 설치된 심씨의 ‘검은 중력’의 경우 조각이 주는 무게감을 시각화한 것이라 다소 낯설다. 미술평론가 이상윤씨는 “늘 보던 거리 조각과는 좀 다르다.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이 뭔지 질문을 던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2018년 서울 금천구 시흥대로의 한 신축 아파트에 조형물을 세운 설치미술 작가 김승영씨, 김송필씨는 미술계에서는 인정받는 중견 작가다. 하지만 건축물 미술작품 시장에선 신인이다. 시장의 독과점 구조에 균열이 난 덕분에 그들에게 참여 기회가 열렸다. 김승영 작가의 작품은 둥근 벽체를 짓고 그 안에 정원을 조성한 것이다. 이처럼 새로운 작가들이 얼굴을 내밀면서 대중적 취향의 판박이 작품만이 아니라 미술관·비엔날레 등에서 볼 수 있던 신선한 작품들도 나오고 있다.
과거엔 한해 한 작가 작품이 전국 22군데 설치되기도
건축물 미술작품 시장은 연간 500억원대 규모로 추정된다. 미술 시장의 위축과 상관없이 부동산 시장 활황을 타고 성장했다. 시장이 포화한 서울보다는 건축물 신축 여지가 많은 경기도의 시장이 더 커가는 추세다.
건축주와 미술작품 제작 대행업체 간의 가격 담합, 이중 계약, 리베이트 등 부조리가 생겨나 사회문제화될 정도였다. 특정 작가군으로의 쏠림도 큰 문제였다. 서울시만 해도 <표>에서 보듯 A작가, B작가, C작가, D작가, E작가 등 5∼6명의 작가가 장악하다시피 했다. 건축주 입맛에 맞는 대중 취향의 작품을 하는 작가, 로비에 탁월한 작가들이 아무래도 이 시장에서 수혜를 입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다 보니 “예술작품이 공장 제품처럼 찍어낼 수 있는 것이냐” “붕어빵” “대한민국 거리가 몇몇 작가 작품 전시장이냐”는 비판이 나올 정도였다.
<표>에서 1위인 A작가의 경우 ‘공공미술포털’에 따르면 2019년에는 전북 남원, 강원도 원주, 부산, 제주시 등 전국 8군데, 2018년에는 전국 14군데 설치했다. 2019년엔 서울에서 한 점도 설치 실적이 없다. 전국 단위로는 여전히 ‘인기 작가’였다. 그는 2017년엔 전국 22군데에 작품을 설치했다. 2017년의 경우 한달에 두 작품 가까이 설치한 셈이 된다. 11월엔 경기 군포, 시흥, 광명 등 세곳에 그의 작품이 설치됐다. A작가와 B작가는 부부 사이다. A작가는 서울시 심의에 대해 “자기와는 좀 맞지 않아도 부족한 부분 함께 채워서 가는게 심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건축물 미술작품은 전문 기획사에서 입찰 작업을 대행하고 일정 비율의 커미션을 받는 구조다. 하지만 물량이 넘쳐 기획사를 직접 운영한 작가도 있었다. 일부 기획사들은 건축물 준공에 임박해 심의 서류를 제출해 ‘막판 효과’를 노리는 경우도 많았다.
결국, 전국 거리가 몇몇 작가의 판박이 작품, 혹은 급조된 수준 미달의 식상한 조각물로 채워지는 등 역효과가 나면서 이 제도를 없애자는 주장까지 나왔다. 서울시가 제도 개선에 나선 것은 이런 비판을 의식해서다. 경기도가 2019년 6월부터 제도를 다소 개선했고 인천시도 비슷한 제도 도입을 추진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건축물 미술작품’ 제도란 : 문화예술진흥법 제9조에 따라 총면적 1만㎡ 이상 건축물에 대해 건축비의 0.7%를 미술 작품 설치에 쓰도록 의무화 하고 있다. 2011년부턴 미술작품을 설치하지 않으면 설치 금액의 70%를 문화예술진흥기금으로 출연할 수 있도록 했다.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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