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찬호 논설위원이 간다] 김태년 "176석, 당신들 도움 필요없다"..협상이 아니었다

강찬호 2020. 7. 9.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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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은 숫자로 압박, 한치 안 물러나
의장도 '코로나 비상시국' 만 반복
"노무현재단 타깃 안돼" 국조 거부
대통령 "국회 경력 짧아 국회 몰라"


상처뿐인 21대 국회 개원…통합당 주호영 원내대표가 전한 막전막후

지난달 28일 주호영 미래통합당 원내대표(오른쪽)가 박병석 국회의장(가운데)을 사이에 두고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와 국회 청사 의장실에서 원 구성관련 회동을 하고 있다. 두 원내대표의 표정이 밝지 않아 보인다. [뉴시스]

역대 제1야당 원내대표 가운데 이렇게 혹독하게 당한 사람은 없었다. 야당의 전유물이던 법사위원장을 포함해 18개 상임위원장 전부를 여당에 빼앗기고, 3차 추경에마저 아무 힘을 쓰지 못했다. 취임 두 달을 맞은 주호영 미래통합당 원내대표를 만나 야당의 무덤이 된 21대 국회 원 구성 협상전을 재구성했다.

숫자로 밀어붙인 민주당의 ‘무한 독주’

“김태년은 초장부터 숫자론을 폈다. ‘국회는 151석, 169석, 200석이 의미가 있다. 151석은 과반, 200석은 개헌선이고 169석은 18개 상임위원장을 장악할 수 있는 매직넘버다. 우리(민주당)가 169석이 넘었으니 당신들 도움이 필요 없다’고 하더라. 그래서 2008년 18대 국회 원 구성 때는 왜 81석에 불과했던 민주당이 법사위를 포함한 상임위원장 여러 개 가져갔느냐고 따지니 그땐 여당(한나라당)이 151석만 넘긴 수준이었으니 민주당에 법사위원장을 줬던 것 아니냐고 둘러대더라.”

사찰 잠행 9일 만에 들이닥친 김태년

“지난달 15일 민주당이 법사위 등 6개 상임위원장 선출을 단독 강행하자 난 전국 산사를 돌며 칩거했다. 8일째인 지난달 23일 고성 화암사에서 아침 먹고 설악산 주전골을 오른 뒤 오후 4시쯤 절에 돌아왔는데 김태년이 약 20분 전부터 와 있는 거야. (왔는데 만나주는 게) 잘못이 아니니 만났다. 인근 카페에서 소주 한 병 먹는데 모 언론사 속초 주재 기자가 카메라를 들고 와 있더라.기자가 ‘다정하게 어깨동무 좀 하시라’고 주문해 포즈는 잡았지만, 마음은 전혀 아니었다. ‘이러면 오보 나는데?’라고도 했다. 김태년은 ‘코로나에다 대북 전단 사태 등 상황이 위중하니 국회로 돌아가자’고만 하더라. 아무 변화가 없는데 뭘 가나. 12년 전 18대 국회에서 내가 여당 원내수석부대표 맡았을 때 민주당 파트너가 서갑원 의원이었는데 날 도무지 만나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그 전략을 쓴 거다.”

섭섭했던 박병석 국회의장

“말로는 우리 편을 든다면서도 늘 여당 쪽으로 기우는 게 눈에 보였다. 국회의장은 중립을 지키기 위해 당적이 없는데도 박병석 의장은 민주당을 늘 ‘우리 당’이라고 부르더라. 여당 편을 들면서 ‘과거와 지금은 다르다. 코로나로 인한 비상 상황’이란 말만 반복하더라. 그래도 내가 버티니까 ‘상임위 7개라도 안 가져가면 18개 여당에 다 준다’고 협박하더라. ‘그래, 다 줘라’ 하니까 ‘상임위원 배정표를 달라’고 하더라. 탁자를 엎어버리고 싶었다. 6개 상임위에 우리 당 의원들을 이미 강제배정해놓고, 이미지에 기스(흠집) 안 나게 하려고 쇼하는 것 아닌가. ‘못 준다’고 하니까 ‘그러면 배정을 강행하고, 통합당이 사보임을 신청해도 9월까지 결재해주지 않겠다’라고까지 하더라. 화가 났지만 참았다.”

“한명숙, 차 세우고 돈 받을 위인 못 된다”

“법사위 말고도 협상 테이블엔 옵션이 오갔다. 국정조사 요구였다. 윤미향 의원·정의기억연대(정의연) 의혹과 존 볼턴 회고록으로 촉발된 대북정책 논란을 국정조사하자고 요구했다. 그러자 박병석 의장이 ‘두 개 다 받아주겠다’고 중재에 나서더라. 박병석은 민주당을 ‘우리 당’이라 하는 사람이니 민주당과 미리 협의가 된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다음날 ‘미안하다, 못 해준다’고 하더라. 청와대에서 난리 쳐서 그랬겠지. 협상 도중 김태년과 도시락 먹는 자리에서 내가 ‘한명숙 진짜 무죄냐?’고 물었다. 김태년은 ‘무죄’라면서 ‘한명숙은 길에 차 세워두고 거금을 받을 위인이 못 된다’ 하더라. 내가 ‘1억원 수표가 동생 전세금으로 쓰였잖아’ 하니 ‘그게 무죄의 증거다. 누가 수표로 돈 받나’ 하더라. 내가 그걸 잡아채서 ‘그럼 국정 조사를 하자. 장관 2번에 총리까지 지낸 사람이 받지도 않은 돈 때문에 징역을 살았다면 국정조사로 억울함을 풀어주겠다’고 했다. 그러자 김태년은 노무현이 ‘나로 인해 주변 사람이 고통을 너무 많이 받는다’고 했던 걸 거론하며 ‘국정조사를 하면 한명숙 주변 사람들이 줄줄이 불려 나와 고통을 받게 되니 안 된다’고 도망가더라. 또 김태년한테 ‘윤미향 의혹’을 국정조사하자고 하니 ‘동료 의원 아니냐’며 피하길래 한·일 위안부 합의 전반을 조사하자고 제안하면서 ‘이참에 이 정권 들어 좌파 단체만 보조금 늘고 우파 단체는 줄어든 이유를 조사하자’고 치고 나갔다. 그러자 김태년이 ‘시민단체가 수천개인데 어떻게 하느냐’고 하더라. ‘범위를 한정해 하면 되지’ 하니까 ‘노무현재단이 타깃 아니냐’며 거부하더라.”

‘가합의’ 논란

지난달 28일 국회의장실은 주호영·김태년이 상임위 11 대 7 배분과 후반기 법사위원장을 집권당이 갖는 안, 위안부 의혹 국정조사와 한명숙 청문회 등 8개 안에 ‘서명 없는 (가)합의’가 됐다고 흘렸다. 그러나 곧 ‘없던 일’이 됐다.

“그날 의장실에서 나를 만난 김태년이 문제의 가합의안에 서로 서명해서 원 구성을 마치자고 요구했다. 의장실 측에서도 가합의안을 타자로 작성하고, 나와 김태년 서명란까지 넣어 갖고 왔더라. 난 ‘이거론 안 된다’고 거부했다. 그랬는데도 그쪽(의장실)에선 ‘상당한 의견접근이 있었다’고 발표해버렸다. 장난친 거지. 내가 가합의안을 들고 당에 돌아와 의견을 들으니까 ‘상임위 몇 개에다 이치부터 안 맞는 법사위원장 분할안만으로는 절대 안 된다’가 대세였다. 그런데도 민주당은 될 것처럼 몰아갔다. 그래서 내가 이튿날 아침 8시쯤 ‘당 분위기 때문에 안 될 것 같다’는 문자를 김태년에 보냈는데 안 보더라. 나중에 김태년이 ‘그때 문자 폭탄이 날아오고 있어 못 봤다’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김성원 원내수석부대표를 시켜서 보게 했지. 그랬더니 ‘협상 파기를 문자로 알려왔다’고 하더라.”

문 대통령과의 5·28 청와대 오찬 회동

“난 준비를 많이 해갔지만 문 대통령은 내게 ‘나는 국회 경력이 짧아 국회를 잘 모른다’며 상견례나 하자는 마음으로 만나자고 하더라. 그래도 나는 제1야당 대표니까 할 말은 해야 되겠다고 생각해 50분 가까이 얘기했다. 대통령이 답변하다가, 탈원전이 나오니까 노영민 비서실장에게 답변을 맡기더라. 나는 ‘탈원전 문제는 내 고향(울진)에서 심각해 잘 안다. 탈원전 때문에 피해 보는 사람도 많고 수출도 잘 안 된다’고 비판했다. 그런데 문 대통령은 나름 공부를 해둔 모양이더라. ‘전력 예비율이 30%가 넘고 전력 수요도 최고치에 도달해 원전이 더는 필요 없다’ 고 하더라. 이어 난 정부의 대북정책도 비판했다. ‘북한에 너무 저자세다. 국민이 안보를 걱정한다’고 하니까 ‘재래식 전력은 우리가 압도적이니 안보 걱정할 필요 없다’고 하더라. 내가 ‘박근혜 정부 때 한국·일본이 국가 차원에서 맺은 위안부 합의를 무효로 하고, 3년째 손을 놓고 있다’고 비판하니 문 대통령은 ‘우리가 무효로 한 건 아니다’고 하더라. 내가 ‘사실상 무효로 한 것 아니냐’고 하니 ‘아베가 공식 사과하기로 했는데 안 했고, 할머니들이랑 소통하기로 한 것도 안 됐다’고 하더라. 내가 ‘그건 윤미향이 가로막은 거 아니냐’고 반박하니 대답을 안 하더라. 내가 아픈 곳을 찔렀지.”

■ 입력된 스님 전화번호 1459개…“청와대 시주함에 돈 봉투 꽉 찬 듯”

「 ‘유발승’(머리 안 깎은 승려)이란 별명이 붙을 만큼 독실한 불교 신자인 주호영의 휴대전화엔 스님 1459명의 번호가 입력돼있다. 지난달 열흘간 잠행 중 잠잔 곳도 죄다 사찰(10곳)이다. 김태년 원내대표와 민주당이 자신을 쫓고 있다는 소식에 사찰 한 곳당 하룻밤만 머물고 옮겨 다니는 전략을 썼다. 그래서 이동 거리가 1500㎞가 넘는다.

민주당에 처음 꼬리가 밟힌 곳은 잠행 5일째 찾은 울진 불영사였다. 민주당 김영진 원내수석부대표가 차를 몰고 들이닥쳤으나 주호영은 몇 시간 전 불영사를 떠나 조우를 피했다. 결국 잠행 8일째인 지난달 23일 고성 화암사에 머물고 있던 주호영 앞에 김태년이 나타나 5시간 만남이 성사됐다. 주호영은 “김태년이 내게 ‘경찰 정보국과 조계종에 끊임없이 (당신의) 소재를 찾아달라고 했는데 잘 안 찾기더라’고 했다. 그 얘기 듣고 (날 사찰한 거냐고 항의할) 생각도 했지만, 문제 삼고 싶지는 않아 그만뒀다”고 했다.

청와대도 5월 28일 주호영을 초청하며 그의 ‘불심’을 배려했다. 강기정 정무수석이 미리 “청와대 오시면 경내에 있는 불상을 보시게 될 것”이라고 귀띔해줬다. 문 대통령은 청와대 경내를 거쳐 불상이 있는 곳으로 주호영을 안내하고 설명도 했다.

주호영은 불상에 합장한 뒤 문 대통령·김태년 원내대표 몫까지 합쳐 불상 앞 불전함에 시주했다. “시줏돈 봉투를 넣는데 다 안 들어가 봉투 끝부분이 불전함 구멍 위로 드러나더라. 함 안에 봉투가 꽉 찬 듯했다.”

강찬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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