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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라시압 궁전벽화의 고구려인 (3)

임기환 입력 2020. 07. 09.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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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 명장면-100] 아프라시아브 궁전 접견실 벽화의 고구려인은 왜 그곳에 등장했으며, 어떤 역사적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의당 궁금한 질문이지만, 답은 의외로 간단치 않음을 전회에서 살펴보았다. 이번 회에서는 그들이 그려져 있는 접견실 벽화를 통해서 실체에 다가가 보자.

접견실 벽화 중 가장 중심적인 서벽의 그림은 여러 나라에서 보낸 사절들이 소그드 왕국 바르후만(Varkhuman) 왕을 알현하고 예물을 바치고 있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이는 전회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벽화 속 한 인물의 소매자락에 쓰인 명문을 통해 알 수 있다.

서쪽 벽화의 복원도

정면 중앙 맨 위에 바르후만 왕이 자리 잡고 있고, 그 아래 중앙에는 예물을 바치기 위해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대열이 있다. 그 좌우로 앉아 있거나 서 있는 인물 그룹들이 상단에 배치돼 있다. 이들은 돌궐인이다. 앞뒤 2줄로 나란히 앉아서 서로 대화하고 있는 인물들 그룹은 마치 바르후만 왕의 측근에서 보좌하는 신료들 같은 인상을 준다. 예물을 왕에게 바치기 위해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중앙과 하단의 인물 대열과는 뚜렷하게 구분된다. 소그드왕국이 서돌궐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던 사정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짐작된다.

하단에는 여러 사절들 모습이 보인다. 먼저 왼쪽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 사절은 명문 내용의 주인공인 차가니안(Chaganian) 사절, 그다음이 명문 내용 후반에 등장하는 차치 사절이다. 가운데에는 누에고치와 비단 등 예물을 갖고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당나라 사절 3인이 보인다. 그 오른쪽에 보이는 인물들은 티베트와 같은 산간지역에서 온 사절들로 추정된다. 가장 오른쪽 2인이 잘 알다시피 바로 고구려인이다.

이와 같이 서쪽 벽화에는 돌궐인들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화면 좌우에 돌궐인들이 사용하는 것으로 보이는 방패와 깃대 같은 것들이 세워져 있는 모습도 그러한 면을 드러낸다. 그러나 북쪽 벽화의 내용은 이와는 전혀 다르게 당의 영향력이 가득하다.

북쪽 벽화의 복원도

북쪽 벽화에서 왼쪽에 그려져 있는 배 위에는 당의 황후로 추정되는 여성을 중심으로 10여 명의 시녀와 사공이 타고 있다. 오른쪽 뭍에는 여러 기마인물들이 창과 활로 맹수를 수렵하는 장면들이 그려져 있는데, 그 묘사가 꽤나 역동적이다. 그중 가장 크게 그려져 있는 인물을 당나라 황제로 추정하고 있다. 즉 북벽에는 당나라 황제와 황후가 그려진 것으로 추정하는데, 왜 북벽에 이런 주제가 그려져 있는지는 아직 불분명하다.

다만 '당서' 서역전에는 당 고종(高宗)이 강국(康國·소그디아나)을 강거도독부로 삼고 그 왕인 불호만(拂呼縵)을 강거도독(康居都督)으로 책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불호만이 바로 이 접견실 벽화의 주인공인 바르후만 왕이다. 북쪽 벽화에 당나라 황제와 황후가 그려진 배경은 이러한 정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듯 아프라시아브 궁전의 접견실에는 당과 서돌궐이 모두 그 자취를 뚜렷하게 남기고 있다. 즉 바르후만 왕이 사신을 맞는 장면이 그려져 있는 서쪽 벽화에는 돌궐의 영향력이 넘치고, 북쪽 벽화에는 당나라 황제와 황후가 그려지는 등 당의 영향력이 가득하다.

그런데 서돌궐과 당은 적대적인 관계였는데, 어떻게 이 두 세력이 함께 등장하고 있을까? 그런 점에서 소그드왕국와 서돌궐 및 당의 관례를 잠시 살펴보자. 서돌궐은 651년부터 반당적 태도를 취하면서 세력을 떨치고 소그드왕국을 비롯한 실크로드 여러 국가들에 종주권을 행사했다. 그러나 657년 11월에 당과 회흘(위구르), 철륵(정령) 등 연합군의 공격으로 멸망했다.

당은 한 달 뒤인 12월에 서돌궐 지역에 곤릉도호부(崑陵都護府)와 몽지도호부(濛池都護府) 2도호부를 설치하여 기미지배를 실시하고, 이듬해 658년에는 그 서쪽의 소그드왕국을 포함해 그디아나, 페르가나, 토하라 지역도 당의 기미지배 체제로 편입했다. 이들 기미부주를 658년 5월에 서주(고창·高昌)에서 그 서쪽에 있는 쿠차(Kucha·龜玆)로 옮긴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에 소속시켰다. 이렇게 658년 이후에는 소그드왕국을 포함하는 서역 일대에 대한 종주권이 서돌궐에서 당으로 넘어갔다. 당의 황제 등이 주인공으로 그려져 있는 북쪽 벽화의 장면은 아마도 658년 이후 시기의 산물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돌궐계 인물들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당의 사신들이 바르후만 왕을 알현하기 위해 기다리는 서쪽 벽화에서 보이는 장면이 실제를 재현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651~657년 사이에 가능한 상황이었다. 고구려인이 아프라시아브 궁전에 나타날 수 있었다면 그 시기 역시 이 기간에 한정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당시 적대적 관계에 있는 고구려와 당의 사절이 나란히 서 있다거나, 또는 벽화 중에 상상적이고 관념적인 내용을 포함하는 내용이 적지 않기 때문에 이 벽화의 내용을 사실을 묘사한 장면으로 볼 수 없다는 입장에서 고구려인의 모습 또한 실제 방문한 인물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고구려인에 대한 이미지 혹은 도상(圖像)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그리고 이 도상의 출처는 당으로 본다.

장회태자 무덤 예빈도 /사진=바이두

물론 당에서도 실제 고구려 사절 등을 그린 그림들이 그려지고 전해지고 있었다. 유명한 직공도의 고구려인 그림이 그러하며, 장회태자(章怀太子) 무덤 벽화에 보이는 조우관을 쓴 인물의 경우에도 실제 고구려 사신을 그렸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돈황의 벽화 등 불교와 관련된 변상도나 사리분배도에서 조우관을 쓴 인물들 사례가 여럿인데, 이들은 실제 고구려인을 모델로 그려졌다기보다는 고구려인 이미지, 즉 도상에 따라 그려진 것임은 어느 정도 분명하다. 이런 그림들의 예와 유사하게 당의 장안(長安)이나 돈황(燉煌)에서 고구려인에 대한 도상이 소그드왕국에 전해지고, 현지에서 그 모본에 따라 그린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다.

하지만 아프라시아브 궁전 벽화의 고구려인은 고리칼을 차고 있는 무인 상인데, 이런 이미지는 중원 지역 고구려 인물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이 점은 아프라시아브 궁전 벽화의 고구려인이 도상에서 재현된 이미지라고 하더라고, 그 도상의 모본이 적어도 중원 지역은 아니라는 증거가 된다.

더욱 벽화를 보면 고구려인들이 매우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어 과연 단순히 도상을 보고 그렸을까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고구려 사신이 도상과 이미지라고 한다면 그 벽화의 다른 나라 사신들도 실제 사신이 아니라 이미지라고 보아야 할까? 하지만 적어도 명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왼쪽 편에 그려져 있는 사신들이나 당나라 사신들은 실재로 소그드 왕을 방문한 사신들을 묘사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면 어디까지가 실제의 재현이고, 어디까지가 관념적인 내용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전회부터 장황하게 당시 정세부터 벽화 구성까지 여러 측면을 검토하였지만, 현재까지 자료만으로는 고구려 사절이 실제 방문했는지를 확정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다만 필자의 개인적인 견해로는 고구려 사절이 소그드왕국에 갔을 가능성에 좀 더 무게를 두고 싶다.

그렇다고 당시 고구려가 소그드왕국과 어떤 외교적인 연결을 꾀하였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일단 소그드왕국 자체가 어떤 독자적인 외교활동이나 군사활동으로 반당적인 태도를 취하였다는 근거가 없고, 그럴 성향도 찾기 어렵다고 본다. 그렇다면 고구려 입장에서도 굳이 소그드왕국과 교섭할 이유가 하등 없다.

645년 당태종의 침공 때에 설연타와 손잡으려는 시도를 했던 고구려는 비록 당시는 아무런 성과가 없었지만, 그 뒤에도 계속 당의 서쪽 정세에 관심을 두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설연타가 멸망하고 그 뒤를 이어 반당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서돌궐이 출현하자, 고구려는 서돌궐과 연결을 꾀하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럼 왜 고구려 사신이 난데없이 서돌궐보다도 더 먼 소그드왕국에 출현하게 된 것일까?

만약 고구려가 외교 사신을 멀리 서쪽으로 보냈다면 그 목적지는 서돌궐이었을 것이다. 당시 서역 일대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던 서돌궐은 동방의 먼 지역에서 고구려 사신이 방문하자, 이를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한 방식으로 활용하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645년 당태종의 고구려 원정 실패는 당시 당 주변 세계에 널리 알려졌을 것이다. 그들은 동돌궐이 굴복하고, 고창, 토욕혼, 철륵, 설연타 등등이 줄줄이 당에 무릎을 꿇거나 복속되어 나라가 흔적도 없어 사라져가는 장면을 보았다. 게다가 고구려에서는 패퇴한 당태종의 군대가 곧바로 설연타를 패망시키는 걸 목도했다. 그런 당나라의 어마어마한 군사력과 당태종의 위세를 단박에 꺾어버린 대사건의 주인공이 고구려였다. 아마 645년 이후 고구려의 명성은 서역 일대에도 자자했을 것이다.

서돌궐의 사발략가한(沙鉢略可汗)은 당태종 군대를 물리친 위업을 달성한 고구려가 자신에 사신을 보냈다는 사실 자체가 주변에 자신의 위세를 보여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고구려 사신을 자신의 세력권 내에 있는 주변 나라들에 데리고 가서 과시하려고 했고, 그 결과 아프라시아브 궁전에도 고구려 사신이 등장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이는 상상적 추론에 가깝다는 점을 밝혀둔다.

이제 그동안 놓치고 있는, 어쩌면 가장 중요할 수도 있는 점을 짚어보아야겠다. 고구려 사신이 서돌궐이나 소그드왕국까지 실제로 갔는지, 아니면 도상을 따라 그린 것인지를 따지는 '사실' 자체도 중요하다. 아울러 그런 '사실'과 관계없이 아프라시아브 궁전 벽화에 고구려 사신을 그리게 하는 '관념'이 무엇인지도 결코 지나쳐서는 안되는 중요한 논점이다.

서쪽 벽화 하단 각국 사절들의 배치는 소그드왕국의 지리적 세계관을 반영한 결과임은 분명하다. 벽화에서 고구려인은 오른쪽 가장 끝에 자리하고 있다. 이는 소그드왕국에서 볼 때 고구려가 가장 먼 동방 끝세계에 있는 나라라는 점을 의식하고 있는 구성으로 보인다. 그럼 이런 지리적 세계관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

돌궐 퀼 테긴 비 /사진=바이두

몽골의 오르콘 강가에서 732년에 제작된 돌궐의 퀼테긴(Kultegin·闕特勤)비가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뷔클리, 즉 고구려에 대한 언급이 있다.

"(그들의 장례식에) 문상객(으로서) 동쪽 해 뜨는 곳 뷔클리(필자 주: 고구려) … 타브카즈(중국), 티베트, 아바르, 푸롬(비잔틴) … 거란, 타타브[奚] 이렇게 많은 백성이 와서 애도하였다." <퀼테긴 비문>

위 비문의 내용은 퀼테긴의 조상에 대한 것으로서 그 시점은 8세기 초반 이전인데, 여기에서 동쪽의 가장 멀리 있는 해가 뜨는 곳의 나라로 고구려를 인식하고 있다. 돌궐은 초원 세계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직후 6세기 중엽부터 고구려와 충돌·교섭의 관계를 맺어왔다. 돌궐인들은 고구려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프라시아브 궁전 벽화에 등장하는 돌궐인들이 고구려인이 그곳 벽화에 그려지게 되는 매개적 역할을 하였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고구려가 동쪽 끝에 있다는 지리적 조건만으로 세계관이 구성되지는 않는다. 이 궁전 벽화는 바르후만 왕의 치세를 과시하고 자랑하기 위해 그려졌다. 그 영광을 빛내기 위해 무엇보다 동방의 고구려인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들이 실제로 오지 않았음에도 그려졌다면, 소그드인이나 돌궐인들의 세계관과 관념 속에 고구려라는 존재가 더욱 뚜렷한 모습으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645년 당태종을 패퇴시킨 사건은 아마도 당시 유라시아 전체를 떠들썩하게 했던 요새식으로 말하자면 세계적 빅뉴스였을 것이다. 서역 땅 사마르칸트에도 그 뉴스가 널리 퍼져갔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가 바로 아프라시아브 궁전 벽화의 고구려 사신도다. 고구려 사신이 갔느냐 여부 못지않게 소그드인들의 관념 속에 그 멀고도 먼 곳의 고구려가 어떻게 뚜렷하게 각인될 수 있는지를 물을 때이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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