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장 12년 그들만의 '소왕국'..'나홀로 집무실'이 위험하다

신진호 입력 2020. 7. 11. 05:01 수정 2020. 7. 11.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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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정·오거돈 이어 박원순 서울시장까지 연루
인사·예산 독점 '제왕적 지위' 공무원 충성경쟁
중앙정부·의회 견제 받지 않는무소불위의 권력
전문가 "범죄 저지르면 절대 돌아오지 못하게"
안희정 전 충남지사(왼쪽), 오거돈 전 부산시장(가운데)에 이어 박원순 서울시장이 미투 논란에 휩싸였다. 연합뉴스·뉴스1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로 사퇴했다. 피해자 부산시민, 국민께 깊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
지난 4월 28일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여성 공무원 성추행 의혹에 연루돼 낙마한 오거돈 전 부산시장의 제명을 결정한 뒤 내놓은 입장이었다. 이 대표는 “민주당은 선출직 공무원과 당직자에 대한 성인지 교육을 체계화하고 의무화하는 제도를 정비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10일 오전 서울시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될 예정인 故 박원순 서울시장 빈소 앞에서 취재진들이 모여 있다. 뉴스1


이 대표의 대국민 사과 발표 이후 70여일 만에 여당 소속 자치단체장의 성(性)추문이 다시 불거졌다. 2018년 3월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올해 4월 오거돈 전 시장에 이어 이번에는 박원순 서울시장이다. 박 시장은 지난 8일 전 비서로부터 ‘지속해서 성추행을 당했다’며 경찰에 고소됐다. 이 사건은 박 시장이 숨진 채 발견됨에 따라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처리될 전망이다.

자치단체장의 대표적 성추문은 ‘미투 운동’ 촉발의 계기가 된 2018년 3월 안희정 전 지사 사건이다. 안 전 지사는 2017년 7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여비서(김지은씨)를 성폭행·성추행한 혐의로 기소돼 대법원에서 징역 3년 6개월의 확정판결을 받고 광주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다. 최근 모친상을 당해 형집행정지로 일시 석방됐다가 9일 오후 재수감됐다. 오 전 시장은 지난 4월 여직원 성추행 의혹에 연루돼 사퇴한 뒤 불구속 상태에서 수사를 받고 있다.

자치단체장의 성추문이 발생할 때마다 여기저기서 각종 대책이 쏟아지곤 했다. 하지만 인권 변호사이자 시민운동가 출신의 박 시장까지 성추문에 연루돼 생을 마감하면서 ‘견제받지 않는’ 단체장 권력에 대한 견제·감시론이 더욱 커지고 있다.

지난 4월 27일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전국 17개 시·도의 광역단체장은 물론 시·군·구 기초단체장들은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다. 고유의 인사권에다 한 번 당선되면 4년 임기가 보장되고, 현직 프리미엄으로 재선·3선에 성공하는 경우도 많다. 잘만 하면 임기 12년 간 롱런할 수 있는 셈이다. 공무원들의 충성경쟁이 이어지기 쉬운 구조다. 바른 소리를 했다가 눈 밖에 나면 최소 4년, 길게는 12년간 승진에서 누락되거나 한직을 전전해야 한다.

최호택 배재대 행정학과 교수는 “우리나라는 자치단체장이 인사와 예산 등 절대적 권력을 가진 구조”라며 “중앙정부, 국회의 통제가 잘 미치지 않는 데다 한 번 선출하면 바꾸기 어렵다는 점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게 만드는 이유”라고 말했다.

지방의 소(小)왕국에서 제왕적 권력을 누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성인지 감수성도 낮아진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안 전 지사에 이어 오 전 시장이 물러날 때도 “권력형 성범죄는 언제든지 반복될 수 있다”는 우려가 많았다. 자치단체마다 성희롱·성폭력 교육을 강화하고 전담기구까지 만들었지만, 정작 권력의 맨위에 있는 자치단체장은 제외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4월 23일 오거돈 전 부산시장이 기자회견을 열어 시장직 사퇴 의사를 밝힌 뒤 울먹이고 있다. 송봉근 기자


기초자치단체장의 성추문 사례도 꽤 있다. 안평호 전 전남 함평군수는 2018년 성폭력 의혹이 제기되면서 3선 도전을 포기했다. 그는 지난해 1심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지만 이에 불복, 2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이재현 인천 서구청장는 회식자리에서 여직원에게 부적절한 신체접촉을 하고 춤을 출 것을 강요한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았었다.

박 시장과 안 전 지사의 경우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여비서를 성추행한 의혹이 공통점이다. 자치단체장은 통상 비서실에 여직원을 둔다. 광역단체장의 경우 비서실장 아래에 10여 명의 비서진이 있는데 통상 이 가운데 적게는 2~3명, 많게는 4~5명이 여직원이다.

자체단체장의 폐쇄적 업무 공간도 성추문의 진원지로 자주 등장한다. 자치단체장의 사무실은 집무실과 비서실 등으로 구분된다. 집무실은 결재를 하거나 직접 업무를 보는 공간과 외부인을 접견하는 공간(접견실), 휴게실(침실·화장실 포함)이 마련돼 있다. 통상 비서실과 접견실을 통과한 뒤 자치단체장이 근무하는 공간이 나오는데, 오 전 시장의 경우 자신이 혼자 업무를 보는 공간에서 여직원을 성추행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지난해 2월 1일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법정 구속이 된 뒤 호송차로 이동하고 있다. 뉴스1


범죄학 전문가는 아직도 우리 사회에 남아 있는 ‘너그러운 성범죄’ 인식을 가장 큰 문제로 꼽았다. 여성들이 권력의 중심(이너서클)으로 진입하는 과정에 일부 권력자들이 “이 정도는 감수해야지”라며 쉽게 성폭행이나 성추행을 저지른다는 얘기다. 범행이 반복되면서 범죄로 인식하지 않게 된다고 한다.

목원대 경찰법학과 박선영 교수는 “안 전 지사 사건에서 보듯 피해 여성이 주변의 비난과 2차 피해가 두려워 더 일찍 공개하지 못했다”며 “(권력자들이) 성범죄를 저지른 뒤에도 돌아오는 경우가 있는데 절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돼야 한다”고 말했다.

모친상으로 인한 형집행정지로 지난 5일 임시 출소했던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9일 오후 광주교도소에 다시 입소하고 있다.


조직 내 여직원에 대한 성범죄가 아닌 외부에서 발생한 성범죄로 곤욕을 치른 경우도 있다. 서장원 전 경기 포천시장은 평소 알고 지내던 50대 여성을 성추행한 혐의로 기소돼 2016년 7월 시장직을 잃었다. 우근민 전 제주지사는 2013년 여성 직능단체장을 면담하면서 성추행한 의혹이 제기돼 여성가족부로부터 ‘성희롱 판정’과 함께 1000만원의 손해배상, 재발 방지 대책 수립을 권고받았다.


피해자 끌려다니기 쉬운 권력형 성범죄
대개의 권력형 성범죄는 특성상 은밀히 행해질 때가 많고 순간적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아 뚜렷한 증거 확보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 또 권력형 가해자의 위세에 눌려 피해사실을 명쾌하게 밝히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박원순 서울시장 유고로 시장 권한을 대행하게 된 서정협 행정1부시장이 10일 오전 서울시청에서 향후 계획 등을 포함한 입장을 발표한 뒤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염건령 한국범죄학연구소장은 “피해 여성이 권위에 눌려 저항하지 못하면 가해자는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며 “권력형 성폭력의 전형적인 과정으로 나중에는 피해자를 압박하거나 배척하는 상황도 생긴다”고 말했다.

신진호·남궁민 기자 shin.ji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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