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가 자랑하던 '성폭력 매뉴얼', 박원순 앞에서 멈췄다

심윤지·류인하·임지선 기자 2020. 7. 14.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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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고 접수 뒤 시민인권보호관 30일 내 조사 등 절차 무색
박 시장 사망에도 시는 '직장 내 성폭력 근절' 책임 남아
시 "조사 없다" 무관용 원칙 외면..은폐 의혹 규명도 숙제

[경향신문]

속 타는 서울시장 권한대행 박원순 서울시장 사망으로 권한대행을 맡은 서정협 서울시 행정1부시장이 14일 서울시의회 임시회 본회의에 앞서 물을 마시고 있다. 권호욱 선임기자

서울시의 직장 내 성폭력 사건 처리제도는 ‘피해자 보호’라는 원칙 면에서 다른 지방자치단체보다 선진적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시 행정에서 독립된 조사기구를 마련하고, 부서장이 2차 피해 방지를 소홀히 하면 인사평가에 반영하게 했다. 하지만 서울시가 자랑하던 이 제도는 고 박원순 시장을 성추행 혐의로 고소한 피해자에게는 가닿지 않았다.

‘2019년 서울시 성희롱·성폭력 사건처리 매뉴얼’에 따르면 서울시의 내부 사건 처리 절차는 크게 다음과 같다. 피해자가 여성권익담당관이나 인권담당관에게 신고를 하면, 서울시장 지휘를 받지 않는 시민인권보호관이 30일 이내에 조사를 마무리해야 한다. 성희롱·성폭력이 인정되면 가해자 의무교육과 피해자 구제절차가 진행된다. 필요에 따라 가해자 징계와 직무 분리도 이루어진다.

2018년 3월 미투 운동을 계기로 이 지침은 한층 강화됐다. 박 시장이 직접 지시한 사항이었다. 강화된 지침에는 2차 가해를 ‘신분상 불이익’ ‘집단 따돌림’ 등으로 분명히 하고, 1차 가해에 준해 징계하도록 했다. 익명 제보 제도를 도입하고, 가해자 인사조치를 강화하며 상급자의 ‘연대책임’ 범위를 확대하는 내용도 담겼다. 서울시는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한 적절한 대처 방법을 알리겠다며 이 매뉴얼을 직원들에게 배포했다.

문제는 박 시장이 직장 내 성폭력 사건 처리 절차의 최종 책임자였다는 점이다. 인권담당관은 시민인권보호관의 조사와 권고 이행 결과를 서울시장에게 보고하도록 돼 있다. 다름 아닌 결재권자인 시장에게 성추행 피해를 당했다면 피해자는 신고를 주저할 수밖에 없다. 서울시는 “인권담당관이나 여성권익담당관에게 정식으로 신고가 접수되지 않아 피해자 보호조치를 취하기 어려웠다”고 했다. 성추행 피소 다음날 박 시장이 숨진 채 발견되면서 피해자는 성추행 혐의 고소에 대한 법적 판단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피해자 측은 서울시 차원의 진상조사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박 시장 사망을 두고 피해자를 탓하는 2차 가해 여론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서울시 차원에서라도 사실관계를 확인해 피해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이러한 요구에 대해 “현재(14일)로서는 조사 계획도, 향후 계획을 발표할 계획도 없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박 시장 사망으로 서울시의 관리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장다혜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기관에는 직장 내 성폭력을 근절하고 피해자를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고, 이는 가해자에 집중된 절차가 아니다”라며 “서울시가 이 사건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는다면 그동안 서울시가 산하기관에 요구해온 ‘성폭력 무관용 원칙’을 스스로 뒤엎는 꼴이 된다”고 했다. 윤석희 한국여성변호사회 회장은 “피의자 형사처분과 진상규명은 별개 문제”라며 “피해자가 제출한 텔레그램 증거나 주변 참고인 증언에 따라 최소한의 사실 확인은 가능하다”고 했다.

서울시의 은폐 의혹 규명도 남은 숙제다. 피해자는 경찰 고소 전 서울시 내부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시장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 ‘단순 실수로 받아들이라’는 답을 들었고, 수차례 부서 이동 요구도 묵살당했다고 주장했다. 서울시 매뉴얼에는 “성희롱·성폭력 사건을 은폐하거나 피해자 의사에 반하는 인사조치를 내릴 경우 관련자를 엄중 징계한다”는 내용이 있다.

미래통합당은 14일 박 시장의 성추행 의혹과 관련해 국회 상임위 청문회를 요구하기로 했다. 청문회에서도 진상규명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국정조사와 특별검사 실시도 요구할 계획이다.

심윤지·류인하·임지선 기자 sharps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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