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에도 변한 게 없더라" 무력감이 여성 울분 키웠다

박다해 2020. 7. 15.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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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은 왜 이렇게 분노하는가
안희정·오거돈 이어 박원순까지
"권력 차이 확인해 절망스러워"
"반복된 미투에도 변한 게 없다"
고 박원순 서울시장을 성추행 혐의로 고소한 피해자에게 연대의 뜻을 밝히며<한겨레> 젠더데스크 트위터 계정에 올라온 메시지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직장인 이상희(가명·33)씨는 지난 6일부터 14일까지 일주일 넘게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누웠다가도 화가 솟아올라 벌떡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지난 6일 아동 성착취물 사이트 ‘웰컴투비디오’ 운영자 손정우씨의 미국 송환이 불허된 뒤 그의 아버지가 “재판부에 감사하다”고 인사했다는 기사가 또렷이 떠올랐고, 같은 날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모친상 빈소에 늘어서 있던 정치인들의 근조 화환들이 생각났다. 불면의 ‘정점’을 찍은 건 성추행 피소 이후 죽음을 택한 박원순 서울시장 사건 때문이다.

이씨는 “그나마 손정우 송환 불허 때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공감대가 있었는데, 박원순 사건에선 상식적으로 이야기가 통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마저 연령에 따라, 성별에 따라 결국 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점이 명징하게 드러났다”고 했다. 그는 “지난 일주일 동안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이 내게 준 메시지는 ‘여성은 이 나라에서 동등하게 인정받을 수 없는 존재니 절대로 결혼하지 말아라. 애도 낳지 말아라’였다”며 “한국에서 젠더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여실히 볼 수 있던 시간”이라고도 말했다.

이씨처럼 지난 한주간 발생한 세 가지 사건으로 인해 분노와 고통을 동시에 호소하는 여성들이 적지 않다. 양상은 각각 다르지만, ‘여성이 안전하고 인간답게 살아갈 권리’가 사법부와 정치인, 주요 공직자 등 권력층에게 부정당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성범죄의 미온적인 처벌과 가해자 감싸기가 반복되면서 일종의 트라우마가 재생산된다고 지적하는 이들도 많다. 각자가 겪은 성희롱·성추행 경험을 떠올리게 만드는데다, 디지털 성폭력, 직장 내 성폭력 등에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공론화해도 별로 달라지지 않는 현실에 ‘학습된 무력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고 박원순 서울시장을 성추행 혐의로 고소한 피해자에게 연대의 뜻을 밝히며 <한겨레> 젠더데스크 트위터 계정에 올라온 메시지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40대 중반의 이아무개씨는 “박원순 시장 사건으로 대학 시절 진보적이라는 교수한테 성추행당한 일이 생각났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성추행·성희롱을 여러 차례 겪었다”며 “위력에 의한 성폭력은 이렇게 일상적인데, 당의 대처 계획을 묻는 기자에게 화를 낸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나, 안희정 전 지사 모친 상가 앞에 놓인 문재인 대통령의 조화를 보면 ‘민주진보진영’이라고 불리는 인사들의 젠더 감수성이 여전히 얼마나 뒤떨어져 있는지 분노를 참을 수가 없다”고 했다. 직장인 최아무개(28)씨는 “안희정, 오거돈 등 반복되는 ‘미투’ 사건 와중에 이뤄진 성추행 사건이라는 걸 알고 더욱 화가 났다. 권력을 가진 남성들에겐 어떤 학습효과도 없었다는 절망감이 들었다”고 토로했다.

특히 박원순 시장 사건에 분노하는 여성들은 ‘소극적 2차 가해’의 문제를 지적한다. 김은선(가명·31)씨는 “피해자의 신상을 털고 비난하는 게 ‘적극적 2차 가해’라면, 주요 정치인과 공직자들이 가해자를 칭송하는 건 ‘소극적 2차 가해’”라고 말했다. 김씨는 “개인 에스엔에스에 남긴 글까지 기사화가 될 만큼 큰 ‘스피커’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박원순과의 인연을 언급하며 그가 얼마나 훌륭했는지 강조할수록 피해자가 위축됐을 것”이라며 “피해자와 가해자 간 발화 권력의 차이를 확인해 참담했다”고 말했다. 김유진(가명·42)씨는 “성폭력 의혹을 받는 사람이 남길 수 있는 가장 나쁜 선례를 남겼는데, 그의 주변에선 여성들의 분노에 오히려 분노하며 ‘예의’를 지키라고 하니 진짜 예의가 뭔지 되묻고 싶다”고 말했다.

안주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내재돼 있던 트라우마가 외부 사건으로 다시 자극(trigger)을 받을 경우 이상희씨처럼 분노가 불면, 소화불량, 무력감 등 신체적 반응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안씨는 “실제로 지난주에 발생한 세 사건으로 스트레스와 우울감을 호소하는 여성들의 상담 신청이 늘었다”며 “피해 회복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인정’과 ‘배상’인데, 공동체가 이를 어떻게 이행해 나갈지 반드시 이야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수정 경기대 교수(범죄심리학)는 “누구도 자신을 대변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여성들이 더는 허탈감을 느끼지 않으려면, 연대의 힘을 보여줘야 할 뿐만 아니라 이를 정치와 같은 공적인 영역에서 어떻게 발휘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다해 채윤태 기자 doal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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