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련 날보다 맞는 날이 많았다"..운동선수들이 말하는 "나도 최숙현이다"

이보라·이창준·오경민 기자 2020. 7. 1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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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감독 자신들도 맞으며 배웠으니 다른 지도 방법 몰라
용기 내 폭력 신고하려면 정말 선수 생명을 걸고 해야
익명성 보장 안 되고 배신자로 낙인찍혀 보복 당해
계약금 절반 이상 감독에 줘야…팀 예산 전용도 빈번

실업팀에 소속된 현직 운동선수 ㄱ씨는 초등학교 방과 후 수업에서 운동을 처음 접했다. 방과 후 수업 지도자는 그의 재능을 알아봤다. ㄱ씨가 운동을 그만두려 하자 ‘100대를 맞아야 나갈 수 있다’며 막았다. 훈련하는 날보다 맞는 날이 더 많았다. 가슴을 발로 차여 발자국 모양의 멍도 들었다. 부모님이 걱정할까봐 ‘합숙 간다’며 맞은 몸을 숨겼다. 성인 선수가 된 뒤에도 폭력은 멈추지 않았다. “저능아” 같은 폭언은 기본이었다. 성추행, 금품 갈취, 부당 근로계약 등과 같은 부조리가 더해졌다.

ㄱ씨는 최숙현 선수 사망 사건을 보고 “터질 게 터졌다”고 생각했다. “선수들이 우리도 제대로 조사해줬으면 좋겠다고 얘기해요. 항상 사건이 터지면 그때뿐이잖아요.” 어렵게 인터뷰에 나선 ㄱ씨의 바람이다. 경향신문은 전·현직 운동선수 3명을 인터뷰해 체육계 폭력 실태와 원인, 대책 등을 들어봤다. 선수들은 신원 노출을 우려해 이름과 나이는 물론 소속 종목과 운동 경력조차 공개하지 않기를 원했다. 선수들은 성적우선주의와 감독의 막강한 권력, 실효성이 없는 신고·구제 제도를 문제로 지목했다.

■ “나도 최숙현 선수다”

선수들은 최 선수를 사망에 이르게 한 폭력사태는 자신들도 오랫동안 겪어온 일이라고 말했다. 전직 운동선수 ㄴ씨는 “학창시절 때는 선배나 감독이 팔꿈치로 엎드려 뻗치게 하고 야구방망이로 엉덩이, 뺨, 머리 등을 때렸다. 별것 아닌 일로 기합도 많이 받았다”고 했다. 현직 운동 지도자 ㄷ씨는 “동료 지도자는 평상시 남들에게 예의 바르지만 선수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하지만 폭력 얘기가 나오자 그 지도자는 ‘저, 애들 안 패잖아요’라고 했다. 그가 선수들에게 욕하고 머리 때리는 걸 본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때린 사람은 모르고 맞는 사람만 기억한다”고 했다.

많은 선수들이 폭언에도 끊임없이 노출된다. ㄱ씨는 “성인 선수의 경기력이 떨어지는 가장 큰 이유는 폭언 때문”이라고 했다. 선수들이 감독 등 지도자의 폭언에 긴장해 오히려 경기에 제대로 임하지 못한다는 얘기다. 폭언 때문에 우울증, 공황장애로 치료받는 선수도 많다고 했다. 선수들의 치료 사실이 드러나면 ‘나약하다’는 꼬리표가 따라붙는다.

여성 선수에겐 성폭력도 추가된다. 부적절한 신체 접촉, 성희롱, 성차별 발언을 경험한 선수들이 많다. 부당한 근로계약도 문제다. 선수들이 계약금을 온전히 다 받지 못하고 절반 이상을 감독에게 줘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 성적우선주의 속 폭력 대물림

선수들은 성적우선주의가 근본 원인이라고 봤다. ㄷ씨는 “메달 숫자에 따라 선수와 해당 팀에 대한 대우가 달라진다. 그러니 어떻게든 성적을 내기 위해 강압적 훈련 등이 당연시되고 몸에 밴다”고 했다. 선수가 폭력 등 문제를 일으킬 경우 실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쉽게 사건이 무마되는 사례도 많다고 ㄱ씨는 말했다.

감독 등 지도자의 권력이 막강한 것도 문제다. ‘좋은 성적을 내겠다’는 명목하에 감독의 폭력, 강압 훈련 등이 용인된다. 성적 이외의 문제는 무시된다.

한때 선수였던 지도자는 스스로 겪었던 폭력을 반복한다. ㄷ씨는 “지도자들은 어린 시절부터 폭력에 익숙해 다른 지도 방법을 모른다. 선수들을 때리는 건 쉬운 지도 방법이다. 지도자들은 다른 방법을 공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비정규직으로 고용된 지도자의 실적 압박도 배경이다. 선수 성적에 이들의 계약 연장 여부가 달렸기 때문이다. ㄷ씨는 “(코치 중에는) 성적을 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다 보니 손찌검을 하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 “신고가 감독 귀에…”

많은 선수들은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음에도 신고조차 못한다. 신고 제도가 무용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조사·피해 구제에서 필수적인 것은 신고자 비밀 보장이다. 하지만 선수들이 신고를 하면 그 내용이 가해자 측인 감독 귀에 들어가는 사례가 부지기수였다고 이들은 말했다. 신고자는 ‘배신자’로 찍혀 선수 생활을 이어가기가 힘든 일도 많다. 그렇다 보니 감사가 이뤄져도 선수들은 ‘폭력을 겪은 적이 없다’며 거짓으로 응답하는 게 대다수라고 했다.

ㄱ씨는 “폭력 사건으로 조사를 받은 적이 있다. 선수들은 조사를 끝내고 팀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다. 감독을 다시 봐야 하니 그게 무서워서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다”고 전했다. 그는 “최숙현 선수 사망 사건 이후 실시한 조사에도 선수들은 사실대로 답하지 못했다. 신고 내용이 유출된 사례를 봤기 때문”이라고 했다. ㄷ씨는 “운동 선수 부모 역시 자녀의 허벅지가 시퍼렇게 멍 든 것을 볼 때마다 가슴이 미어진다고 하지만, 자녀에게 불이익이 올까봐 항의를 못 한다”고 했다. 피해 선수들이 직접 증거를 모으는 등 피해 사실을 입증해야 하는 점도 장애물이다.

선수들은 대한체육회 스포츠인권센터 등 신고·조사 기관에서 신고자의 익명성을 보장해야 한다고 했다. 기관 구성원도 비체육계·인권 전문 인사로 꾸려져야 선수들이 안심하고 고충을 토로할 것이라고 말했다. ㄱ씨는 “선수들은 피해 사실을 말할 때 은퇴를 각오한다. 선수 보호가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지도자 교육 등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왔다. ㄴ씨는 말했다. “지도자들은 ‘선수가 잘되게 하려고 했다’고 얘기합니다. 그런 방법밖에 몰라 그러는 것도 있어요. 선수를 보호하고 가해자 처벌이 강화되는 제도 개선이 필요합니다.”

이보라·이창준·오경민 기자 purpl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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