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만2000개 뿌리기업 줄폐업 위기..매출 50%감소 가동률 20%대로

안대규 입력 2020. 7. 15. 15:58 수정 2020. 7. 15.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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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방산업 위기에 日무역 보복 영향으로 수출길 막혀 고사위기
"뿌리산업 망하면 차 서고, 비행기 못뜬다. 제조업 다 같이 죽는 것"
제조원가 대비 전력요금 비중 커..업계 '한시적 전기요금 인하'요구
경기도 시흥시 시화공단에 한 폐쇄된 공장문에 자물쇠가 채워져 있다. /허문찬기자 sweat@hankyung.com


“정부가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연말까지 뿌리기업 가운데 30%는 문을 닫을 것입니다.”(주보원 한국금속열처리공업협동조합 이사장)

 제조업의 근간인 주조(주물)·금형·소성가공·용접·표면처리(도금)·열처리 등 업종에서 55만여명을 고용하고 있는 3만3000여개 중소기업이 ‘줄폐업’위기에 놓였다. 나무의 뿌리처럼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나 최종 제품에 내재돼 제조업 경쟁력의 근간이 된다는 의미에서 이들은 뿌리기업으로 불린다. 제조업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에도 우리나라 경제의 버팀목 역할을 한 ‘숨은 영웅’이다. 하지만 이 산업의 바탕인 뿌리산업은 자동차 조선 기계 등 전방산업의 위기로 국내 일감이 준데다 미국 독일 일본 등으로 수출길이 막히면서 ‘고사’직전에 처하게 된 것이다.
 ◆매출 50%감소, 가동률은 20%대

뿌리기업의 위기는 부품 소재 가공 순서에 따라 주물부터 시작해 단조, 열처리 등으로 확산되고 있다. 한국주물공업협동조합에 따르면 전국 주물업체 600여개를 조사한 결과 지난 6월 매출이 전년 동기대비 50%이상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주물이란 고체 금속재료를 액체상태로 녹인 상태에서 틀 속에 주입해 일정 형태의 금속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 국가뿌리산업진흥센터에 따르면 뿌리기업의 연간 매출은 우리나라 제조업 전체 매출의 10.6%수준인 165조원(2018년 기준)으로 이 가운데 주물업계 매출은 15조9000억원 가량이다. 서병문 한국주물공업협동조합 이사장은 “6월부터 나아질 것으로 예상했는 데 그럴 기미도 안보인다”고 말했다.  
 
금속 등 원재료를 자동차, 산업기계, 선박, 방산, 중장비 등에 들어가는 부품에 맞는 형태로 변형시키는 소성가공의 일종인 단조산업 역시 매출이 급감했다. 한국단조공업협동조합에 따르면 이 조합 소속 단조업체 50여곳의 지난 6월 매출은 전년 동월대비 30%감소했다. 소성가공업계 연간 매출은 뿌리산업 전체의 27.3%인 45조1000억원 규모다. 한 단조업체 사장은 “직원들끼리 돌아가며 5~10일씩 휴가를 내고 있다”며 “자체적으로 ‘주3일 근무제’를 시행하는 기업도 많다”고 전했다.
 
부품 표면에 금속 또는 비금속을 덧입혀 미관이나 내구성을 높이는 뿌리기업 공정의 마지막 단계인 표면처리분야도 공장 가동률은 20%대까지 떨어졌다. 경기 반월도금사업협동조합 소속 61곳의 지난 6월 평균 가동률은 24.1%에 불과했다. 안산 경수도금단지 역시 29%에 불과해 전년 동월(55.3%)의 반토막 수준이었다. 대구성서공단의 표면처리기업들도 대부분 가동률이 20%대를 보였다. 한 도금업체 대표는 “직원들에 월급을 못주는 뿌리기업들이 늘고 있다”며 “사장들이 보험과 적금을 깨거나 친인척에 자금을 빌려 겨우 버티고 있다”고 전했다.
 ◆日도 수십년 거래 끊어...공장 매물 급증

뿌리기업 중 수출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은 주조, 소성가공, 용접, 표면처리업체들은 글로벌 자동차산업 위기에 수출길도 막힌 상태다. 뿌리산업은 자동차산업과 연관성이 높다. 엔진블럭(주조), 피스톤(열처리), 범퍼(소성가공) 등 자동차 한 대에 들어가는 부품의 90%인 2만2500개에 ‘뿌리기술’이 들어갈 정도다.
 
도요타, 혼다, 닛산 등 일본 완성차업체의 부품업체들은 국내 뿌리기업의 오랜 고객사였다. 하지만 최근 이들이 거래선을 대만과 베트남 등으로 바꾼 것으로 전해졌다. 표면처리업체 한 대표는 “수십년간 이어온 거래를 갑자기 끊은 것으로 볼때, 단순히 코로나19 때문만은 아니고, 대법원의 일본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따른 양국간 무역분쟁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일본내 자동차부품업체들은 한국보다 5~10%정도 비싸게 공급받더라도 자국내 뿌리기업과 거래하거나 아니면 대만이나 동남아시아 업체를 이용하겠다는 입장인 것으로 전해졌다.
 
뿌리기업들의 폐업이 쏟아지다보니 공장도 헐값에 매각되고 있다. 경남 창원 인근 한 공단에선 100억원이상을 투자해 지은 1만6528㎡(5000평)부지의 건평 6611㎡(2000평)규모 공장과 내부 공작기계 등 설비가 최근 40억원대에 팔린 것으로 전해졌다. 부동산업계 관계자는 “공장 매물이 너무 많다보니 대부분 매매가 안되고 팔리더라도 평당 100만원도 안되는 가격에 거래된다”고 말했다.
 ◆“한시적으로 전기료 인하해달라”

뿌리기업의 위기가 가중되자,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 회장은 지난 5월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을 만나 △뿌리산업 전용 정책자금 및 긴급유동성 자금 지원 △특별고용지원업종 지정 △전기요금 제도 개선 등 업계 건의 사항을 전달했다. 뿌리산업 정책은 산업부 소관이지만 뿌리기업의 기술개발 및 생산 지원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기업의 자동화·첨단화 지원은 중소벤처기업부가 맡는 등 부처별로 역할이 분산됐다. 위기상황이지만 어느 부처도 총대를 메지않아 컨트롤타워가 없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업계의 가장 시급한 요구는 유동성 공급과 전기료 인하다. 최기갑 한국용접공업조합 이사장은 “소상공인, 기간산업, 비대면업체 등은 정부가 지원하고 있지만 뿌리산업은 정부도 시중은행도 모두 외면하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 상당수 뿌리기업들은 은행이 대출 상담 자체를 꺼리며 일부 은행에선 관리업종으로 지정해 기존 대출을 회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경북지역 한 주물업체 대표는 “뿌리산업이 한번 망하면 차도 더이상 못 달리고, 비행기도 못뜬다. 제조업이 다 같이 죽는 것”이라며 “정부의 도움이 절실하다”고 토로했다.
 
인천에 모 주물업체는 매출 감소로 한달에 4억원 적자가 나고 있는 데, 이번달 전기요금만 4억원을 내게 될 상황에 처했다. 6~8월은 산업용 전기요금에 할증이 붙어 통상 평소보다 30% 많이 부과된다는 것이 뿌리기업들의 설명이다. 뿌리기업은 업종 특성상 전기를 24시간 쓰는 사례가 많아 상대적으로 전기요금 부담이 다른 업종보다 크다. 중기중앙회에 따르면 제조원가 대비 전력요금 비중은  뿌리기업 업체당 평균 12.2%다. 서병문 이사장은 “많은 업체들이 존폐위기에 몰려 전기 요금도 내기도 버거운 상황”이라며 ”농촌지역에 할인해주듯 뿌리기업에게도 한시적으로 할인해달라”고 촉구했다.

최저임금과 주52시간 근무시간제도 장기적인 부담이다. 최근 3년간 최저임금은 30%이상 증가했으나 중소기업의 납품대금은 제자리 수준이어서 영업이익률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모 중소기업 회장은 “미국은 최저임금이 8.7달러수준인데, 한국은 점심 식대, 피복값, 주휴수당 등 부담이 더해지기 때문에 실질 최저임금은 1만원대로 미국보다도 높다”며 “한국 뿌리산업은 인건비 때문에 경쟁력을 상실했다”고 지적했다. 대다수 뿌리기업은 50인 미만 소기업으로 주52시간제가 2021년 7월부터 적용된다. 하지만 상당수 업체들은 내부적으로 이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중기중앙회는 “신규 인력의 취업 기피로 뿌리산업 종사자 중 61.2%가 40대 이상 근로자”라며 “대기업 주문을 받아 적기에 납품해야하는 업종 특성상 주52시간제로 인한 납기 경쟁력 약화와 수주 축소가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안대규 기자 powerzanic@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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