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으로 사회 바꿀 수 있다는 경험 매일 하고 있어요"
“장애인도 다 똑같은 승객이고 소비자예요. 특별한 걸 바라는 게 아니에요. 휠체어를 타는 제 딸 지민이가 그저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 ‘보통의 서비스’를 누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은거죠.”
지난 10일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만난 협동조합 무의 이사장 홍윤희(47)씨는 장애인 이동권 콘텐츠를 제작하게 된 계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2015년 카카오 스토리펀딩 ‘지민이의 그곳에 쉽게 가고 싶다’를 통해 모은 600만원으로 캠페인을 진행했고, 2016년 협동조합 무의를 설립해 장애인 환승지도 만들기 활동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혼자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게 꿈인 딸의 발걸음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졌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시설 개선은 바라지도 않았어요. 아이가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길을 알려주고 싶었어요.” 지난해 완성한 서울과 인천지하철 환승 지도를 비롯해 서울 사대문 안 소풍지도, 서울 궁 지도까지 ‘무의’가 휠체어 이용자를 위해 만든 지도만 벌써 4개다.
그런 홍윤희씨가 지난 8일 작은 환호성을 터뜨렸다. 행정안전부가 카카오, 한국철도시설공단과 손잡고 기존 공공데이터를 활용해 전국 도시철도 1107개 역사의 교통약자 이동 및 환승 경로 지도 서비스를 개시한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카카오맵을 통해 전국 지하철역의 교통약자 이동 경로와 함께 장애인 화장실, 수유시설 등의 편의시설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언뜻 민관협력 정책처럼 보이는 이 사례 속에는 홍윤희씨와 그의 딸, 그리고 함께한 시민 자원봉사자들의 지난 5년여간의 노력이 숨어있었다.
홍씨가 2015년에 진행한 카카오펀딩을 통한 캠페인 활동을 마무리 지을 무렵이었다. 미국에서 공부하는 김건호씨는 우연히 캠페인 활동을 접했고, 홍씨에게 장애인 이동권 콘텐츠 제작을 위한 협동조합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스키를 타다 척추를 다쳐 휠체어를 타게 된 김씨는 미국에서 휠체어 여행지도를 만든 경험이 있다고 했다. 이후에도 우연한 인연들이 만들어졌다. 방송 프로듀서가 힘을 보태 캠페인 영상을 제작하고, 디자인 전공자들이 나서 지도 디자인을 도왔다. 시민 자원봉사자들도 하나둘씩 모였고, 직접 휠체어를 타고 다니며 지도 정보를 수집했다. 그들이 느낀 불편함을 직접 서울교통공사에 전달하기도 했다. 200여명의 시민 자원봉사자들이 홍 이사장과 함께 만든 지도는 서울시내 53개 역 256개 구간. 홍씨는 “처음 시작할 땐 저와 딸의 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시민들이 공감하고 함께해주니 모두의 일이 된 것 같습니다”라고 소감을 전했다.
비록 카카오맵에 무의가 만든 지도가 실린 건 아니지만 홍씨는 이번 일이 큰 의미가 있다고 했다. “전국적으로 동일한 형태의 지도가 실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전 국민이 사용하는 사이트에 실렸다는 것 자체가 다음에 불편한 점이 생겼을 때 수정될 수 있다는 변화의 동력을 확보한 것에도 의미가 있죠. 또 장애인, 유아차를 끌고 다니는 부모들, 노인들은 이런 지도가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세상이 나에게 호의적이라는 느낌이 들 수 있을 거예요.”
장애 딸 위해 이동권 캠페인 시작 2019년엔 자원봉사자 200여명과 서울 지하철 53개역 환승지도 내
최근 행안부, 공공데이터 활용해 교통약자 이동정보 서비스하기로 “변화의 동력 확보해 큰 의미”
홍씨는 시민연대가 사회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 지난해 여름에는 또 다른 시민참여 캠페인을 진행하기도 했다. 소셜미디어상에 ‘휠체어탄라이언챌린지’ 캠페인을 벌였고, 330개의 게시물이 공유되는 등 많은 호응을 얻었다. 국내 미투 운동의 불씨를 댕긴 서지현 검사도 직접 그린 손 그림을 공유하기도 했다. 홍씨의 이런 활동은 딸 지민씨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아이돌 콘서트에 가고 싶었지만 휠체어 석이 막혀있자 트위터에 휠체어 석을 만들어달라는 게시글을 올렸다. 이후 천 건이 넘는 리트윗 운동이 일어났다. 그다음 공연에는 장애인석이 열렸다. 변화를 경험한 지민씨는 현재 유튜브 영상을 찍고, 글을 기고하면서 또 다른 변화를 만들고 있다. 최근에는 코로나 시대에 장애인 학습권 보장에 관한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아프면 소문내라는 말이 있습니다. 생각보다 우리 주변에는 도움을 주겠다는 사람들이 많더군요. 두려워하지 말고 목소리를 내면 분명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사회가 진정으로 변화하기 위해선 시민들의 연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우연한 계기로 시작하게 된 활동이지만, 우리 손으로 직접 사회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경험을 매일같이 하고 있습니다.”
서혜빈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원 hyeb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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