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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양민학살 백선엽을 미국이 적극 애도하는 까닭은?

입력 2020.07.16.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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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일본의 한반도 강점에 동의한 역사적 배경이 평가 기준

[고승우 언론사회학 박사]
백선엽 예비역 육군대장이 전쟁영웅과 친일파라는 상반된 평가 속에 15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그는 일제강점기 만주군 소위로 임관돼 독립군을 탄압한 뒤, 일본이 패망하면서 군문에 들어와 한국전쟁 때 1사단장, 1군단장, 육군참모총장, 휴전회담 한국 대표, 주중한국대사, 교통부 장관 등을 지냈다.

그의 사망과 관련해 미국 백악관, 국무부 등이 공식 애도를 표해 눈길을 끈다. 미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는 12일 공식 트위터 계정을 통해 "백악관은 12일 한국전쟁 영웅인 백선엽 장군의 타계에 애도를 표한다. 1950년대 공산주의 침략자들을 격퇴하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 부은 백선엽 장군과 모든 영웅들 덕분에 오늘날 한국이 번영하는 민주공화국이 되었다"라고 밝혔다<미국의소리방송 2020년 7월 15일>.

미 국무부 모건 오테이거스 대변인도 14일(현지시간) 성명에서 "한국전쟁 영웅 백선엽 장군이 자유와 민주주의 가치를 위해 싸운 점을 강조하며, 그의 죽음에 대해 한국 국민들에게 진심으로 조의를 표한다"면서 "한국 최초의 4성 장군으로서 한국 전쟁 중 조국에 대한 그의 봉사는 오늘날까지 미국과 한국 모두 계속 지키고 있는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위한 싸움의 상징이었다. 백 장군은 외교관과 정치인으로 일하면서 그의 나라를 위해 매우 탁월하게 봉사했고, 미국과 한국의 동맹을 구축하는데 일조했다"고 덧붙였다<미국의소리방송 2020년 7월 15일>.

백선엽을 극찬하는 미국의 태도는 과거 일제의 한반도 강점과 한민족의 3.1 독립운동, 북간도 등에서의 항일 투쟁, 일본 항복이후 미군정의 친일파의 등용과 4.3 제주 항쟁 및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등에 취했던 미국의 입장에 일관한다.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에 따라 일본의 한반도 강점에 동의한 뒤, 한민족의 3.1독립운동은 물론 항일 무장에 대해 일본의 시각에서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대처했다.

1905년 7월 29일 당시 일본 총리 가쓰라와 미 육군 장관 태프트가 비밀리에 도쿄에서 만났다. 미국은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권을, 일본은 미국의 하와이, 필리핀 지배권을 각각 인정했다. 일본은 같은 해 8월 제2차 영일동맹에 이어 9월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한반도 지배권을 세계열강들로부터 인정받게 되었다. 일본은 그로부터 불과 몇 달 후인 11월 17일 을사늑약을 강요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했으며, 미국의 묵인 아래에 조선반도 식민침략을 본격화했다.

3·1독립운동은 일제 강점기에 한국인들이 일제의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 3월 1일 독립을 선언하고 평화적으로 만세운동을 벌여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은 대 사건이다. 3·1독립운동은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세계 제1차 대전이 끝나기 전인 1918년 1월 발표한 비밀외교의 폐지와 민족자결주의가 포함된 '14개조평화원칙'의 영향을 크게 받아 일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윌슨 대통령은 1919년 1월부터 다음해 1월까지 열린 파리강화조약 회의에서 일본 등 강국들의 식민지 지배 문제에 입을 다물었다. 특히 미국은 당시 일본이 전승국의 하나였다는 점 등을 고려해 일본에 강점된 한반도 문제 거론을 부적절하게 여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뿐 아니다.

미 국무부는 1919년 4월 주일 미 대사에게 보낸 공문에서 '서울의 미국 영사관은 미국이 조선민족주의자들의 독립운동 수행을 지원한다는 믿음이 생기지 않도록 극도로 주의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미 국무부는 이어 '서울의 미 영사관은 일본 당국이 미국 정부가 조선의 민족주의 운동에 동정적이라고 의심할만한 어떤 일을 해서도 안 된다'고 밝혔다.

더 나아가 미국은 파리강화조약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조선민족의 대표로 선출된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의 회의 참가에도 대단히 부정적이었다. 당시 미국에 거주하던 한인 독립운동 세력의 하와이 대표 이승만, 미서부 지역 대표 민호찬, 중서부 대표 헨리 한경청 등은 비자 문제와 미국 재입국 불허 우려로 회의에 참석치 못했다. 미 정부 당국이 이들의 출국을 실질적으로 저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독립운동가 김규식 선생은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 대표로 파리강화조약 회의에 참석키 위해 파리 회의장까지 갔지만 조선의 정식 대표로 인정받지 못했다. 당시 중국은 미국 외교관들에게 조선 독립 문제를 의제로 삼을 것을 요구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미국은 조선 대표 등에게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파리강화조약 이후 조선의 독립문제는 2차 대전 종전까지 미국을 포함한 서구 진영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미국이 3·1독립운동 당시 한민족 대신 일본에 기운 태도를 보인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미국은 1915년 일본이 만주와 몽골, 산둥반도에서 이익을 추구하도록 동의해 일본의 중국 침략을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가 일본 편을 들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미국은 1918년 11월 세계 1차 대전이 끝난 뒤 일본이 전승국의 입장에서 독일이 소유하던 중국 내 일부 도서와 재산을 차지하도록 1919년 동의하는 등 일본의 이익을 챙겨주는데 적극적이었다. 미국과 일본은 1921년 태평양에서의 해군력 배치 등에 협의하는 등 사이가 좋았지만 일본이 중국 침략을 본격화하면서 관계가 소원해지고 결국 태평양전쟁에서 맞붙게 된다.

3·1독립운동 이후인 1920년 6월과 10월 우리 민족이 거둔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은 독립운동사의 자랑스러운 순간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은 일본군의 중국 진입을 한국 독립군이 방해하고 저지한다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시대 상황은 1차 대전 전후 처리작업을 놓고 미국과 일본이 동맹국의 입장에서 협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체결 당시 독도의 영유권을 표기치 않아 오늘날에도 일본이 파렴치한 태도로 영유권을 주장하는 근거를 제시하기도 했다. 미국은 당시 일본이 1905년 강탈한 독도 영유권 문제에 대해 언급치 않았는데 이 또한 가쓰라-태프트 협약의 연장선상에 있다 할 것이다.

한편 태평양 전쟁이 끝난 뒤 미국이 점령군으로 한반도에 들어온 것 역시 우연이 아니다. 한반도의 일본 병합을 인정했던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맥아더는 일본 본토에서와 동일한 정책을 한반도 남쪽에서 집행했다. 이승만은 미국의 그런 정책에 편승해 미군정에 의해 해방정국의 권력집단으로 변신한 친일세력과 손을 잡는 반민족적 선택을 했다.

미국은 1947년 제주 4.3이 발생하자 소련과 중국을 의식해 조기 강경 진압을 주장하는 친일세력의 주장을 받아들여 무자비한 학살 자행의 원인을 제공했다. 미군정은 제주 4.3이 발생한 직후 조사단을 제주에 파견했는데, 당시 미군 보고서는 경찰 발포로 도민 반감이 고조된 것을 두고 '남로당 제주조직이 선동해 증폭시켰다'며 '제주도 인구의 70%가 좌익에 동조자’라고 분석했다.

미군정은 제주도에서 5·10선거가 무산된 뒤 미군 제6사단 제20연대 연대장 브라운(Brown) 대령을 제주지구 미군사령관으로 파견해 모든 작전을 지휘·통솔토록 하고, 강경 진압 작전을 본격화해 당시 제주도 인구 9분의 1인 2만 5천~3만 명의 소중한 인명이 희생되는 대 참극을 이끌었다<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자료>. 제주에서 백선엽과 연관된 서북청년단이 벌인 민간인 학살 등의 만행은 자심했다.

미국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군사고문단을 남겨 국군을 지원했다. 그러나 정작 한국전쟁 과정에서 이승만이 무수한 양민을 학살할 때 미국은 뒷전에서 방관하거나 묵시적 동의를 했다. 광주항쟁 당시 특전사가 휴전선 방어 대신 광주로 이동한 배경에 한반도 작전지휘권을 지닌 미국의 동의가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되는데, 이와 같은 맥락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이 같이 한반도 현대사에서 보여준 부정적인 역할에 대해 미국은 한 번도 공식 인정하거나 사과 등을 한 적이 없다. 그들이 한반도의 비극적 역사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고 영향력을 행사한 작태에 대해 국내에서 초보적 연구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고 백선엽 장군의 안장식이 열린 15일 오전 대전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에서 로버트 에이브럼스 한미연합사령관과 최병혁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이 헌화 후 경례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미국이 20세기 초부터 취해온 한반도 정책을 반추해 보면, 굴곡이 심한 경력의 백선엽을 트럼프 행정부가 극찬하는 이유가 분명해진다. 미국 역대 정부가 취해왔던 한국에 대한 정책 속에서 백선엽의 친일행각이나 한국전쟁 당시 양민 학살은 부정적으로 평가할 대상이 아니다.

백선엽은 1920년 평남 강서에서 출생해 일제강점기 독립군 토벌 전문부대였던 간도특설대에 자원해 근무했다. 그는 1943년 4월 만주국 소위로 임관한 뒤, 항일군 잡는 특수부대로 명성을 날린 간도특설대에서 장교로 활약하다 해방 후 잠시 고향에 체류했다. 그리고 남쪽으로 넘어온 뒤 육군 정보국장이 되고, 친일청산과 분단반대를 외친 세력을 좌익으로 몰아 제거하는 숙군 작업을 전개했다. 백선엽은 생전 이를 사과한 적이 없다.

그는 해방정국 당시 육군 정보국장 시절 극우단체인 서북청년단을 중심으로 창설된 호림부대가 빨치산 토벌을 명분으로 강원도 인제, 경북 영천·청도·경산, 경남 거창 등지에서 민간인들을 학살 약탈하는 것을 방치했다. 한국전쟁 당시 백선엽이 이끄는 백야사라는 특수부대는 빨치산 토벌이라는 미명 하에 지리산 일대에서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

그는 한국전쟁 중에는 보병 1사단장으로 다부동 전투, 평양탈환작전, 2군단장으로 수도고지/지형능선 전투, 1군단장으로 설악산 부근 전투 등 다수의 전투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운 공으로 전쟁영웅으로 불리고 있다.

백선엽은 친일과 양민학살, 전쟁영웅이라는 경력으로 논란을 빚었지만 국내 실정법에 따라 국립묘지에 매장되었다. 이에 관한 국가유공자 관련법은 개정 논란에 휩싸여 있다. 친일 경력이 있다 해도 한국전쟁 전공이 인정되면 국가유공자로 지정하게 되어 있어 민족정기 확립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백선엽을 극찬하는 미국 태도의 의미는 간단치 않다. 한반도 비핵화 과정에서 심화하는 남남갈등에 대해 미국의 정책을 지지하는 세력에게 힘을 실어주겠다는 메시지로 해석할 수 있다는 합리적 추론이 가능하다. 백선엽에 대한 미국의 극찬을 계기로 학계, 정계, 언론계는 한반도 문제를 두고도 자국 이기주의만 최우선으로 하는 미국의 정책을 재평가하고, 그 근거를 확실히 파악해야 한다.

[고승우 언론사회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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