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 칼럼] 박원순 시장은 성추행 혐의만 빼면 완벽할까

최보식 선임기자 2020. 7. 17. 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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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살아온 인생의 총화다
최보식 선임기자

서울특별시장(葬)을 한 것만으로 많이 부족한 모양이다. “맑은 분” “너무나 큰 인물”에 이어 “박원순 같은 사람은 당장 100조원이 있어도 복원할 수 없다”는 칭송까지 나왔다. 오점(汚點)은 티끌만 한 성추행 혐의뿐이다. 이를 빼면 박원순은 시민·인권 운동가로 약자를 위해 살아왔고 완벽한 서울시장이었다는 것이다.

어느 길거리에는 '님의 뜻 기억하겠습니다'라는 민주당 현수막도 걸렸다. 하지만 그가 9년간 서울시장을 하면서 어떤 업적과 가치를 남겼는지 별로 기억나는 게 없다. 대신 내게 각인된 그의 이미지는 있다. 2018년 여름날 서울 강북에서 옥탑방 거주 체험을 하던 모습이었다. TV 화면에 어색하게 부채질하는 그의 부부가 나왔다. 에어컨 설치는 어렵다 해도 옥탑방 사람들도 선풍기는 사서 돌리는데 왜 저러고 있나, 서울시장이 저렇게 할 일이 없나 싶었다. 우리 나이에 지방 출신으로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으면 달동네 생활을 모를 리 없다.

그 시간에 냉방 잘되는 집무실에서 최고 컨디션을 유지한 채 일해줬으면 서울 시정에 훨씬 더 도움이 됐을 것이다. 옥탑방 한 달치 월세는 200만원이었다. 그 부부가 잠깐 거주하려고 옥탑방을 수리한 비용은 별도다. 공관이 있는 그가 순전히 '체험 쇼'를 위해 가외로 쓴 서울시 예산이었다. 더 가관은 비서관 2명을 옆방에 기거시켰다는 사실이다. 정치인은 원래 쇼를 하지만 이런 쇼는 그때 처음 봤다.

박 시장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또 하나 있다. 미세 먼지가 심했던 2018년 초 사흘간 '출퇴근 시간대 대중교통 무료'를 발표한 것이다. 버스와 지하철 요금을 안 내고 출퇴근한 회사원은 잠깐 기분이 좋았을 것이고, 자가용 운전자들은 교통 체증 감소로 그때만 편했다. 이게 세금 150억원을 넣어서 얻은 효과였다. 자기가 노동해 번 돈이라면 결코 이렇게 뿌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뒤에도 미세 먼지는 여전했다.

최근까지 박 시장은 이와 유사한 시정 운영을 해왔다. 그렇게 대중의 환심을 사려고 진력했지만 지지율은 오르지 않았다. 그는 차기 대권을 위해 서울시에서 줄 수 있는 자리마다 시민운동 하는 사람들을 꽂아왔다. 성추행 혐의를 떠나 이런 그를 서울시장의 모델로 추앙하는 것은 자기 상상 속에 갇혀 사는 사람들이나 할 짓이다.

'성추행 첫 승소 판결 이끌어낸 인권 변호사'라는 타이틀도 이번 사건으로 무색해지자, 여권에서는 '아름다운 재단' '아름다운 가게' '희망제작소' '참여연대' 등 그의 시민운동 업적을 칭송하고 있다. 그가 설립한 '아름다운 재단'은 주로 대기업과 재력가들에게서 기부금을 받았다. 이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돈 쓰기'라고 했다. 대선을 염두에 둔 이명박도 서울시장 시절 봉급 전액을 이 재단에 냈다. 하지만 박원순이 운영하는 동안 기부금 수십억원이 광우병 시위, FTA 반대 시위 등을 주도한 좌파 단체들에 지원됐다.

'아름다운 가게'는 집에서 안 쓰는 옷과 가재도구를 기증받아 싸게 되파는 재사용 나눔의 취지를 내세웠다. 실제로는 대기업에서 기증받은 재고품이 다수를 차지했다. '희망제작소'도 지자체나 대기업의 용역을 받아 운영됐다. 이게 가능한 것은 '시민 단체의 위력(威力)에 의해 보험을 들어놓는 것' 말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박원순은 포스코와 풀무원 등에서 사외이사를 했다. 'X파일 사건' 이후 코너에 몰렸던 삼성에서 연구비로 5000만원을 받았다. 그는 시민운동의 확산에 기여했지만 그 못지않게 시민운동 본연의 정신을 타락시켰다. 시민 단체가 대기업을 뜯어먹거나 권력 지향적으로 바뀌어간 데는 분명히 그의 역할이 있었다.

그가 안철수와 서울시장 출마 담판을 하러 나왔을 때 입은 등산복도 협찬받은 것이었다. 서울시장이 된 뒤 한 여당 의원이 "시장님은 협찬을 많이 받았는데 본인은 월급 얼마를 사회에 환원한 적 없군요?"라고 하자 "제가 워낙 가난해서요"라고 답했다.

하지만 노태우 정권 시절에 박원순 집에서 두세 달 숨어 지낸 적 있다는 장기표 선생의 기억은 다르다.

"서울 동교동 로터리 근처에 있는 그의 집은 하얀 벽돌담 안에 있는 이층 양옥이었다. 마당에 잔디가 깔린 저택이었다. 그때 박원순은 변호사 일로 돈을 많이 벌었다. 그런 그가 서울시장까지 하면서 빚을 7억원이나 남겨놨다는 뉴스를 보고 대체 어떻게 살아왔는지 이해가 안 됐다."

민주화 보상금 등을 모두 거절했고 평생 소박하게 살았던 장 선생은 이렇게 평했다. “죽음은 살아온 인생의 총화다. 어떻게 죽었느냐를 보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알 수 있다. 잘 죽으려면 옳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안됐으나, 공적으로 보면 박원순의 삶은 위선적이고 파렴치했다. 그가 ‘맑은 사람’이었으면 결코 이런 결말이 나올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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