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이다" "친일파다".. '백선엽'에 국론이 쪼개졌다 [박수찬의 軍]

박수찬 2020. 7. 18.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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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대전시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백선엽 장군 안장식에서 육군 의장대원들이 백 장군의 영정을 들고 이동하고 있다. 국가보훈처 제공
“백선엽은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로 가야 할 반민족행위자다.”

“누구 덕에 이렇게 잘 살고 있는 줄 아느냐. 백선엽은 나라를 구한 영웅이다.” 

15일 국립대전현충원 입구. 지난 10일 100세 일기로 별세한 백선엽 장군의 대전현충원 안장식은 그를 둘러싼 갈등으로 얼룩졌다.

광복회 대전충남지부 등은 대전현충원 입구 4차로 한쪽 인도에서 시민대회를 열어 “간도특설대 장교 출신으로 민간인 학살의 주범인 백선엽은 일본 야스쿠니로 가라”고 주장했다. 반대편 인도에 모인 대한민국재향군인회는 “백 장군이 동족에게 해악을 끼쳤다는 실체가 없는데 구국의 영웅을 욕되게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직면하게 되는 죽음에 대해 우리 조상들은 애도를 중시하고, 장례 이전에 공과를 따지는 행위는 삼가는 모습을 보여왔다. 하지만 백 장군의 장례 모습은 조상들의 예를 무색케했다. 한 사람의 마지막 가는 길이 이렇게까지 얼룩진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 15일 대전시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에 백선엽 장군 운구차량이 들어오는 순간 일부 시민단체 회원들이 도로에 뛰어들자 경찰이 제지하고 있다. 대전=연합뉴스
◆관용적 시선 사라지고 갈등만 남아

‘6.25 전쟁영웅’과 ‘친일파’.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등 한국 근현대사의 한복판에 있었던 백 장군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1920년 11월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태어난 백 장군은 1940년 만주 봉천군관학교에 입교, 간도특설대에서 활동했다. 정부가 2009년 그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한 이유다. 1950년 6월 6.25 전쟁이 발발하자 그해 8월 제1사단을 이끌고 다부동 전투를 포함한 낙동강 방어전에서 공을 세웠고, 10월 평양에 가장 먼저 입성했다. 빛과 그림자가 분명했던 삶인 셈이다.

김홍걸 민주당 의원은 지난 5월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친일파 군인들의 죄상은 일제강점기에 끝난 것이 아니고 한국전쟁 중 양민학살이나 군사독재에 협력한 것도 있어 전쟁 때 세운 전공만으로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민주당에서는 “현충원에 안장된 친일파 인사의 묘를 파묘해야 한다”는 국립묘지법 개정안이 발의됐다. 일부 단체들도 동조하고 있다.

반면 예비역장성 단체인 성우회는 “장군은 6.25 전쟁 구국의 영웅이자, 전쟁 후에는 호국의 영웅”이라며 “오늘의 국군과 한미동맹의 기틀을 다졌고, 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위대한 삶을 사신 영웅”이라고 밝혔다. 미래통합당은 “살아있는 6·25 전쟁 영웅, 살아있는 전설, 역대 주한미군 사령관들이 가장 존경하는 군인”이라고 주장했다.

공인의 일생에 대한 논란은 자연스런 일이다. 다만 한쪽에서는 과오나 흠결에만 초점을 맞추고, 다른 한쪽에서는 미화나 칭송에 집중하는 추세가 강해진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일종의 세력 싸움 양상마저 보인다.
지난 15일 오전 대전시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에서 경찰이 신고하지 않은 한 보수 단체의 스피커를 철거하고 있다. 대전=연합뉴스
이같은 경향은 고인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6.25 전쟁 당시 군 수뇌부의 공로와 과오가 혼재된 것은 백 장군뿐만이 아니다. 

6.25 전쟁을 포함, 1950년대 한국군을 이끈 장군들 중 ‘대한민국 군번 1번’ 이형근, 박정희 정부 시절 국무총리를 지낸 정일권, 6.25 전쟁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채병덕, 전쟁 초기 춘천 전투에서 선전했던 김종오, 초대 해병대사령관 신현준과 2대 사령관 김석범, 흥남 철수 당시 민간인 피난을 도왔던 김백일 등은 일본 육사나 만주국군 군사학교를 졸업하고 복무했다. 대한민국 수호에 큰 공을 세웠지만, 친일 논란도 있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이들의 공과를 평가하는 목소리는 찾아보기 힘들다. 6.25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군인도, 친일 행적이 있는 군인도 백 장군 단 한 사람인 것처럼 다뤄진다. 

지난 15일 오전 대전현충원에서 열린 백선엽 장군 안장식에서 고인의 영정이 장군 3묘역에 도착하고 있다. 대전=연합뉴스
이러다 보니 “낙동강 전선을 백선엽 혼자 지켰냐”며 다부동 전투 공적에 이의를 제기하는 목소리까지 나온다.

지나친 세력 대결과 타인의 주장을 배척하는 태도가 고인에 대한 객관적 평가와 명예를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가 높아지는 대목이다. 

◆합리적이고 실체적인 평가 필요하다

백 장군에 대한 논란을 두고 일각에서는 “시간을 두고 실체를 확인, 평가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합리적인 시각에서 공과 과를 함께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백 장군의 일생은 빛과 그림자가 뚜렷하다. 6.25 전쟁 영웅이지만 간도특설대, 선인학원 사태 등의 논란도 있다. 그의 공과 과를 놓고 갈등과 대립이 심하다.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철저히 검증해 사후 평가를 내려야 하는 이유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적 갈등과 국론 분열이 심해질 수 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정부 차원에서 시도해야 할 일이다. 공동체 통합과 국가적 분열 방지는 정부의 으뜸가는 책무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앙리 필리프 페탱(왼쪽)이 1940년 4월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를 만나 악수를 나누고 있다. 위키피디아
프랑스에서 벌어진 앙리 필리프 페탱에 대한 논란은 우리에게 하나의 시사점을 던진다.

프랑스 근현대사에서 페탱은 논란이 그치지 않는 인물이다. 페탱은 1차대전이 한창이던 1916년 베르덩에서 10개월간 벌어진 전투를 지휘, 독일군을 격퇴했다. 페탱의 전공은 연합군이 1차대전에서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전후 ‘프랑스의 원수’로 불렸을 정도다.

하지만 2차대전 발발 직후인 1940년 5월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당하자 나치에 협력하는 비시 정권을 세워 레지스탕스를 탄압하고 유대인들을 강제수용소로 보냈다. 1945년 전범재판에서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이후 종신형으로 감형돼 복역 중 1951년 9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제1차 세계대전 승전 100주년을 앞둔 2018년 11월 8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프랑스를 승리로 이끈 장군들을 추모하는 것은 옳다”면서 페탱에 대해 “그가 위대한 군인이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1차대전과는 반대로 2차대전 때에는 재앙 같은 선택을 했다”며 페탱에게 공과 과가 모두 있다고 말했다. 

백선엽 장군의 국립대전현충원 안장식이 열린 지난 15일 국립대전현충원 정문에서 안장식 찬반을 놓고 시민단체와 보수단체가 언쟁을 벌이고 있다. 대전=뉴시스
당시 프랑스 정부는 1차대전에서 프랑스군을 이끈 장군들을 추모하는 행사를 파리 앵발리드에서 진행키로 하고 명단에 페탱을 포함했다. 이같은 상황에서 마크롱의 발언이 나오자 프랑스 유대계와 야권은 크게 반발했다.

이에 마크롱은 “나는 우리 역사의 어떤 페이지도 감추지 않는다. 정치인의 삶과 인간 본성 등은 때로는 우리가 믿고 싶은 것보다 더 복잡하다”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끈 군인을 기리는 것은 당연하다. 나는 누구도 용서하지 않지만, 누구도 역사에서 지우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프랑스 정부도 “샤를 드골도 페탱이 베르덩에서 세운 공에 대해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며 진화에 나섰다. 그러나 논란이 그치지 않자 프랑스 정부는 결국 추모 대상에서 페탱을 제외했다. 

비록 실패했으나 마크롱은 “페탱은 공과 과가 함께 있다”는 태도로 과거사 논란이 더 큰 사회적 갈등과 국가적 분열로 번질 위험을 막고자 했다. 
지난 15일 오전 대전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에 故 백선엽 장군의 운구차량이 진입하자 안장을 반대하는 단체 회원들이 운구차량 진입 저지를 시도, 경찰이 제지하고 있다. 뉴스1
우리나라는 어떨까. 백 장군 별세 직후 안장식이 치러지기까지 “전쟁영웅이다” “친일파다”라며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고, 미화와 비판이 이어졌다. 반면 공과 과를 아우르는 합리적인 태도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국론 분열을 막고 공동체 통합을 유지하려는 노력은 정부에서도 정치권에서도 눈에 띄지 않았다.

인물에 대한 평가는 해석과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다만 무조건적인 비난이나 미화는 공동체 통합을 위협하는 요소다. 서로 다른 평가와 해석을 존중하면서 국론의 분열을 막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고인에 대한 철저한 사실 검증과 평가, 합리적 논쟁, 통합적 시각이 필요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비난도 미화도 아닌 진실이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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