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문 대통령에게 부족한 것

고현곤 2020. 7. 21. 00:43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잘못했다 말하고, 소통하겠다'
3년전 취임사에서 약속했으나
소탈 이미지 달리 사과·소통 부족
존경받는 대통령 기회 자꾸 놓쳐
고현곤 제작총괄 겸 논설실장

2017년 5월, 문재인 대통령 취임사는 지금 봐도 명문(名文)이다. 탄핵으로 어수선한 나라를 바로잡고, 국민을 섬기겠다는 충심이 곳곳에 녹아있다. 진보·보수 막론하고, 대권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꼭 참조할 만하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문구가 특히 유명해졌다. 보수 쪽에선 조국·윤미향 사태를 겪으면서 ‘정말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가 되고 있다’고 개탄한다. 하지만 조롱만 할 건 아니다. 취임사에서 국가와 국민을 향한 열정을 담아 충분히 언급할 수 있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또 하나 유명한 문구가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다. 불평등과 불공정, 불의가 여전한 세상에 사는 국민으로선 코끝이 찡할 정도로 감동적이다. 이밖에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 ‘나라를 나라답게 만들겠다’ 등 대통령의 초심이 묻어나는 메시지가 가득 차 있다. 그 뒤 국정이 초심과 다르게 흘러간 경우가 적지 않았지만, 탓하고 싶지 않다. 취임사에서 꿈꾼 나라가 임기 5년 안에 뚝딱 만들어지기는 어렵다. 아무리 애를 써도 당장 안되는 부분이 있다. 그래서 탓하고 싶지 않다.

찜찜한 대목은 취임사 맨 뒤쪽이다. ‘잘못한 일은 잘못했다고 말씀드리겠다. 군림하지 않고, 소통하는 대통령이 되겠다.’ 이 건 ‘평등·공정·정의’ 같은 국정 목표가 아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한 실행 방안이다. 대통령이 의지만 있으면 바로 실천할 수 있다. 문 대통령은 소탈하고, 서민적인 막걸리 이미지다. 전임 박근혜 대통령의 구중궁궐 공주 행태에 질린 국민은 큰 기대를 했다. 그런데 문 대통령은 그 좋은 이미지를 살리지 못하고 있다. 취임사와 달리 잘못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다. 잘 소통하지도 않는 것 같다. 대통령뿐 아니라 이 정권 사람들은 사과와 소통 대신에 전 정권 탓, 야당 탓, 재벌 탓, 언론 탓을 한다. 올해는 코로나 탓을 추가했다.

대통령은 지난주 국회에서 “부동산 투기로 더 이상 돈 벌 수 없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부동산 때문에 낙담한 국민 입장에선 뭔가 허전하다. 이 정부 부동산 대책이 22차례나 실패했다. 대한민국이 집 있는 자와 집 없는 자로 쪼개졌다. 대통령은 이 말을 했어야 했다. ‘집값 안정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으나 결과가 좋지 않아 송구스럽다.’ 대통령은 상처받은 국민을 위로할 작은 기회를 놓쳤다.

노무현 정부 홍보수석을 지낸 조기숙 이화여대 교수가 “문재인 정부 부동산 정책은 실패했다”고 비판했다가 친문(親文)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대통령이 ‘조 교수는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얘기했다. 무분별한 공격을 자제해달라’고 했으면 어땠을까. 넉넉한 인품을 드러낼 작은 기회를 놓쳤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죽음과 관련해 진보진영에서 피해자를 공격하는 막말이 쏟아졌다. 청와대는 “드릴 말씀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지금까지 대통령이 한 말은 “박 시장과 오랜 인연인데, 사망 소식이 너무 충격적”이 전부다. 피해자에겐 단 한마디가 없다. 페미니스트를 자처해온 대통령이 직접 나서 2차 가해를 막고, 피해자를 위로했어야 했다. 페미니스트라는 말은 더는 안 하는 게 좋겠다. 대통령은 내 편만 감싼다는 세간의 오해(?)를 풀 작은 기회를 놓쳤다.

인천국제공항공사 정규직화 대응도 아쉽다. 여권에서 ‘정규직화를 하지 말라는 거냐’고 발끈하는 건 사태의 본질을 흐릴 뿐이다. 밥 태운 걸 걱정하는데, ‘밥 짓지 말라는 거냐’고 대꾸하는 식이다. “가짜뉴스가 (청년 분노를) 촉발했다”는 청와대 해명 또한 옹색하다. 대통령이 이렇게 설명했으면 될 일이었다. ‘비정규직을 돕기 위해 정규직화를 추진했다. 정의로운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청년들의 마음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대통령은 평등·공정·정의를 위해 고뇌하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작은 기회를 놓쳤다.

단국대에 대통령 비판 대자보를 붙인 청년이 지난달 1심에서 50만원 벌금형을 받았다. 단국대 측에서 처벌을 원치 않는데도 경찰이 ‘건조물 침입’이라고 밀어붙였다. 군사독재 시절에나 있던 일이다. 대통령이 모른 척하지 말고, ‘국민 한분 한분의 의견은 소중하다. 대자보를 문제 삼는 건 과했다’고 했으면 어땠을까. 지난주 대통령에게 신발을 던진 남성에 대해 툴툴 털고, 관용을 베풀었으면 어땠을까. 탁현민 류의 느끼한 이벤트보다 훨씬 감동적이었을 것이다. 대통령은 국민 모두의 지도자에 한걸음 다가갈 작은 기회를 놓쳤다.

복잡다단한 국정을 운영하다 보면 잘못할 수도 있다. 열심히 했는데, 결과가 나쁠 수도 있다. 취임사의 다짐처럼 잘못한 건 사과하고, 소통하며 바로 잡으면 된다. 그런다고 책임지는 것도, 스타일을 구기는 것도 아니다. 문 대통령은 천주교 신자다. 천주교에선 미사 때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내 큰 탓이로소이다’라고 고해한다. 세상의 허물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마음의 평화를 희구한다. 문 대통령의 시간이 1년9개월 남짓 남았다. 친문의 보스가 아닌 국민 모두의 존경받는 대통령으로 기억되기를 원한다면, 시간이 많이 남은 건 아니다.

고현곤 제작총괄 겸 논설실장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