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미투 1호'의 선택적 분노

박국희 사회부 기자 입력 2020. 7. 21.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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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국희 사회부 기자

한국 사회에서 가장 남성 중심적인 조직으로 꼽히는 검찰에서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운동의 횃불을 치켜들며 여성 인권에 대해 목소리를 높인 용감한 인물이 서지현 검사다. 조직 내 반감을 무릅쓰고 상관 성추행을 폭로했고, 이후 여성 인권과 성범죄에 대해 줄기차게 목소리를 내왔다. 공소장으로만 발언한다는 검사치고는 이례적 활동이었다.

작년 3월 가수 정준영 등의 집단 성폭행 사건이 터지자 그는 "진보란 무엇인가. 강자들이 힘으로 약자들을 억압하는 것을 끊어내자는 것 아닌가. 이건 페미니즘도 과격주의도 아니다. 그저 범죄자를 처벌하자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난 3월 '올해의 여성운동상'을 받은 자리에선 "저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미투가 번져 나가는 세상이 아니라 미투가 없어지는 세상에서 사는 것입니다"라고도 했다.

올 1월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서 검사를 양성평등정책 특별자문관으로 파격 임명했다. 지난 3월에는 'n번방' 성 착취 사건 대응을 위한 TF(태스크포스) 대외협력팀장도 맡겼다. 서 검사는 이달 초 아동 성 착취물 사이트 운영자 손정우에 대해 재판부가 미국 송환 불허 결정을 내리자 "권위적인 개소리"라고 일갈했다. 이례적 활동이 이어지자 그에겐 "혹시 정치하려고 저러는 것 아니냐"는 의문이 끊이지 않았다. 그게 억울했던지 그는 지난해 기자회견에서 "정치할 생각 없다. 왜 피해자가 이런 2차 가해를 당해야 하느냐"고 했다.

그런데 그는 박원순 전 서울시장 사건을 앞에 놓곤 침묵했다. 지난 4월 오거돈 전 부산시장 성추행 사건 때도, 그 전 안희정 전 충남지사 사건 때도 별다른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최근 서 검사의 페이스북에는 추 장관 기사들을 올려놓고 '추(秋)비어천가'를 늘어놓은 게시글만 눈에 띄었을 뿐이다.

공교롭게도 박 전 시장 피해자 변호인은 서 검사 성추행 사건 변호를 맡았던 김재련 변호사다. 2년 전 서 검사를 지지했던 많은 여성 단체가 한목소리로 이번 사건의 진상 규명을 요구했고, 20대 여성 79%가 "진상 조사가 필요하다"고 여론조사에서 답했다. 사람들은 서 검사가 2차 가해를 당하고 있는 박 전 시장 피해자를 누구보다 잘 이해할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그는 평소처럼 이 문제에 대해서도 나서 달라는 요구에 "공황장애가 도졌다"며 병가를 냈다.

서 검사를 양성평등정책 자문관으로 임명한 추 장관은 "부동산 도박 광풍에 법무부 장관이 침묵하는 것은 직무유기"라며 정치권에 훈수를 두면서도 정작 인권 수호의 주무 장관으로서 박 전 시장 피해자에겐 침묵하며 직무를 유기했다. '페미니스트'를 자처한 문재인 대통령부터가 한마디를 하지 않았다. 이들에게는 '미투 운동'의 판단 기준도 정치적 견해나 진영 논리에 따라 달라지는 것인가. 그렇다면 여성을 비롯한 약자 인권을 따질 자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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