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책사업 유치의 역설..' 솔섬도, 백사장도, 주민도 사라졌다

박수혁 2020. 7. 21.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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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삼척시 원덕읍에 있는 솔섬 풍경. 2007년 사진작가 마이클 케나가 찍은 사진으로 유명해진 솔섬은 이후 사진가와 삼척 관광객들의 필수 코스가 됐다. 하지만 솔섬 뒤로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엘엔지 생산기지 저장탱크가 들어선 뒤로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이 됐다. 엘엔지 생산기지가 들어서기 전(사진 위)과 후의 솔섬 모습. 사진가 박태수씨 제공

“유치 당시만 해도 원덕읍에 사는 게 로또 맞은 거라 생각했습니다. 취업도 되고, 장사도… 모두 잘될 줄만 알았죠. 6조7824억원을 투자한 국책사업 유치 결과가 이럴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사는 민병극(56)씨는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2008년 7월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다. 원덕읍내뿐 아니라 삼척시내 곳곳에 ‘액화천연가스 생산기지 확정’을 축하하는 펼침막 1천여개가 시가지를 뒤덮었다. 마을은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변변한 기반시설도 없는 작은 어촌마을인 삼척 원덕읍은 경북 포항, 충남 보령 등과 1년 넘게 경쟁을 벌인 끝에 2조7581억원이 투입되는 액화천연가스(LNG) 생산기지 유치에 성공했다. 2017년 완공된 엘엔지 생산기지는 축구장 면적(7140㎡)의 137배에 이르는 98만㎡ 터에 세계 최초이자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27만㎘급 등 12개의 엘엔지 저장탱크를 갖췄다. 5개월 뒤엔 258만㎡ 터에 4조243억원을 들여 발전소 단지를 건설하는 삼척종합발전단지 유치에 성공했다. 2017년까지 2044㎿ 규모의 유연탄 발전소 2기가 건설됐고, 발전소 2기가 추가로 들어설 예정이다.

2008년 7월 원덕읍내뿐 아니라 삼척시내 곳곳에 ‘액화천연가스 생산기지 유치’를 축하하는 펼침막 1천여개가 시가지를 뒤덮었다. 삼척시 제공

■ 보존됐다지만…잊힌 솔섬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첫번째 시련은 ‘솔섬’의 훼손이었다. 주민들이 ‘속섬’으로 부르는 솔섬은 월천리 앞 호산천과 동해가 만나는 곳에 형성된 작은 섬이다. 2007년 영국 출신 세계적인 사진작가 마이클 케나가 찍은 사진으로 유명해졌다. 이후 솔섬은 삼척을 찾는 관광객들의 필수 코스가 됐다. 2011년 대한항공이 공모전에서 입상한 솔섬 사진을 광고에 사용하면서 세계적으로도 이름을 날렸다.

그런데 솔섬 인근에 액화천연가스 생산기지가 들어서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솔섬도 엘엔지 생산기지 건설로 한때 사라질 위기까지 내몰렸다. 사람들의 반대가 줄을 잇자 다행히 삼척시가 솔섬 보존을 선언하면서 훼손 위기에서 가까스로 벗어났다.

하지만 솔섬은 이제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이 됐다. 솔섬 뒤로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저장탱크가 들어섰기 때문이다. 10여년 동안 다양한 솔섬의 모습을 찍어왔다는 사진가 박태수(67)씨는 “엘엔지 생산기지의 저장탱크가 무자비하게 들어선 솔섬을 보고 있으면 불안하고 불편하다. 차라리 눈을 감아 피하고 싶다”고 말했다.

엘엔지 생산기지 공사 탓에 해안침식이 시작돼 백사장이 몽땅 사라진 월천해변 모습. 삼척시 제공

■ 백사장이 몽땅 사라졌다 엘엔지 생산기지 인근 월천해변은 엘엔지 생산기지 공사가 본격화된 2011년부터 해안침식이 시작돼 결국 백사장이 몽땅 사라졌다. 이 탓에 월천해변 인근에서 민박과 식당, 어업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잃었다.

주민들은 엘엔지 생산기지에 의혹의 눈길을 보냈지만 증거가 없었다. 그러다 해안침식 6년 만인 2017년 감사원 감사를 통해 월천해변의 해안침식이 ‘엘엔지 생산기지 건설 탓’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사업자의 졸속 환경영향평가 보고서 작성과 해양수산부와 환경부의 부실 검증이 겹쳐 빚어진 훼손이었다.

현재 월천해변은 급속한 해안침식으로 해안도로와 해안옹벽이 붕괴됐을 뿐 아니라 월파(바닷물이 방파제나 방조제를 넘는 현상) 등으로 주민들이 사는 주택까지 위협받고 있다. 월천해변의 해안침식은 ‘심각’ 단계인 D등급이다. 결국 원인을 제공한 한국가스공사가 200억원을 들여 복구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김경식 월천3리 이장은 “월천해변은 아름다운 백사장 덕분에 피서철에는 자리가 없어서 텐트를 치지 못할 정도였다. 지금은 백사장뿐 아니라 동네 전체가 날아갔다. 민박과 식당, 가게 등을 하는 주민들도 다들 문을 닫고 떠났다”고 말했다.

국책사업 유치 이후 환경오염 등으로 인한 고통이 이어지자 주민들이 대책위원회를 꾸려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나섰다. 국책사업피해보상대책위원회 제공

■ “발전소만 남은 유령도시” 한숨만 화력발전소 2기가 가동 중인 종합발전단지 인근 주민들의 고통도 계속되고 있다. 옥원리에 사는 주민 이춘자(67)씨는 지난 3년이 악몽과 같다. 끊임없는 먼지와 소음, 악취 탓이다. 하루만 안 치워도 새까만 먼지가 집 안 곳곳에 쌓인다. 집 청소를 해보면 걸레에 탄가루가 가득하다. 수시로 날아오는 탄가루 탓에 빨래조차 밖에 널지 못한다. 매캐한 냄새도 그를 힘들게 한다. 이씨는 “목숨이 첫째인데, 발전단지가 들어선 뒤론 점차 건강이 나빠지는 게 느껴진다. 12년 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도시락을 싸 들고 다니면서 유치 신청을 막고 싶다”고 말했다.

인구유입과 지역발전을 기대했던 상인들은 절망하고 있다. 옥원리 주민 임문길(67)씨는 국책사업 유치로 인구가 유입되고 경제가 활성화될 것이라는 기대에 발전단지 인근에 식당을 차리고 원룸까지 지었다. 하지만 공사기간 반짝 재미를 봤을 뿐이다. 임씨는 “직원 대부분이 발전단지 안에서 식사하고, 일과 시간 뒤엔 40㎞ 정도 떨어진 삼척시내로 퇴근해 원덕읍은 커다란 발전소만 남은 유령도시로 변한다. 지역발전이 거꾸로 가고 있다”고 날을 세웠다.

주민들은 원덕읍에 대형 국책사업이 2건이나 유치됐지만 환경오염에 따른 삶의 질 저하와 인구 감소 등 피해만 이어져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요구하고 있다. 원덕읍 인구는 유치 당시인 2008년 5471명(12월 현재)에서 5071명(2020년 5월 현재)으로 오히려 400명이나 줄었다. 참다못한 주민들은 대책위원회를 꾸렸다.

민동선 국책사업피해보상대책위원장은 “고용창출을 기대했지만 배운 것이 없는 주민들에겐 취업 문턱이 하늘만큼 높다. 살던 곳에서 쫓겨나 기껏해야 경비나 청소 등의 일거리에 만족해야 한다. 부모·형제간에도 쥐꼬리만한 보상금과 지원금 때문에 서로 소송하느라 마을이 두 쪽이 났다”며 대책 마련을 호소했다.

박수혁 기자 p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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