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민의 사이언스 빌리지] 플라스틱이 상아 대체했지만 코끼리를 구하지는 못했어

입력 2020. 7. 22. 14:3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김병민 과학저술가

지금은 당구공 제조에 독점이 깨져 여러 업체가 만듭니다. 하지만 지난 80여년간은 벨기에의 한 기업이 독점 생산했습니다. 그 벨기에 업체는 여전히 80%가 넘는 시장을 점유하고 있습니다.

그리 복잡해 보일 것 없는 당구공이지만 의외로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해야 합니다. 약 40만회의 타격과 5t의 하중을 견디는 내구성이 갖춰져야 합니다. 탄성은 필수고 변형되지 않는 완전한 구형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만큼 까다로운 제조 공정은 기업의 일급 기밀로 유지되고 있죠.

심지어 당구공이 타격될 때 공의 속도는 시속 30㎞입니다. 당구대 표면과 순간 마찰열은 섭씨 250도까지 올라가기 때문에 내열성도 필요합니다. 당구공의 주요 재질은 이미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첨가되는 물질과 수십 단계에 이르는 제조 과정은 그야말로 업계의 극비 사항입니다.

당구는 기원전 400년경 그리스에서 시작됐습니다. 현대식 당구는 14세기경 영국과 프랑스에서 즐기던 크리켓 놀이의 변형이라고 합니다. 현재 세계의 당구 동호인 수를 가늠하기란 힘듭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만 해도 당구는 남녀노소 불문하고 즐기는 스포츠입니다. 짐작컨대 당구공의 수요는 예나 지금이나 꽤 많았을 겁니다.

현재 사용하는 당구공의 주성분은 페놀수지입니다. 페놀수지는 플라스틱의 한 종류입니다. 초기 당구공은 나무나 돌로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이들 재료는 당구공 특성에 적합하지 않죠. 그렇다면 플라스틱이 존재하지 않던 시절 당구공은 무엇으로 만들었을까요? 상아가 당구공의 까다로운 조건을 만족하는 재료였습니다. 코끼리의 위턱에 있는 송곳니가 바로 상아입니다.

상아는 특별한 성질 덕에 당구공뿐 아니라 담배 파이프나 피아노 건반, 빗의 재료로도 사용됐습니다. 어찌 보면 일종의 사치품이죠. 제국주의 시대 유럽 귀족들의 욕망을 채우던 재료는 상아였습니다. 이들에게 상아를 공급할 수 있는 지역은 쉽게 추측됩니다. 바로 아프리카 식민지였죠.

현재 아프리카 서부 기니만 북쪽 연안에 코트디부아르(Cote d'Ivoire) 공화국이 있습니다. 북쪽으로 말리, 동쪽으로 가나, 서쪽으로 기니와 국경을 접하고 있죠. 프랑스어 국명인 코트디부아르는 '상아 해안'이라는 뜻입니다. 15세기 후반부터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인 이곳 해안을 중심으로 상아 수탈에 나섭니다. 얼마나 많은 코끼리가 희생됐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19세기에 당구공이 상아로 만들어지면서 그 수요는 급증했을 겁니다.

인간의 그칠 줄 모르는 욕망은 생태계 진화에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멸종 위기에서 차라리 상아가 없는 게 진화적 강점으로 작용하면서 상아가 없는 코끼리들이 나타날 정도였으니까요. 물론 인류도 위기의식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생태계 위기라는 인식보다 상아에 대한 수요와 공급 사슬에서 위기감이 더 컸을 겁니다.

19세기 중엽 미국 당구용품 제조업체 사장 마이클 펠란은 상아 대체 물질을 만들어내는 사람에게 상금으로 1만달러나 주겠다고 신문에 광고합니다. 미국 뉴욕의 인쇄공이던 존 웨슬리 하이엇은 석탄에서 뽑아낸 열가소성 물질로 상아와 유사한 물질을 만듭니다. '셀룰로이드(식물 세포벽의 기본 성분인 셀룰로스와 유사한 물질이라는 뜻)'로 명명된 최초의 천연수지, 다시 말해 플라스틱이 등장한 거죠.

하이엇이 신소재를 처음 발명한 것은 아닙니다. 시초는 1855년 영국의 알렉산더 파크스가 면화에 질산을 넣어 개발한 '파케신'이죠. 하이엇이 이 제조 기술을 개량해 셀룰로이드 생산에 성공한 겁니다. 하지만 그는 펠란이 제시한 상금을 받지 못합니다. 셀룰로이드로 상아 당구공을 완전히 대체하긴 어려웠죠. 주성분인 나이트로셀룰로스의 성질 때문입니다.

폭약의 재료이기도 한 나이트로셀룰로스는 잘 깨지고 잘 폭발해 당구공 재료로 쓰기에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셀룰로이드 덕에 서민들도 상아 느낌이 나는 물건을 저렴한 가격으로 살 수 있게 됩니다. 플라스틱에 내재된 철학 가운데 하나가 물질 소비의 보편화입니다. 플라스틱 덕에 빈부 격차와 무관하게 소비의 민주화를 이루게 됐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당구공의 주성분인 페놀수지는 언제 등장했을까요? 석탄산(페놀)과 포르말린(폼알데하이드 수용액)을 섞어 가열하면 수지 물질이 나옵니다. 1872년 독일의 화학자 아돌프 폰 베이어가 이를 발견해 발표합니다. 하지만 당시 특별한 물질의 재료가 되기에는 부족했습니다. 관심받지 못한 그의 논문은 30여년 동안 잠들게 됩니다.

그러던 중 1906년 미국의 화학자이자 사업가 리오 헨드릭 베이클랜드가 잠들어 있던 폰 베이어의 논문을 찾아냅니다. 그리고 폼알데하이드와 페놀의 반응 방법을 개선합니다. 이렇게 해서 생산된 물질에 자기 이름을 붙여 '베이클라이트'라는 상품으로 판매합니다. 이것이 최초의 인공 합성수지인 플라스틱입니다.

미국의 존 웨슬리 하이엇 당구용 상아 대체 물질로 셀룰로이드 개발 성공
완벽한 물질 대체에도 부의 상징된 상아 위한 잔인한 코끼리 사냥 계속
현재 당구공 주성분인 페놀수지 20세기 상용화
일회용품과 화석연료로 지구의 몸살만 심해져

화석 원료는 자연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이 선물로 다양한 물질을 만들어 사용합니다. 석탄으로 만든 페놀수지부터 시작해 1937년 네오플랜과 나일론이 등장하고 석유가 활용되기 시작합니다. 석유화학공업으로 만들어진 만능물질과 에너지 덕에 평범한 사람들도 자연 훼손 없이 양질의 물질을 사용할 수 있는 물질의 민주화가 이뤄졌습니다.

인류의 이기심이나 이득에 희생된 자연은 코끼리 말고도 숱하게 많습니다. 그리고 과학이 자연을 구한 이야기도 듣게 되죠. 천연 보랏빛 염료를 얻기 위해 고둥 1만2000마리를 죽여 얻은 양은 고작 1㎎입니다. 밤을 밝히는 등불 기름은 포획한 향유고래의 뇌에서 뽑아냈죠. 미국의 소설가 허먼 멜빌이 쓴 '모비 딕'은 당시 고래 남획을 다룬 이야기입니다.

이 외에도 많은 자연이 인류의 욕망을 위해 희생됩니다. 과학으로 물질이 만들어지고 과학 문명은 자연 생태계를 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겉으로만 그렇게 보이는 건 아닐까요? 상아가 플라스틱으로 대체됐지만 코끼리는 전과 달리 평화롭게 아프리카 초원을 누비며 살지 못합니다.

첨단 문명의 시대, 가장 풍요로운 시대라는 지금도 동물의 신체가 인류의 탐욕과 부(富)의 상징으로 거래되고 있습니다. 지난 1월 MBC에서 코끼리 사냥을 다룬 다큐멘터리 '휴머니멀'이 방송됐습니다. 사냥꾼들이 총으로 코끼리에게 부상을 입힌 뒤 항거 불능 상태에 이르도록 전기톱으로 척추를 끊어버리더군요. 아직 살아 있는 코끼리의 머리를 통째로 잘라내고요. 상아를 뿌리까지 꺼내기 위해 그런답니다.

왜 우리와 함께 살아가야 할 생명이 여전히 고통받고 지구의 생물종은 계속 사라지는 걸까요. '인간은 탐욕의 세대가 바뀌었어도 그 잔인함에는 변함이 없다'라는 방송 자막이 기억납니다.

자연은 인류에게 커다란 선물을 줬습니다. 우리는 자연에 무엇을 돌려주고 있을까요? 돌이켜 보면 화석 원료는 역사상 가장 비싼 에너지입니다. 채굴에서부터 정제ㆍ생산에 이르기까지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죠. 산업혁명의 인프라는 이런 기반 위에서 설계됐습니다. 이를 수직 통합하고 운용할 글로벌 기업이 등장해 효율과 단기 이익만 추구하는 신자유주의 경제로 나아갔습니다.

지구의 미래를 위한 장기적 안목과 투자는 사라졌습니다. 지각의 탄소를 꺼내 연일 넘쳐나는 일회용품과 화석 연료로 대기와 자연에 쏟아내고 있습니다. 당구공처럼 생긴 지구는 몸살을 앓습니다. 기후변화에 따른 생태계 변형과 서식지 변화로 결국 바이러스까지 동물의 몸에서 인간에게 이동합니다. 그 탓에 인류는 현재 감염병으로 평등한 고통의 민주화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탄력성을 잃어버린 인류 사회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자연의 실험에 무력화되고 있습니다.

'뉴노멀'이라는 말이 회자되지만 누구도 새로운 표준을 제시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기존의 사회적 경험과 법칙들이 통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류가 당구공으로 자연을 구했다는 건 오만일지 모릅니다. 둥근 지구 위에서 자연과, 그 위의 다른 생명체들과 함께 당구공처럼 둥글게 살아왔는지 생각해야 할 시간입니다. 반복되는 역사 속에서 자연의 무수한 경고에도 우리가 무시하거나 놓치고 있는 건 과연 무엇일까요?

김병민 한림대학교 나노융합스쿨 겸임교수

Copyright ©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