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서울시 성추행 사전 징후 눈감았다면..이제는 사후 책임을 다해야 할 시간

편광현 입력 2020. 7. 23. 18:44 수정 2020. 7. 24. 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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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 없는 사고는 없다. 통계학에서 '하인리히 법칙'은 대형사고가 일어나기 전 수많은 사전 징후가 있다고 분석한다. 재해가 발생해 중상자 1명이 나왔다면 그 전에 같은 원인으로 발생한 경상자가 29명, 다칠 뻔한 잠재적 부상자가 300명이 더 있다고 본다.

서정협 서울시장 권한대행(행정1부시장). 뉴시스


하인리히 법칙은 재해는 물론 권력형 사고에도 적용된다. 서울시장이 성추행 혐의로 고소를 당한 '대형 사고'가 그렇다. 고소인 A씨를 돕는 여성단체는 기자회견 등을 통해 '박 시장 성추행 고소'가 있기 전 서울시 내부에 수많은 사전 징후가 있었다고 고발한다. 김재련 온세상법무법인 변호사는 "비서실에서 근무한 A씨는 4년간 서울시 직원 20명에게 피해 사실을 알렸지만 묵살당했다"고 했다. A씨는 서울시 인사담당자를 포함한 동료 직원들에게 박 시장으로부터 받은 '불편한 텔레그램 문자'와 '속옷 사진'을 보여주며 수차례 고충을 호소했다고 한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몰라서 그랬겠지" "네가 예뻐서 그랬겠지"였다. 수차례 부서 이동을 요구했을 때도 인사담당자는 어이없게도 "시장님의 허락을 받으라"고 했다.

서울시가 대책으로 내놓은 '민관합동조사단' 구성 방침은 그래서 와 닿지 않았다. 수많은 사전 징후를 놓친 서울시를 더는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성단체 역시 서울시의 조사단 구성 방침에 성추행 피해 사례를 추가 공개하며 맞섰다. '술 취한 척 뽀뽀하기' '바닥 짚는 척하며 다리 만지기' 노래방에서 허리 감기' 등이 서울시에 만연해 있었다고 폭로했다. "서울시는 조사 주체가 아닌 책임 주체"라는 여성단체 주장에 힘이 실리는 순간이었다. 결국 서울시는 조사단 구성을 포기하고 "피해자가 국가인권위원회 진정을 통해 조사를 의뢰하면 적극적 협조하겠다"고 꼬리를 내렸다.

아직도 일부에서는 "여성단체 측이 증거도 없이 감정적인 기자회견을 한다"고 비판한다. 한 서울시 산하 기관장은 "시장님은 사과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시장님을 파렴치한으로 몰고 가기 위해 영결식 날 기자회견을 했다"고 날을 세웠다. 하지만 피해자에 사과 한마디 없이 또 삶을 정리할 시간조차 갖지 않고 죽음으로 향한 건 가해자다. 피해자 A씨야말로 사과 한마디 듣지 못한 채 온갖 억측에 맞서며 현실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서울시 관련자들은 수사와 조사에 성실히 임해야 합니다." 1만자에 달하는 긴 기자회견문 중에서도 A씨 측의 요구는 명료했다. 23일 김재련 변호사는 "방조 정황이 있는 서울시 관계자 20명의 명단을 인권위에 넘길 예정"이라며 "서울시가 인권위 조사를 받게 된 것을 긍정적으로 본다"고 했다. 서울시는 물의를 일으킨 점을 사과하고 성실하게 조사받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서울시가 잃은 신뢰도 그래야 회복할 수 있다. 시간을 되돌려 드러났던 사전 징후를 해결할 수는 없겠지만, 이제는 사후 책임을 다해야 할 시간이다.

편광현 기자


편광현 기자 pyun.gwang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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