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데이 칼럼] 세상이 그리 만만한가

이훈범 2020. 7. 25.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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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은 아니면서 말만 그럴싸
집권세력 양두구육 인물 넘쳐
실상 드러나면 종말 오는 것
그것이 정의와 공정의 실현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대기자/중앙콘텐트랩
‘양두구육(羊頭狗肉)’이란 말이 있다. 겉은 번드레한데 내실은 없는 경우, 말만 그럴싸하고 행동은 아닌 경우를 일컫는다. 유래에 대해선 몇 가지 버전이 있다. 후한 광무제가 조서에서 도척을 예로 들며 양 머리를 걸어놓고 말고기를 판다고 비판한 데서 나왔다는 게 그중 하나다.

알다시피 도척은 인간의 간을 즐겨 씹었다는 도적 떼의 수괴다. 어느 날 부하가 “도둑에게도 도가 있느냐”고 묻자 도척은 ‘성용의지인(聖勇義知仁)’ 다섯 가지를 들었다. 어떤 집에 무슨 보화가 있을지 추측하는 게 ‘성’이고, 동료보다 먼저 담을 넘는 게 ‘용’이며, 맨 마지막에 탈출하는 게 ‘의’, 재화의 가치를 판단하는 능력이 ‘지’, 훔친 재화를 공평하게 나누는 게 ‘인’이라는 거였다. 이를 두고 광무제가 평생 패악질을 일삼은 도적이 공자의 말씀을 더럽힌다고 개탄한 것이다.

제나라 영공 버전도 있다. 영공은 궁녀들을 남장(男裝)시키고 감상하기를 즐겼다. 이런 독특한 성적 취향이 소문나면서 시중에 여인들의 남장이 대유행이 됐다. 놀란 영공이 궁중 외에는 남장하지 못하게 금령을 내렸지만 나라 전체에 남장 여인들이 넘쳐나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대책을 묻는 영공에게 재상 안영이 대답했다.

“왕께서는 궁중에서 남장을 시키시면서 백성들에게는 금하셨습니다. 이는 소머리를 걸어놓고 말고기를 파는 것과 다를 게 없습니다. 궁중에서 먼저 남장을 금하시면 궁 밖에서도 남장 여인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영공이 안영의 말을 따르자 과연 여인들의 남장 풍습이 사라졌다.

후에 소가 양이 되고 말이 개로 변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이 땅에 겉과 속이 다르고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게 문제다. 특히 집권세력이 그렇다. 어쩌다 진보가 돼 집권세력에 끼었거나 껴보겠다고 주위에서 얼쩡거리는 무리야 그렇다 쳐도, 오랜 세월 민주화 운동을 하고 시민단체에 몸을 담아왔던 사람들마저 그런 게 놀랍다.

선데이칼럼 7/25
이인영 통일장관 후보자부터 그렇다. 그는 인사청문회에서 “김일성에 충성맹세를 했었느냐”는 질문에 가타부타 대답을 못 하고 “기억나지 않는다”고만 했다. 이는 대한민국의 안보 차원에서 대단히 위험한 장면이지만, 이 글의 주제가 양두구육인 만큼 지적은 유보하겠다. 그가 주장한 대로 대한민국에는 사상의 자유가 있고, 사상 전향을 강요당해서도 안 되는 까닭이다.

하지만 논란이 되는 아들 문제는 다르다. 군 면제와 해외유학이 죄는 아니지만, 그 이유와 자금 출처에 의혹이 있다면 어물쩍 넘어갈 일이 아니다. 증명하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진료기록이나 예금기록 등 서류 몇 개면 단번에 의혹을 풀 수 있다. 그런데도 “아버지 입장” 운운하며 거부하고 말만 계속 바꾸는 건 정말 아니다. 의혹을 증폭시키는 행위일뿐더러 국민을 무시하는 태도다. 청문회 결과야 어떻든 장관에 임명될 테니 시간만 때우면 된다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추미애 법무장관의 경우는 여러모로 더 심하다. 그 역시 아들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군 복무중이던 아들의 휴가 미복귀 사실을 무마한 혐의를 받는다. “우리 엄마도 추미애면 좋겠다”는 같은 부대 선임병의 말까지 나왔는데, 눈을 치켜뜨며 ‘검언유착’으로만 몰고 있다. 자기 아들의 눈물엔 가슴이 찢어지면서, 남의 집 귀한 자식들의 분노는 눈 밑으로 깔아뭉갠다. 그게 그의 정의요 공정이다.

법무장관으로서 조국, 유재수, 송철호 등 자기편을 향한 수사를 가로막는 게 검찰 개혁이라고 부르짖더니, 이제 자기편이 망친 부동산 해법까지 거들고 있다. 마침 비게 된 자리를 향한 시선을 누구나 느끼는데 “투전판이 된 부동산에 법무장관이 팔짱을 끼고 있으면 직무유기”라는 군색한 논리를 들이댄다. 국민을 바보로 아는 게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이다.

부동산에 대한 집권세력의 태도는 양두구육의 전형이다. 자기들은 안 팔면서 국민한테는 세금을 퍼부으며 팔라고 강요한다. 자기들은 사정이 있어서 못 파는 거지만, 국민이 못 파는 이유는 무조건 투기다. 이것이 그들이 입만 열면 외치던 정의사회다.

박원순 시장 사건을 계기로 ‘미투’에 대한 그들의 본심도 드러났다. 성추행도 네 편이 하면 죽을 죄지만 내 편은 좀 해도 괜찮은 거였다. 내 편을 구하겠다고 너도나도 2차 가해 대열에 끼어들었다. 국민의 불편한 시선은 안중에도 없었다.

이 밖에도 백선엽, 위안부 할머니, 공중파, 사법부 문제 등 사례가 널렸지만, 지면이 허락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줄여야 할 듯하다. 세상이 그리 만만한가.

미국의 역사철학자 윌 듀런트는 역작 『문명 이야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국가는 금욕주의로 시작해서 쾌락주의 속에서 소멸된다. (...) 서막엔 아킬레스가 등장하지만 마지막은 에피쿠로스로 끝난다.”

영웅이 문을 열고 쾌락주의자가 종지부를 찍는다는 얘기다. 듀런트는 국가를 말했지만 이는 정권 단위로도 나뉜다. 영웅인 줄 알았는데 실상은 쾌락주의자였다는 게 드러난다면 종지부는 훨씬 빨라질 수도 있다. 그것이 내가 믿는 양두구육의 종말이요, 정의와 공정의 실현이다.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대기자/중앙콘텐트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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