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폭력 뒤 남은 것들..누군가는 말하고 기록해야 했다 [커버스토리]

전현진 기자 2020. 7. 2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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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동 그곳에 우리도 있었다..여성 서사로 풀어낸 보안법

[경향신문]

1987. 5. 26. 이화여자대학교 민주화 시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정태원

“예전에 한국에도 국가보안법이 있었잖아요….” 강곤 인권기록활동가(활동가)는 최근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출연자가 홍콩의 국가보안법을 언급한 것을 들었다. 국가보안법이 이제는 옛날이야기처럼 여겨진다는 뜻일까.

2004년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MBC <시사매거진2580>과의 대담에서 “정권을 반대하는 사람을 탄압하는 법으로 많이 쓰여 왔고 그 과정에서 엄청난 인권 탄압이 있었고, 그래서 한국의 부끄러운 역사의 일부분”이라며 “(국가보안법은) 낡은 유물”이라 했다. 국가보안법 폐지라는 화두를 권력자가 공론화해 찬반 논란이 거셌다. 16년이 지난 지금도 국가보안법은 사라지지 않았다. 진보를 자처하는 정치권에서도 잊힌 주제가 돼 가고 있다. 인권기록활동을 하는 강곤·박희정·유해정·이호연·홍세미 활동가와 정택용 사진가는 지난해부터 국가보안법 피해 여성 11명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이들에게 국가보안법은 영화 속에서나 나오는 과거의 망령이 아니었다. 여전히 기억과 현실에서 살아 있었다. 제5공화국 시절부터 간첩 조작과 공안 탄압이 여전했던 2010년대까지, 시대는 달랐지만 국가보안법의 위세는 한결같았다. 활동가 중 과거 국가보안법을 겪어낸 당사자도 있다.

국가보안법을 여성의 서사로 해석하고 풀어내려는 기획에 대해 ‘국가보안법과 여성의 서사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의문을 품는 이들도 없지 않았다. 활동가들은 “국가보안법이 주는 피해의 일상성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했다. 지난 10일부터 활동가들을 수차례 만났다. 8월 중순 출간 예정인 구술기록을 미리 참고했다.

정택용 사진가 제공

유해정·강곤·박희정·이호연·홍세미 인권기록활동가(활동가), 그리고 정택용 사진가는 지난 1년여 국가보안법 피해 여성들의 서사를 기록하기 위한 프로젝트 ‘여성서사로 본 국가보안법’의 구술기록을 담당하는 작가단으로 활동했다.

용산참사, 밀양송전탑, 세월호참사, 형제복지원, 화상 경험자…. 이들은 각종 참사를 겪은 사건 당사자들을 만나 이들의 구술을 듣고 사회적으로 의미 있게 재구성하며 기록하는 작업을 오랫동안 함께해왔다. 따로 또는 같이, 모였다 흩어지면서 써낸 단행본도 여럿이다. ‘작가단’의 일원으로 소개됐고, 늘 작가라는 호칭이 따라붙는다. 하지만 이들은 스스로를 ‘기록활동가’라고 정의한다. 각종 참사를 겪은 이들의 목소리를 기록하는 인권운동의 맥락에서 시작된 일이라서다.

그래서 여성들이 겪은 국가보안법의 이야기를 일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한 이번 작업은 문학보다는 기록에 가깝다. 건조한 사실관계의 나열이 아니라 인터뷰를 한 이의 삶과 고통에 초점을 맞춘다. 사회적 의미가 담긴 사건을 겪은 개인이 어떤 삶을 살았고 무슨 경험을 했는지를 담은 구술기록은 당사자들이 ‘사회적 말하기’를 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 이야기를 읽는 이들은 알지 못했던 개인과 사회의 일면을 듣는 귀를 갖는다. 1980년대부터 지금 현재까지 국가보안법을 겪은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재구성하면서 기록활동가들이 내내 견지한 방향이다.

■기억과의 싸움

홍세미 활동가와 인터뷰한 언론인 유숙열씨는 1980년 7월 경찰에 잡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았다. 고문기술자 이근안 등 경찰 수사관들은 얼굴에 수건을 덮고 물을 뿌려 숨을 쉬지 못하게 했다. 지명수배된 선배가 숨을 곳을 구해줬다는 이유에서였다.

“2018년 남영동 대공분실에 갔어요. ‘고문피해 실태조사’ 때문이었는데 거의 40년 만이었어요. 5층에 들어서는데 갑자기 가슴이 턱 막혔어요. 박종철 방은 내가 고문당했던 그 방하고 구조가 똑같았어요. 다 그대로 있어(눈물)…저는 잊고 살았다고 생각했어요. 살면서 한순간도 피해자이고 싶지도 않았어요. 그 일이 제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게 싫었어요. 거부했죠. 남영동을 잊고 살았어요. 그런데… 잊을 수가 없는 기억이었어요.”

유씨는 남영동에서 풀려난 뒤 미국에서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돌아와 기자생활을 했다. 과거의 기억과 맞서 투쟁했고, 여성학을 공부하면서 해방감을 얻었다. 1997년에는 다양한 분야에서 페미니즘 담론을 소개하는 계간지 ‘페미니스트저널 이프’를 만들었고, 지금도 저술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대한민국 페미니스트의 고백>에 나도 글을 실었어요. 그동안 밝히지 않았던 이야기를 처음으로 썼어요…이제 여자들이 말할 차례고 여자들이 말할 시대예요. 여자들의 말하기는 저항이고 투쟁이에요. 나도 그동안 고백, 발설하면서 그 힘으로 살아냈어요. 페미니즘이 말할 수 있게 해준 거였어요.”

70학번으로 1980년대 초 ‘학림사건’을 겪어낸 김은혜씨는 표정에 당당함이 묻어나는 여성 운동가다. 그는 반정부 투쟁을 하며 학창시절을 보내다 수배자로 도피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후엔 노동 현장을 지켜왔다.

산업선교회에서 활동한 남편은 1981년 8월 둘째 아이가 갓 돌이 지났을 때 체포됐다. 옥바라지뿐만 아니라 구명운동을 계속했다. 김씨는 남편이 집행유예로 풀려난 것이 “너무도 죄송하다”고 했다. 친구들과 후배들을 감옥에 두고 남편만 먼저 나왔다는 게 미안했다는 뜻이다.

이후엔 경기 부천을 중심으로 한국여성의전화, 생협, 경실련 등 시민운동을 해왔다. 생계를 위해서 보험이나 현미효소를 판매하는 영업도 했다. ‘이화여대까지 졸업해서 왜 이렇게 사느냐’며 타박하는 후배에게도 당당했다. “그런 말 하지마. 난 운동을 하고 싶어서 운동하고, 자식 먹여 살려야 하니 돈도 벌어야 해. 난 떳떳해. 하나도 창피하지 않고 당당해. 남한테 손 내밀지 않고 내가 노동해서 자식들 먹여 살리고, 내가 좋아하는 운동도 하잖아.”

이번 구술작업에서 촬영을 담당한 정택용 사진가의 카메라 앞에서 김씨는 앞니를 훤하게 드러내며 시원하게 웃어 보였다. 정 사진가는 “(김씨가) 그동안 보내온 생활도 딱 그 표정 같았을 거예요. 활동적이고 당당하고. 위축되는 것 없었어요. ‘아, 이런 분이니까 그 시절 그렇게 싸웠겠다, 어쩌면 그런 세월을 겪어 지금 이렇게 당당한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어요”라고 말했다.

■국가보안법과 여성의 존재

방북 후 수감된 임수경씨를 면회 온 여성이 1990년 8월1일 청주교도소 앞에서 손팻말을 들고 서 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박용수 제공

1985년 만들어진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소속 회원들도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민가협 회원 정순녀씨는 노동운동을 하던 딸과 동료들이 인천교도소에 수감되자 날마다 찾아가 시위를 벌였다. 교도소장은 “딸은 풀어줄 테니 조용히 집으로 가라”고 회유했다.

“막 소리를 질렀어. 잡혀온 여학생 일곱 명 다 풀어줘야 조용하지, 난 조용히 안 할 거라고 혔어. 내가 내 딸만 위해서 싸우는 게 아니여. 모두를 다 위하려고 온 거여. 그 딸은 누구고 이 딸은 누구냔 말이여? 다 풀어달라고 그랬더니 안 풀어주더라고. 내가 우리 딸 면회 가서 그랬어. ‘소장이 너만 풀어주고 다른 애들은 안 풀어준단다. 넌 거기서 싸우고 난 여기서 싸우자.’”

그의 생애는 민주화를 위해 싸운 투사이면서 억압받은 여성의 삶을 보여준다. 정씨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열세 살 때 한국전쟁을 겪었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열다섯 살에 서울로 와 돈벌이를 했다. 1960년 4·19혁명이 터졌을 때 종로2가에서 “이승만은 하야하라”고 외쳤던 자부심은 지금도 형형하다. 정씨의 구술을 듣고 정리한 홍세미 활동가는 원고가 완성됐을 때 정씨에게 직접 읽어주었다고 했다. 정씨는 “그렇지, 그랬었지”하며 맞장구를 쳤다.

이호연 활동가가 만난 김정숙씨(민가협 전 회장)도 적극적인 활동가다. “안기부에서 아무도 안 무서워하는데 민가협 엄마들은 무섭다고 소문이 났어. 103일 동안 낮에는 안기부에 항의 가고 밤에는 기독교회관에서 자면서 농성을 했거든요…안기부 앞에 쪼끄마한 슈퍼가 있더라고. 거기 어떤 남자가 있었는데 우리 어머니가 ‘너 안기부 직원이지? 네가 우리 아들 고문했지?’ 막 그러니까 ‘난 안기부 직원 아니어요, 아니어요’ 그러더라고. 점잖게 말해서 아닌 줄 알았어. 근데 나중에 보니까 안기부 직원인 거지. 어머니들이 와이셔츠가 찢어질 정도로 그놈을 잡고 항의를 했어요.”

김씨는 “민가협 어머니들이 많이 모일 때는 300명도 됐던 때가 있었어요. 지금은 12명이 남았어요. 활동하는 어머니들이 적어지는 게 당연하다고 나는 생각해요…민가협이 사라질 수 있다면 좋은 세상이 온 거 아니여?”라고 했다. 이 활동가는 김씨의 경험담을 들으며 “어떤 책의 이야기보다 분명하고 단단한 역사의식을 느꼈다”고 말했다.

■탈퇴서와 양심

유해정 활동가는 이번에 기록자이자 구술자로 참여했다. 대학 시절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감됐다가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풀려났다. 1997년 4월30일, 숙명여대 총학생회장이었던 유 활동가는 사복 경찰에게 체포돼 눈가리개를 씌운 채 차에 태워졌다. 도착한 곳은 남영동이었다. 2주 남짓 조사를 받고 재판정에 섰다. 선고를 앞두고 유 활동가는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탈퇴서’를 썼다.

“바보가 됐어요. 부끄러워서 사람들을 만날 수가 없는 거예요. 또 사람들을 만나도 입을 열 수가 없는 거예요. 자존감이 높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그것을 이야기하고 행하는 데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그런 내가 사라져버린 거예요.”

유 활동가는 이후 “겨우 숨만 쉬고 살다”가 인권운동사랑방 활동을 시작했다. “양심을 버리고, 신념을 버리고, 신의를 배반하며 산다는 게 이렇게 치욕적이구나. 제대로 숨조차 쉬어지지 않는 일이구나…결국 오늘 이렇게 말하게 된 건, 그래도 누군가는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그 시절 제 주변에 탈퇴서를 안 쓴 사람만큼 쓴 사람도 많았지만, 한총련 탈퇴서를 쓰고 다시 운동하는 사람들을 한 명도 못 봤어요…한때의 일, 과거의 일이라고 하기엔 여전히 내 안에 살아 있는 고통을, 대수롭지 않은 일로 치부하기엔 내 영혼에 너무 깊숙이 새겨진 상처를, 종이 각서 한 장이 사람의 인생에 어떤 폭력이자 야만이었는지를 누군가라도 말해야 하지 않을까?” 유 활동가가 이 작업에 기록자이면서 구술자로 참여하길 결심한 이유다.

유 활동가의 인터뷰는 강곤 활동가가 맡았다. 오랜 시간 알고 지냈지만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도 비슷한 시기에 학생운동을 하며 대학가를 휩쓴 한총련 탈퇴서의 광풍을 지켜봤다. 그는 이런 후기를 남겼다. “유해정은 ‘탈퇴서 이후’ 인권단체를 찾아가 인권활동가, 기록활동가 그리고 연구자로 살고 있다. 그사이 한 아이의 엄마도 되었다. 스스로는 ‘주어가 되지 못한 15년 동안의 삶’이라고 했지만, 그는 운동과 삶의 현장에서 결코 한번도 ‘탈퇴’하지 않았음을 동료로서 증언하고 싶다. 주제넘게도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할 수만 있다면 1997년으로 돌아가 20대 초반의 수많은 ‘유해정’들의 어깨를 토닥여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한총련 강제 탈퇴 논란은 1990년대 후반 대학에서 학생운동을 한 이들이라면 누구나 목격했을 법한 광경이었다. 유 활동가가 만나 구술 기록을 정리한 양은영씨도 1997년 수감생활을 했다. 1심에서 이미 징역 3년이 나왔고 항소심 중 한총련 탈퇴서 작성을 강요받았다.

“무엇을 잘못했는지조차 모르겠는데, 신념을 굽히고 반성을 해야 하나? 하지만 쓰면 나갈 수 있다고 하고, 진짜 그럴 것 같고, 감옥에 3년이나 있게 되면 어떡하나 두렵고…결국 버티고 안 쓰긴 했는데 그 과정이 너무 힘들었어요.”

양씨도 출소 이후 구치소 안에서 겪은 내면의 갈등 극복을 위해 노력하다 학생운동을 정리하고 사회운동에 뛰어들었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활동이 좌절되는 시련을 겪었다. 출산을 하며 이른바 ‘경력단절 여성’이 됐다. 학생운동을 하며 만난 남편이 사회운동으로 자리를 잡아가던 시간이 양씨에겐 설 자리와 함께 자존감마저 쪼그라들던 시간이었다.

“한번은 시민사회단체에 면접을 보러 갔는데 제 이력을 보고, 1997년에 감옥은 왜 갔냐고 묻더군요.…‘전두환, 노태우 정권이 끝나고 김영삼 정부가 들어섰는데 그때까지도 학생운동 뭐 이런 게 남아 있었나?’ 이런 분위기였어요. 김영삼 정권이 지금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민주화된 정부도 아니었고, 나는 학생으로서 정권이 잘못한 일들, 틀렸다고 생각하는 일들에 맞서다 감옥에 간 거라고 얘기하고 나오는데 눈물이 펑펑 나더군요.”

여러 굴곡을 겪었지만 양씨는 지금도 밝은 ‘소녀감성’을 지녔다고 유해정 활동가는 말했다. 유 활동가는 “동시대를 살아온 여성으로서 치열하게 살아온 지난 삶이 경력도, 역사도 되지 못했다는 (양씨의) 이야기에 많은 부분 공감이 갔다”며 “(양씨는) 자신의 삶에 대해서 거침없이 이야기했고, 내게도 힘이 되는 인터뷰였다”고 말했다.

■여전한 삶의 무게

유해정 활동가는 이번 프로젝트를 기획하면서부터 1995년 12월 범민련(조국통일범민족연합) 가입 혐의로 구속됐던 고애순씨의 이름을 제일 위 칸에 적었다. 구속 당시 고씨는 임신 8개월이었다.

“제가 거의 만삭인 상태로 한겨울에 구속되니까 밖에서 어떻게든 빼내려고 엄청 노력을 많이 하셨어요. 그런데 집행유예 기간에 다시 구속된 상황이다 보니 구속적부심도 안 되고, 보석 허가도 안 났어요. 첫 임신이다 보니 임신에 대한 지식도 없었을 뿐 아니라 교도소 안에서도 저를 도와줄 사람이 없었어요.…제 몸은 점점 더 안 좋아졌어요. 뭐라고 해야 할까? 뭐가 계속 밑으로 흐르는 느낌? 소변이 새는 것처럼. 그래서 교도관에게 뭐가 자꾸 흐르는 것 같다, 배가 많이 뭉친다고 하면, 임신하면 본래 그러저러한 게 다 나타난다는 식으로 얼버무리곤 했어요.” 몸 상태가 급격히 안 좋아지면서 이듬해 1월 말 형집행정지로 출소했다. 며칠 뒤 산통을 느껴 병원에 갔다. 사산이었다. “그러니까 저는 바보같이, 밑으로 뭔가가 굉장히 쏟아지는 느낌이 양수가 빠지고 그런 상황이었는데, 그걸 전혀 몰랐던 거죠. 며칠간 누워서 정신없이 눈물만 흘렸는데 정신을 차리고 나니까 너무 죄스러운 거예요. 애 얼굴도 못 봤어요…제 입장에서는 아홉 달 동안 품고 있던 아이를 한번도 품어주지도 못하고 보냈다는 사실이 너무나 사람을 미치게 하는 거예요.”

고씨는 지난 24년 동안 이 이야기를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다시 아이를 낳아 그 아이가 기어 다니고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회복하기도 했지만, 쉽게 극복되는 일은 아니었다. 스스로를 가둔 채 오랜 시간을 보내다가 인권 운동에 뛰어들었다. 국가보안법 피해자를 돕는 활동을 하는 동안 정작 자신이 피해자라는 사실을 외면하면서 지냈다는 걸 깨닫기도 했다.

유 활동가는 인터뷰 날짜가 다가올수록 고씨가 망설였다고 했다. 처음에 고씨는 본명과 얼굴을 감췄으면 했다. 구술기록이 담긴 원고를 읽고 자신만 가명으로 표기됐다는 걸 알고는 용기를 냈다.

유 활동가는 이런 후기를 남겼다. “나는 일상적으로 국가폭력, 재난참사 피해자들을 만나는데 만남 끝에 늘 확인하게 되는 건 그들이 짊어진 삶의 무게다. 사회는 책임조차 모르는데 피해자인 그들은 또 다른 피해자에 대한 죄책감을 떠안고 산다.”

지난 16일 ‘남영동 대공분실’이 있던 서울 용산구 민주인권기념관 5층에 ‘여성서사로 본 국가보안법’의 구술기록을 담당한 작가단이 모였다. (왼쪽부터)박희정·유해정·홍세미·강곤·이호연 기록활동가와 정택용 사진가. 김창길 기자

“사람을 사회적으로 죽이는 보안법의 고통은 현재진행 중”

■회복되지 않은 고통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한 인터뷰이 중에는 현재진행형인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화교남매 간첩조작사건’으로 알려졌던 유가려씨는 웃음이 많은 사람이지만, 아직도 국정원 합동신문센터(합신센터·현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에서의 경험을 이야기할 땐 눈물바다가 된다.

“어제(인터뷰 전날) 제대로 잠을 못 잤어요. 무슨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가끔씩 생각이 나면 인터넷을 검색해서 (사건과 관련된) 기사들을 쭉 보게 되는데 얼마 전에 있었던 국정원장 재판 기사를 보고, 다시 그때 뉴스를 보고, 그러면 마음이 너무 안 좋고, 그때 생각도 많이 나서 울고, 그래서 잠을 못 잤어요. 볼 때마다 가슴이 너무 아프니까….”

유씨는 합신센터에서 수개월간 독방에 갇혀 지내며 오빠가 간첩이라는 거짓 자백을 강요받았다고 했다. 외부와 차단된 공간에서 면회나 변호인 접근권이 배제된 상태로 6개월 동안 독방에 갇혔고, 폭행 등 가혹행위가 있었다. “너무 억울해서 조사실 책상에 있던 우유병을 들고 내 머리를 깨려고 했는데 아줌마 조사관이 내 손을 잡고 못 하게 했어요. 새벽까지 조사하고,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시키고, 귓쌈(뺨)도 때리고, 얼굴 쳐다봐라, 눈 마주쳐라 하고, 앉아 있는 걸상을 발로 차기도 했어요.”

유씨의 오빠 유우성씨는 탈북 간첩으로 몰렸지만 이후 증거 조작 정황이 드러나 2015년 무죄가 확정됐다. 5년 가까이 흘렀지만 그 피해와 상처는 회복되지 못했다. 유씨를 인터뷰한 강곤 활동가는 “유가려씨의 억울함이 알려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합신센터에서의 일을 이야기하면 울컥하신다”며 “진상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고, 책임자가 처벌되지 않았다. 본인이 겪은 고통과 상처, 분노의 감정을 정리해서 표현할 언어를 찾기 힘든 것이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배지윤씨는 박희정 활동가와 만나 자신의 삶을 이야기했다. 배씨의 생애는 <마담B>라는 다큐멘터리로 소개되기도 했다. 북한 자강도에서 태어난 배씨는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탈북했고, 브로커에게 속아 중국 남자에게 팔려 갔다. ‘탈북 브로커’를 하는 등 악착같이 살았다. 어렵게 번 돈은 북한에 두고 온 남편과 자녀에게 보냈다. 2014년 드디어 한국에 들어온 배씨는 국정원 합신센터 독방에서 150일 넘게 간첩 혐의로 조사받았다. 중국에서 마약을 팔아 북한에 ‘충성 자금’을 댔다는 것이었다.

“과장이라는 조사관도 애가 둘이 있더라고요. 아들과 딸. 진짠지 가짠지 모르겠지만 저한테 그렇게 말했어요. 자기도 애를 키우는 사람으로서 저한테 간첩이라는 딱지를 붙일 때 마음이 편했을까요?조사받을 때 선생들한테 제가 물어봤어요. 간첩을 잡아야 하는 거 아니냐고, 왜 만드냐고.”

남편도 독방에 감금돼 조사받았다. 대면조차 시켜주지 않았다. “여보, 내가 다 진술했으니까 당신도 진술해.” 남편이 쓴 편지의 일부라며 읽어줬다. “이 사람이 나하고 원수를 져서 그러나? 저는 그때 애들 아빠가 진짜 그렇게 쓴 줄로만 생각했거든요. 제가 중국에 있을 때 남편보고 ‘한국 가서 당신하고 같이 안 살 거다. 애들 데리고 혼자 살아라’라고 했었거든요.” 조사관의 이간질로 인해 오해의 골이 깊어졌다는 걸 안 건 풀려난 뒤였다.

배씨는 운 좋게 풀려났다. 당시 유가려·유우성씨의 ‘화교남매 간첩조작사건’이 밝혀지면서 세상이 시끄러워진 ‘덕분’이었다.

하지만 고생은 끝나지 않았다. 탈북자로서 정착 지원을 받을 수 없는 비보호 처분이 나왔다. 합신센터에서 조사관이 ‘야, 배정옥!’이라고 하도 소리쳤던 것이 사무쳐 이름도 바꿔버렸다. 그리고 이혼했다. 전남편은 합신센터에서 나온 뒤 위암을 얻었다. 억울함과 분노, 미안함. 다양한 감정은 쉽게 정리되지 않았다.

배씨를 인터뷰한 박희정 활동가는 “자신과 그(전남편)를 이렇게 만든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억울함이 뒤섞여 인터뷰 내내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세 번의 인터뷰가 이뤄지는 동안 투병하던 전남편은 세상을 떠났다. 박 활동가는 “(배씨가) 중국에 있을 때는 겁이 없었는데 힘이 빠지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어요. 북한에 있는 자식들에게 돈을 보내야겠다는 사명감으로 두려움 없이 사셨거든요. 그런데 한국에 와서 단박에 무너진 것이죠. 그런 변화 속에서 이 사건과 체제의 잔혹함이 보였어요.”

■아직 살아있는, 국가보안법

박희정 활동가는 파주시의원을 지냈던 안소희씨의 이야기도 기록으로 남겼다. 안씨는 국가보안법상 찬양·고무 혐의로 기소돼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3년, 자격정지 2년을 선고받고 지난 5월 대법원에 의해 형이 확정됐다. 2012년 6월21일 옛 통합진보당(현 진보당) 행사인 출마자 결의대회에서 ‘혁명동지가’를 제창하고 이적표현물을 소지했다는 혐의다.

“‘이런 지도자들의 사진을 보면 마음이 어때요?’(국정원 조사관) 저는 그게 누구 사진인지도 몰랐어요. 심지어 제 것도 아니에요. 조사관은 이미 단정을 지은 거죠. 내가 북한 지도자를 숭배하고 있다고. 그렇게 계속 뭔가를 보여주면서 자기 혼자 찢기도 하고 밟기도 하고 기분이 어떠냐고 물어봤어요. 만약 압수수색 때 한 점이라도 북한과 관련된 사진이든 그림이 나왔더라면, 그래서 그걸 보여주면서 왜 이런 걸 소지하고 있었냐고 묻는 거라면 그나마 상식적이라고 하겠어요. 그냥 시종일관 인신공격하는 말들, 확인되지 않은 사실로 몰아가는 말들뿐이었어요.”

안씨는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종북 공세’가 이어지는 와중에도 3선에 성공했지만, 결국 대법원 확정 판결로 시의원직을 잃었다. 안씨가 초선 시의원으로 활동할 때 그 지역으로 이주한 박 활동가는 그가 주민들의 질문에 정성껏 대답해주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안씨를 국가보안법의 피해자로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국가보안법은 일단 관련 사건에 휘말리게 되면 당사자의 모든 사회적 관계를 끊어놓는다. 박 활동가는 “국가보안법은 사람을 색안경을 끼고 보게 만들고, 한 사람을 사회적으로 죽여놓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홍세미 활동가가 만난 권명희씨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된 목회자 남편을 구하기 위해 거리에서 싸우는 삶을 살았다. 2015년 11월14일 한밤중에 초인종이 울리고 국정원 직원들이 집안에 들이닥쳤다. “여보! 권명희! 전화해! 변호사한테 연락해!” 남편의 다 쉬어버린 목소리가 들렸다. “남편이 어떤 사람한테 깔려 있었어요. 남편이 저한테 이 상황을 알려주고 싶어서 땅바닥에 처박힌 채로 30분 넘게 소리 지르고 있었던 거예요.”

권씨 남편을 포함해 사건 당사자가 4명이었다. 가족대책위를 만들고 ‘성직자 노동자 공안 탄압 사건’이라고 명명했다. “애들 아빠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갑자기 간첩이 됐어요. 우리나라에서 간첩이 어떤 의미인지 아시잖아요. ‘인생 끝났다. 우리 가족, 시댁, 친정, 식구들이 매장이다. 우리는 이제 미래가 없구나. 우리 아이들은 어떡하나.’… 주변 사람들은 다 흩어지고 우리 가족이 송두리째 망가질 것 같았어요. 그때 버티면서 제가 아는 분한테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차라리 남편이 살인범이었으면 좋겠다고요. 그러면 최소한 가족이나 아이들, 주변 사람들한테 영향을 미치지 않을 거 아니냐고요(눈물).”

홍 활동가는 권씨가 인터뷰를 위해 마주 앉았을 때 “지난 이야기를 폭포처럼 쏟아냈다”고 말했다. 국가보안법으로 주변과 단절되어 소수의 도움만을 받고 지내는 그의 가슴에 쌓인 말이 많았다. 홍 활동가는 이른바 ‘운동권’도 아니었기에 국가보안법은 남의 일로만 알고 살았다. 그는 “국가보안법이라는 게 영화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아직도 누군가 생생하게 이 일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며 “출간 작업을 마치면 국가보안법을 잘 모르는 분들도 읽게 될 텐데, 국가보안법과 국가폭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아직도 겪고 있는 이들의 삶을 생생하게 경험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현진 기자 jjin2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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