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26년간의 평온 깨졌다..여주휴게소 '그리스 신전'의 비밀

김민욱 2020. 7. 29.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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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고속도로 여주휴게소 구석에 자리한 그리스군 참전기념비. 김민욱 기자

28일 오후 경기도 여주시 가남읍 여주휴게소(영동고속도로 강릉 방향). 휴게소 내 행복장터 건물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면 ‘그리스군 참전 기념비’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나온다. 농·특산물을 판매하는 곳이다 보니 앞에는 여주쌀(진상미) · 햇고구마 · 찰옥수 광고판이 곳곳에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정작 참전비 위치를 알리는 안내표시는 찾을 수 없었다.


입구 계단 쪽 '윙윙' 기계음 요란
참전비 입구는 여주휴게소 흡연실과도 가깝다. 포털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지도가 아니었다면 참전비를 찾는데 헤맸을 듯싶다. 입구 쪽에는 지난해 4월부터 수소가스 충전소가 운영 중이다. ‘윙윙’ ‘윙윙’ 기계음이 요란하다. 소음을 뒤로 40~50m쯤 올라갔다. 그리스 고대 유적을 본뜬 참전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스군 참전기념비 모습. 김민욱 기자


그리스 전통양식 본뜬 참전비
주름 잡힌 원기둥, 그 기둥 윗부분을 양의 뿔처럼 둥글게 조각한 전통양식 등 여느 국가 참전비와는 다르다. 1974년 건축 당시 그리스에서 직접 자재를 공수해왔다고 한다. 참전비 앞에서자 이번에는 고속도로를 오가는 차량 소음이 거슬렸다. 영동고속도로 주중 통행량은 일평균 32만3270대(2018년)에 달한다.

그리스군 참전비가 이곳에 세워진 사정은 이렇다. 국방부, 그리스 전사편찬위원회 측에 따르면 그리스군은 1950년 12월 9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낯선 한국 땅 적응을 마친 뒤 여러 전투에 투입됐다.

1951년 1월 9일 작전 논의하는 그리스군 장교 모습. 뉴스1


'381고지' 전투 참전한 그리스군
이 가운데 그리스군이 처음으로 벌인 가장 큰 전투가 바로 이듬해 1월 29일 이천 서북쪽에서 치러진 ‘381고지’ 전투다. 지금의 여주휴게소 인근이다. 그리스군은 이 381고지 전투에서 전과를 올렸다. 이후 다른 지역에서도 중공군과 수없이 맞붙었다.

특히 휴전을 앞에 둔 1953년 7월 15일 중공군의 포격으로 그리스군의 사상자가 속출했다. 이런 불리한 상황에서도 진지를 굳건히 지켜냈다. 중공군은 병력을 증강해 2차 공격을 가했지만 결국 패하고 말았다. 그리스는 한국에 5532명의 군인과 8명의 간호장교를 파병했다. 이 가운데 186명이 전사하고 610명이 부상했다.

참전비 앞에서 바라본 휴게소 모습. 계단 왼쪽 건물이 행복장터다. 오른쪽은 수소가스 충전소. 김민욱 기자


참전비 주변으로 개발 몸살
한국 정부는 74년 10월 3일 참전 기념비를 건립하기에 이른다. 그리스 용사들의 숭고한 희생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표시다. 건립 당시만 해도 주변은 평온했다고 한다.

하지만 2000년 여주휴게소가 확장되면서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3년 뒤 국가보훈처가 참전비를 현충 시설로 국지정했지만, 주변 개발을 막을 수는 없었다. 물류창고, 수소가스 충전소, 전기자동차 충전소, 흡연실 등이 빽빽하게 들어섰다. 이후 그리스 한국전 참전용사협회 쪽에서 “참전용사를 위한 예우와 선양의 의미가 퇴색되고 있다”는 민원이 제기됐다. 민원은 3년 전부터다.

그리스군 참전 기념비 이전 예정부지인 여주 영원골원을 답사 중인 전현희 권익위원장(사진 가운데)와 이항진 여주시장(사진 오른쪽). 사진 권익위


이전에 필요한 중재안 도출
그러나 이전이 쉽지 않았다. 참전비를 옮길 공간, 예산 등이 마땅치 않았다. 결국 국민권익위원회가 중재에 나섰다. 권익위는 그간 수차례 현장조사, 관계기관 협의 등을 거쳐 최근 최종 중재안을 끌어냈다.

국가보훈처는 내년 말까지 참전비를 경기도 여주시 영월공원으로 이전할 방침이다. 여주시도 이전에 흔쾌히 동의했다. 국방부는 앞으로 그리스군 현충행사를 지원할 계획이다. 주한 그리스대사관은 이전 공사에 필요한 대리석 등 자재를 현지에서 지원할 예정이다. 이번 결정에 그리스 참전용사들은 우리 정부에 감사 인사를 여러 차례 전했다.

전현희 권익위원장은 “그리스군 참전기념비를 여주 영월공원으로 이전하는 것으로 중재가 이뤄졌다”며 “앞으로 시민들과 가까운 곳에서 참전 정신을 이어갈 수 있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여주·세종=김민욱 기자 kim.min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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