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언의 시시각각] 윤석열 살린 한동훈의 '관심 없다'

이상언 입력 2020. 7. 30. 00:51 수정 2020. 7. 30. 0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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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A 기자 녹음 파일 없었으면
지금쯤 '식물' 상태 됐을 윤 총장
원칙과 소신의 목소리를 잃었나
이상언 논설위원

26분짜리 녹음 파일이 일단 한동훈 검사장을 살렸다. ‘검언유착’ 프레임 설계자들의 최종 타깃은 윤석열 검찰총장이니 그도 한 고비를 넘겼다. 파일 속 ‘신(神)의 한 수’는 이 대목이다.

이동재 전 채널A 기자: “유시민은 한 월말쯤에 어디 출국하겠죠? 이렇게 연구하겠다면서.”

한동훈 검사장: “관심 없어. 그 사람 밑천 드러난 지 오래됐잖아. 그 1년 전 이맘때쯤과 지금의 유시민 위상이나 말의 무게를 비교해 봐.”

이 전 기자는 뻘쭘했을 것이다. 상대방이 꺼낸 대화 소재에 “관심 없다”고 자르는 것은 친절한 사람의 행동은 아니다. 그래도 이 전 기자가 유시민씨 이야기를 이어가자 한 검사장은 “어디 계신 거예요 지금은?”이라며 출장 짐을 어디에 풀어놨느냐고 묻는다. 그 뒤엔 “내가 이제 가야 해서”라며 퇴실을 요청한다. 2월 13일 부산고검 차장실에서였다. 이 전 기자는 윤 총장의 부산 검찰청 방문에 후배 백모 기자와 함께 따라갔다.

유시민씨는 이 전 기자가 자신과 신라젠 연관 의혹을 추적한 것을 “검찰이 채널A에 외주 준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윤 총장이 깊이 개입한 것으로 의심된다고도 했다. ‘외주’라면 발주자가 있어야 할 텐데 이 시나리오에서 발주처로 지목된 이가 ‘물건’에 관심이 없다고 했다. 제품 아이디어를 다 듣기도 전에 퇴짜를 놓아버렸다.

이 파일이 없었다면 한 검사장은 지금쯤 구치소에 있을 것이다. 기자가 부산에 가 한 검사장을 만났고, 다음 날 수감 중인 이철 전 밸류인베스트코리아 대표에게 편지를 부쳤다. 며칠 뒤 이씨 지인이라는 지모씨가 기자에게 연락했다. 기자는 이씨가 친여 인사들의 비리를 알려주면 가족 관련 수사에 도움을 줄 수 있다며 정보를 얻으려 했다. 기자는 지씨와 접촉하던 시기에 한 검사장과 몇 차례 통화했다. ‘외주’ 프레임이 딱 떨어진다. 그런데 아뿔싸, 그날의 대화가 녹음돼 있었다. 대검 수사심의위원회가 한 검사장에 대한 수사 중단과 불기소를 권고하는 데 이것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백 기자는 왜 3인의 대화를 녹음했을까. 기자가 검찰 간부의 말을 녹음하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다. 수첩에 끄적이는 것도 금기사항이다. 녹음하는 기자, 다 받아적는 기자에게 취재원들이 마음을 열 리 없다. 검찰 담당 기자들은 술에 취해서도 얼핏 들은 이름·금액·연도 등을 표 안 내고 외우려 한다. 음모론자 시각에서 보면 백 기자의 녹음은 ‘발주’ 확인 용도로 의심할 수 있다. 그런데 의외로 이유는 단순했다. 이 사건 관계자들에 따르면 백 기자는 최근 수년간 취재원과의 대화나 전화 통화를 거의 다 녹음했다. 그의 스마트폰에서 엄청난 양의 녹음 파일이 나왔다. 젊은 기자 중에는 백 기자처럼 녹음이 습관이 된 기자가 꽤 있다. 이 사건과는 별도로 기자들이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여하튼 녹음 파일은 한 검사장, 나아가 윤 총장을 ‘용궁’에서 구하는 동아줄이 됐다. 그것이 없었다면 윤 총장은 지금 여권의 전방위적 사퇴 압박을 받고 있을 것이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감찰과 총장 직무집행 정지’ 카드를 꺼냈을 수도 있다. 죽다가 살아난 형국이다. 그런데 윤 총장은 묵언수행하는 듯하다. 검찰 간부가 박원순 전 시장 고소 정보를 유출했다는, 검사가 KBS에 거짓 정보를 건네 ‘공작 보도’가 이뤄지게 했다는 범죄 의혹을 서울중앙지검이 그대로 덮으려 해도 지켜보고만 있다. 정권이 불편해 하는 수사들이 산으로 갔는지, 바다로 갔는지 알 수 없고 검찰총장 지휘권을 없애려는 해괴한 시도가 백주에 펼쳐지는데 아무런 말이 없다.

‘검찰주의자’라는 윤 총장이 검찰이 만신창이가 돼 가도 ‘원칙과 소신’의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국민과 국가에 대한 충성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는 사이 치욕을 견디며 그의 곁을 지키던 검사들이 하나둘 떠난다. 용기와 기개를 빼면 윤 총장에게 무엇이 남을까. 이 질문이 내내 머리에 맴돈다.

이상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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