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경향신문

팬데믹 이후 거꾸로 가는 '여성인권 시계'

이윤정 기자 입력 2020. 08. 01. 14:23

기사 도구 모음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o i

번역할 언어 선택
글자 크기 조절 레이어

[경향신문]

지난 7월 24일(현지시간) 폴란드 정부의 ‘이스탄불협약’ 탈퇴를 규탄하는 시위대가 미국 드라마 <핸드메이즈 테일(시녀이야기)> 속 가정부 의상을 입고 수도 바르샤바 거리로 나왔다. 드라마 속에서 보수 권위주의 정권의 디스토피아에 살게 된 여성 주인공이 출산의 도구로 전락하는 내용을 빗댄 것이다. / 바르샤바|EPA연합뉴스


“우리는 사라지고 있다.” 폭력에 노출된 지구촌 여성들의 절규가 커지고 있다.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한 봉쇄 조치로 가정 내 여성폭력 범죄가 크게 증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성들의 목소리는 허공에 떠도는 메아리로 그치고 있다. 멕시코 정부는 최근 여성쉼터 예산을 절반 이상 삭감했다. 폴란드 정부는 가정폭력금지협약인 ‘이스탄불협약’ 탈퇴 조치에 들어갔다. 세계 ‘성별격차지수’ 1위국인 아이슬란드에서조차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이후 여성폭력 범죄가 크게 증가했다는 보고서가 나왔다. 올해는 미국 여성들이 참정권을 얻은 지 100년이 되는 해이지만, ‘여성인권 시계’는 거꾸로 흐르고 있다.

폴란드 정부 “가정폭력금지협약은 해로워”
폴란드 정부는 팬데믹 이전부터 여성인권 퇴보의 과정을 밟아왔다. 2015년부터 권력을 장악한 우파 민족주의 보수 성향 집권당 ‘법과정의당’은 전통적 가치를 수호해야 한다면서 ‘낙태전면금지법’을 추진해왔다. 가톨릭 국가인 폴란드는 이미 유럽에서도 가장 보수적이라 할 수 있는 낙태금지법을 시행하고 있다. 성폭행·근친상간 등으로 임신을 한 경우에 한해 산모 생명에 위협이 되거나 태아가 기형인 경우에만 낙태를 허용한다. 하지만 집권당은 태아에 문제가 생긴 경우에도 낙태를 금지하는 법안을 밀어붙이고 있다. 이에 2016년부터 폴란드 여성들은 검은색 옷을 입고 거리로 나왔다. ‘검은 시위대’로 불린 이들은 ‘여성파업’을 주도하며 낙태전면금지법을 막아냈다.

팬데믹을 틈타 폴란드 정부는 또 한 번 시대에 역행하는 선택을 하고 있다. 법무부는 7월 27일(현지시간) 여성에 대한 폭력을 금지하는 유럽평의회 조약에서 탈퇴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이스탄불협약’으로 불리는 이 조약은 전통이나 문화, 종교를 여성에 대한 폭력행위의 명분으로 삼을 수 없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2014년 8월 발효된 조약에 터키를 시작으로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스페인, 덴마크, 프랑스, 스웨덴 등 40여개 회원국이 서명했다. 폴란드 정부는 2015년 이 조약을 비준했지만 즈비그뉴 지오브로 폴란드 법무장관은 이날 가족부에 공문을 보내 이스탄불협약 탈퇴를 위한 절차에 들어가도록 했다.

지오브로 장관은 이스탄불협약에 대해 “해로운 이데올로기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페미니스트들의 창조물이자 동성애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할 목적으로 만든 발명품”이라는 것이다. 안제이 두다 폴란드 대통령은 여성인권을 위협하는 중심축이다. 그는 성소수자 인권 운동을 비판하고 가톨릭교회와 연대해 ‘우클릭’ 행보를 이끌고 있다.

이에 여성들은 또 한 번 거리로 뛰쳐나왔다. 검은 시위대는 폴란드 정부가 “가정폭력을 합법화하고 있다”며 다시 한 번 ‘여성파업’을 예고했다. 지난 7월 24일 시위대는 미국 드라마 <핸드메이즈 테일(시녀이야기)> 속 가정부 의상까지 입고 나왔다. 드라마 속에서 보수 권위주의 정권의 디스토피아에 살게 된 여성 주인공이 출산의 도구로 전락하게 되는 것을 빗댄 것이다.

유럽연합(EU)도 두다 행정부의 ‘반 여성’ 행보를 강력 비판했다. 마리자 페이치노비치 부리치 유럽평의회 사무총장은 “여성에 대한 폭력을 막아 왔던 노력을 크게 퇴보시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두다 정권의 움직임이 다른 우파 정권들에 영감을 주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터키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정권도 최근 이스탄불협약 탈퇴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7월 24일(현지시간) 폴란드 정부의 ‘이스탄불협약’ 탈퇴를 규탄하는 시위대가 수도 바르샤바에서 “가정 폭력을 합법화하고 있다” “여성 파업” 등의 문구를 쓴 팻말을 들고 있다. / 바르샤바|EPA연합뉴스


지난 7월 25일 터키 수도 앙카라 등에서도 에르도안 정권 행보를 비판하는 여성단체들의 항의 시위가 벌어졌다. 에르도안 정권의 여성인권 퇴보 선택 때문만은 아니다. 최근 터키에서 여성 대상 범죄가 급증하고 있어서다. 27세 여성이 전 남자친구에게 살해되는 일이 발생했는데 팬데믹 이후 비슷한 패턴으로 여성 27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공분이 일었다. 하지만 이날 여성에 대한 폭력을 멈춰달라는 시위대의 목소리는 ‘코로나19 확산을 막는다’는 명분을 내민 정부의 강제해산으로 거리에서 사그라들고 말았다.

멕시코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 7월 15일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대통령이 여성부 예산의 75%를 삭감하기로 한 것이다. 문제는 여성부 예산 안에 여성쉼터 지원금 등 가정폭력 피해자를 보호하는 안전책들이 포함돼 있다는 점이다. 멕시코의 여성혐오 범죄는 악명높다. 한 해 동안 폭력으로 살해당하는 여성은 3800명이 넘는다. 팬데믹은 이런 피해를 키우는 기폭제가 됐다. 봉쇄 조치로 집안에 갇힌 여성들은 가정폭력에 고스란히 노출됐다. 올 초부터 지난 3월까지 여성혐오 살해는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7.1% 증가했다. 실제 가정폭력을 피해 집을 나와 쉼터를 찾는 여성·아동 비율도 50%나 급증했다.

하지만 오브라도르 대통령은 “지금만큼 여성이 보호받는 시대가 없다”면서 “최근 가정폭력 신고의 90%가 거짓신고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세계 여성의 날’ 다음날인 3월 9일 여성들은 여성에 대한 폭력과 살해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를 열었다. 여성들은 “우리는 (폭력과 범죄로) 사라지고 있다”고 절규했지만 정부는 오히려 이들을 ‘우파의 음모’라고 몰아세웠다.

여성들 “우리는 사라지고 있다”
성평등 사회를 구현하고 있는 나라에서도 여성폭력 범죄는 끈질긴 고민거리였다. 지난 11년 동안 세계경제포럼의 ‘성별격차지수’에서 1위를 차지한 아이슬란드 또한 마찬가지다. 2018년 아이슬란드 대학의 전국 조사에 따르면, 아이슬란드 여성 4명 중 1명꼴로 성폭력을 당한다. 유럽에서 성폭력에 노출되는 여성 비율이 10%인 것과 비교해도 높은 수치다. 전문가들은 이를 ‘북유럽의 역설’이라고 표현한다. 미 외교전문지 ‘폴린폴리시’는 “사회적으로 성평등이 보장되는 듯 보여도 아이슬란드 사법 시스템 속에는 ‘남성중심적’ 사고가 지배적”이라며 성격차 해소만으로는 여성 대상 범죄를 줄이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팬데믹 이후 아이슬란드에서도 가정폭력 범죄 신고가 폭증했다. 특히 남편·동거인 등의 폭력에 목숨을 잃는 여성 비율은 전체 여성 살해 사건의 50%를 차지한다. 세계적으로는 여성 살해 사건의 가해자 38%가 남편 등 남성 파트너다. 실제로 팬데믹 이후 가정폭력 범죄는 세계적으로 치솟고 있다. 전년 같은 기간과 비교하면 지난 3월 이후 가정폭력 범죄는 프랑스에서 30%, 싱가포르 35%, 아르헨티나에서 25% 늘었다. 유엔은 ‘팬데믹의 그림자’라는 해시태그 운동을 통해 여성 대상 성범죄·폭력·살해가 급증하고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하지만 가해자와 이를 방치하는 정부가 귀를 기울이지 않는 한 ‘팬데믹의 그림자’를 걷어낼 길은 요원해 보인다.

이윤정 기자 yyj@kyunghyang.com

ⓒ 경향신문 & 경향닷컴(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포토&TV

    이 시각 추천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