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검찰의 희화화' 병상 사진 공개 꼭 필요했나

강청완 기자 입력 2020. 8. 2.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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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상에 누워있는 정진웅 부장검사


● 어느 수요일 오후의 '검사내전'

병상에 한 남성이 누워있다. 정장 차림에 안경, 마스크를 쓴 채 오른팔에는 링거를 꽂았다. 지난 한 주 대한민국에서 가장 화제가 된 사진 한 장을 꼽으라면 아마 이 사진이 아니었을까.

이 한 장의 사진은 지난 수요일(29일) 벌어진 '검사내전'의 화룡점정과도 같았다. 그날 오후 2시를 조금 넘은 시각 갑자기 서울중앙지검에서 기자들에게 문자 한 통을 보냈다. 채널A 사건의 피의자로 지목된 한동훈 검사장의 휴대전화 유심(USIM) 카드를 압수수색하던 도중 한 검사장의 물리적 방해로 수사팀장인 정진웅 서울중앙지검 형사1부장이 병원 치료를 받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기다렸다는 듯 한동훈 검사장 측에서도 압수수색 과정에서 폭행을 당했다는 입장을 보내왔다. 저녁까지 양측의 문자 공방전이 이어지다 방송사 메인뉴스 시간이 임박한 저녁 7시쯤 배포된 사진이 바로 정진웅 부장검사의 병상 사진이다. TV와 인터넷, 다음날 거의 모든 신문지면을 같은 사진이 장식했다.

수사팀장의 독직폭행이냐, 피압수자의 증거인멸 시도였냐 하는 쟁점은 일단 미뤄놓기로 하자. 수사팀 쪽인 서울중앙지검이 "공무집행방해는 아니었다"고 한발 물러서기도 했거니와 서울고검도 감찰에 착수했기 때문이다. 그보다 현직 검사장과 부장검사 사이에 벌어진 초유의 육탄전을 놓고 '충격적'이라는 반응이 쏟아졌다. 검찰 내부는 물론 검언유착이 뭔지, 한동훈이 누군지 관심조차 없는 시민들도 하나같이 '볼썽사납다'는 반응이었다. 기자도 놀랐다. 검찰이 비리 스캔들이나 무리한 수사로 여론의 질타를 받은 적은 있었지만 과연 이런 모습까지 국민 앞에 보인 적이 있었던가.

● 부장검사와 뎅기열…"신정환 의문의 1패"

충격과 놀라움이 조롱과 비난으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병상 사진 공개가 티핑 포인트였다. 누리꾼 누군가 귀신같이 연예인 신정환 씨의 '뎅기열 입원 사진'을 찾아내 '투샷'을 만들어 올렸다. 사진의 구도와 느낌이 비슷하단 이유였다. (언론매체가 주로 인용한 진중권 교수의 페이스북 포스팅은 사진이 꽤 퍼져나간 이후의 일이다.) SNS에는 신정환 씨가 '의문의 1패'를 당했다는 댓글이 달렸다.

정진웅 부장검사와 신정환의 병상 사진


물론 사진 공개 배경에 이해가 갈 만한 사정이 없는 건 아니다. 오후 내내 이어진 이른바 '문자 공방전'은 시간이 갈수록 한 검사장 측이 다소 우위를 점해가는 분위기로 흘렀다. 한 검사장 측이 몸싸움 당시의 전후 상황과 녹화된 영상에 대한 설명을 비교적 상세히 전한 반면, 수사팀 쪽에선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심지어 정 부장검사의 입원을 놓고 꾀병 아니냐는 추측까지 조금씩 나왔다. 결국 "기다려 달라"는 몇 차례 답변 끝에 나온 게 정진웅 부장검사의 입장문과 문제의 사진 한 장이다.

그러나 결과는 '뎅기열 패러디'였다. 여론이 반전되기는커녕 더 싸늘해졌다. 한동훈 검사장 쪽에 적대적 성향을 가진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검찰이 공개한 사진을 놓고 작위적이라는 반응이 나왔다. 대한민국 내로라하는 두뇌들이 모였다는 검찰, 그것도 서울중앙지검에서 내놓은 카드라고 보기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허술한 패였다. 검찰은 사진 공개로 도대체 어떤 메시지를 주고 싶었던 걸까.

● 사진 공개는 '정치 행위'

이날 검찰의 병상 사진 공개는 '팩트의 전달'보다 사실상 '정치 행위'에 가까웠다. 구체적이고 정확한 설명보다 시각 이미지를 통해 감성에 호소함으로써 다른 목적을 추구하는 그런 행위. 정 부장검사 스스로 밝힌 설명대로 압수수색 과정에서 예기치 않은 돌발상황에 신체적 혹은 정신적 충격을 받아 병원 치료를 받았을 가능성과 당위성,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굳이 사진까지 공개해야만 했을까.

사실 이런 장면, 어디선가 많이 보긴 했다. 불의의 피습을 당한 (혹은 당했다고 주장하는) 정치인이 병상에 드러누워 고통을 호소하는 그런 사진. 다만 정치판이 아닌 검찰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게 충격과 놀라움의 이유 아니었을까. 기시감은 있되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이런 느낌. 아마 정치인 누군가가 비슷한 모습을 연출했다면 그러려니 했을지 모르겠다.

분명한 건 오늘날 한국 정치가 국민의 신뢰를 잃고 희화화되는 과정에는 위와 같은 일들이 한몫했다는 사실이다. 여론의 감수성을 충분히 헤아리지 않은, 사려 깊지 못한 정치적 행위를 통해서 말이다. 만에 하나 검찰이 보고 배운 거라면 못 배워도 단단히 잘못 배운 셈이다. 평소 '검사는 수사로 말한다'며 때로 답답하리만치 입을 닫는 검찰이 아니었나.


● '검찰의 희화화'…피해는 국민이 본다

가뜩이나 말 많고 탈 많은 수사였다. 검찰과 언론의 신뢰 회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를 위해 반드시 실체적 (혹은 그에 가까운) 진실이 규명되어야 하는 사건이다. 그런데 잡음이 너무 많다. 당장 몸싸움 사태만 놓고도 감찰과 또 다른 수사가 더해지게 됐다. 의혹이 의혹을 낳고 사건이 사건을 낳는 모양새다.

오늘날 검찰이 '해방 이후 최대 위기'라는 말이 나올 만큼 온갖 질타와 비난을 받는다 해도 여전히 우리 사법 질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검찰이 없어지지 않는 한, 개혁 이후에도 검찰은 사회 질서 유지에 계속 중요한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공수처나 경찰과 역할을 나눈 뒤에도 검찰은 계속 범죄자를 잡고 피해자를 구제해야 한다.

그런 검찰이 희화화되고 우스꽝스러워질 때 결국 피해는 우리 사회와 국민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우스워진 검찰에 과연 누가 쉬이 승복할까. 검찰 개혁은 권력을 분산시키는 것이지 권위를 떨어뜨리는 것은 아니다. 검찰의 권위가 떨어져서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은 국가와 사회가 고스란히 짊어진다. 한 번 무너진 권위와 신뢰를 회복하는 데는 오랜 시간과 더 큰 공력이 든다. 적어도 검찰 스스로 망신을 자초하진 말아야 한다.  

강청완 기자blue@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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