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태종의 승전 조서를 따져보자

임기환 입력 2020. 8. 6.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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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 명장면-102] 645년 9월 18일 안시성에서 철군한 당태종과 당군은 요동성을 거쳐 요하에 도착해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9월 21일쯤이었다. 요하에는 늪지대인 요택(遼澤)이 200여 리에 펼쳐져 있었다. '자치통감'에서는 요택을 통과하는 당시 당군의 어려움을 이렇게 쓰고 있다.

"요택은 진흙벌판이어서 수레와 말이 통행하지 못하자 장손무기에게 1만명을 거느리고 풀을 잘라서 길을 메우며, 물이 깊은 곳에는 수레를 교량으로 삼으라고 명령하였다. 황제는 스스로 나무를 말 안장걸이에 묶어서 일을 도왔다."

이 요택길은 당태종이 고구려를 원정하러 올 때 지나온 길이다. 당시 당군 공병대가 미리 요택에 흙을 덮고 다리를 놓아 길을 만들어 두었다. 그래서 행군이 지체되지 않고 이틀 만에 요택을 통과하였다. 그때 요택을 통과한 당태종은 설치한 다리를 모두 거두라고 명령하였다. 퇴로가 없음을 보여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만큼 고구려 정복의 자신감이 넘쳤다.

장담했던 전과를 거두지 못하고 되돌아가는 길에 요택길을 다시 메우면서 당태종은 그때 다리와 길을 없애버린 자신의 결정을 내내 후회했을 것이다. 고구려로 출정할 때 이틀밖에 걸리지 않았던 요택길이 되돌아올 때는 10여 일이 걸렸다. 요택을 어렵사리 통과한 당군은 10월 1일 요하의 지류인 발착수(渤錯水)를 건넜는데, 눈보라가 몰아쳐 많은 병사들이 얼어죽어 갔다.

전장에서 오랫동안 기력이 쇠잔해진 병사들은 패전이나 다름없는 귀환길이라 그런지 늪지대와 추위에 전투보다 힘든 악전고투를 치러야 했다. 당태종 자신도 귀환길에 등창이 생기고 이 때문에 꽤나 고생한 듯하다.

10월 11일에 당태종은 영주(營州·지금의 차오양 일대)에 도착하였다. 고구려 원정 시 거란과 해의 수령들을 종군시켰는데, 영주에서 거란의 군장과 노인 등을 모아 물건을 내려주고 번장인 굴가(窟哥)를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으로 삼아 그들을 포상하며 회유하였다. 앞으로 고구려 정벌을 위해서도 거란에 대한 통솔력을 지속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10월 18일 군사를 돌이킨 데 대한 반사(班師) 조서를 내렸는데, 자신의 고구려 원정이 승리했음을 선포하고 그 성과를 자랑하고 있다. 그 내용은 잠시 뒤 소개하겠다. 10월 21일에 당태종은 임유관에 도착했고, 여기까지 마중 나온 태자와 만났다. 11월 중 유주(幽州·지금의 베이징 일대)에 이르렀다.

그러나 당태종은 바로 장안으로 가지 않았다. 북쪽 설연타(薛延陀)에서 진주가한(眞珠可汗)의 뒤를 이은 다미가한(多彌可汗)이 당태종의 군대가 고구려 원정에서 돌아오지 않은 상황을 틈타 당의 하주(夏州)을 공격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태종을 12월 14일 병주(幷州·지금의 타이위안 일대)에 행차해 설연타와의 전쟁을 후방에서 독려하였다. 고구려 원정을 다녀온 이도종, 설만철 등을 쉴 틈도 없이 설연타와의 전선에 투입시켰다. 설연타의 대군을 격퇴시킨 뒤에야 비로소 장안으로 향하였다.

당태종이 장안으로 가지 않고 병주에서 설연타와의 전쟁을 지휘한 데에는 그 정세가 급박한 점도 있지만 처음 의기양양하게 출정했던 고구려 원정에서 거둔 성과가 없었던 점도 다소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싶다. 결국 설연타의 침공을 물리치는 성과를 거둔 데 다소나마 위안을 얻고 장안으로 돌아가는 체면을 세웠다고 본다면 지나친 추측일까.

당태종 /사진=바이두

당태종이 장안으로 돌아온 때는 3월 7일이었다. 요하를 건넌 때로부터도 5개월 가까운 시일이 흐른 뒤였다. 당태종은 장안에 도착하자마자 승전의 예를 행하였다. 그 광경을 '책부원구'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포로를 바치고 수급을 주며 법가(法駕)를 준비하여 개선하는 예를 갖추었다. 만이(蠻夷)군장(君長) 및 도성의 사대부와 여자들이 길에 늘어서서 목이 메어 모두 만세를 불렀다."

당 입장에서는 고구려 정벌의 애초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645년 고구려 원정을 당태종의 승전 목록에 하나 더 추가하는 절차를 밟은 것이다. 이미 10월 18일 영주에서 내린 반사 조서에 이 전쟁의 성과를 이렇게 정리하고 있었다.

"현도(玄菟)·횡산(橫山)·개모(蓋牟)·마미(磨米)·요동(遼東)·백암(白巖)·비사(卑沙)·맥곡(麥谷)·은산(銀山)·후황(後黃) 등에서 이기니 합하여 10여 성이고 모두 획득한 호가 6만이며 구가 18만이다. 신성(新城)·주필(駐蹕)·건안(建安) 3대진(三大陣)을 합하여 전후로 참수한 것이 4만여 급이고 그 대장을 항복시킨 것이 2명이며, 비장 및 관인·추장·자제는 3500명이고 병사는 10만명인데, 모두 양식을 지급해 놓아주어 본토로 돌려보냈다. 또 획득한 말과 소는 각각 5만여이고 관곡(舘穀)은 100일치여서 양식을 채우는 비용을 빌지 않았으니, 도병(徒兵) 수만이 모두 겸승(兼乘)의 노래를 불렀다."[전당문(全唐文) 태종황제 파사조(班師詔)]

처음 출정할 때 평양성 함락과 연개소문에 대한 치죄를 호언장담하던 바에 비하면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성적표였다. 그러면 위 조서에 기록된 것은 모두 사실일까. 여러 기록을 대조해 살펴보면 위 조서에 보이는 내용도 과장이 많이 섞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10개성을 함락시켰다고 했는데, 기록에서 확인되는 성은 개모성, 요동성, 백암성, 비사성 4곳뿐이다. 후황성과 은산성의 경우 주필산 전투 직후 후황성과 은성(銀城) 두 성이 달아났다는 기록이 있다. 아마 이 두 성은 안시성에서 지금의 장하로 이어지는 교통로상에 위치한 소규모 성인 듯하다. 당군의 공세를 예상하고 후방으로 군사와 주민들을 이주시켰을 것이다. 이 비어 있는 두 성을 당태종은 전과 목록에 넣은 것이다.

현도성은 처음 이세적 군이 요하를 건넌 직후 공격한 첫 번째 성이었다. 하지만 현도성 함락 사실은 어느 기록에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왜 10성에 포함되었는지는 의문이 있다. 또 10개성의 기록 순서로 보아 횡산성은 아마도 현도성과 개모성 사이에 위치한 성인 듯하고, 마미성은 개모성과 요동성 사이쯤에 위치한 성으로 보인다. 맥곡성은 당군의 이동 경로로 감안하면 비사성 인근이나 비사성에서 건안성 사이에 위치한 성으로 추정된다. 이 3성을 공격한 기록이 없는 점으로 보아 현도성이나 개모성보다 작은 성으로 추정된다.

당군에게 함락되었다는 이들 10개성 중에서 당시 고구려의 방어선상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성은 요동성, 개모성, 비사성 3성이다. 현도성은 함락 여부가 불분명하고, 백암성은 중요도가 떨어지며, 나머지 5개성은 위 3개 주요 성 인근에 위치하거나 당군의 이동 경로상에 위치한 소형 성곽일 것이다. 이런 작은 성들까지 승전 목록에 넣은 것을 보면 당시 당태종이 전과 목록을 채우기에 얼마나 궁색했는지 짐작할 수 있겠다.

신성 전투, 주필산 전투, 건안성 전투의 승리를 꼽고 있지만 성과로 기록된 대부분이 주필산 전투의 전과였을 뿐이고, 신성과 건안성 전투의 결과는 합하여 수천급에 불과하였다. 항복한 대장 2명은 주필산 전투에서 패전한 고연수와 고혜진이고, 포로가 된 비장 및 관인·추장·자제 3500명 역시 대부분 주필산 전투의 전과다.

포로로 잡았다가 방면했다는 병사를 10만명이라고 하였는데, 이 역시 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주필산 전투에서 고연수 등과 함께 항복한 군사 수가 3만6800명, 요동성에서 1만명, 백암성에서 2000명, 개모성에서 수천 정도, 비사성 수천 정도다. 당측 기록에서 대략 5만~6만명이 확인될 뿐이다. 물론 기록에 남지 않은 전투 전과가 있다고 해도 그 포로 수가 과연 4만명이 넘었을까. 그런 정도라면 상당히 격렬한 다수의 전투가 예상되는데 기록상 찾아지지 않는다.

획득한 호가 6만이며 구가 18만이라고 했는데, 성을 함락시켜 얻은 전과를 보면 요동성민 4만명, 개모성민 2만명(군사 포함), 백암성민 1만명, 비사성 8000명(군사 포함) 등 주요 성의 주민을 다 합쳐도 8만명에 불과하다. 10만여 명이 나머지 성에서 포로로 삼은 주민 수라는 뜻인데 이들 소성에서 과연 10만여 명의 주민을 얻을 수 있었을까. 어쨌든 당태종은 18일 귀환을 명령하면서 요동성, 개모성, 백암성 주민을 먼저 요서 너머로 이주시켰다.

이외에도 좀 더 따져볼 게 있지만 승리를 선언한 조서 내용이 적잖게 과장되었음을 보여주기에는 위의 언급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이와 반대로 당군의 피해에 대해서는 적잖이 은폐하고 있다. '신당서' 고려전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처음 갈 때에 군사가 10만이고 말이 1만필이었는데, 돌아왔을 때 군사는 죽은 자가 1000여 명이고, 말은 10마리 중 8마리가 죽었다. 수군은 7만(4만여)명이었는데 죽은 자가 수백 명이었다."

다른 기록이 없는 상황에서 개모성이나 요동성, 안시성 전투의 상황을 돌이켜보면 위의 기록이 얼마나 자신의 병력 손실을 감추고 있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예를 들어보자. 평양도행군총관을 맡은 장문간(張文幹)은 귀국 후 11월에 죄를 물어 주살되었는데, 그 죄목이 바다를 건너면서 배를 많이 전복시켰다는 것이다. 총관을 사형시킬 정도였으면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는지 짐작하게 한다. 수군의 귀환길이 결코 쉽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과 수백 명 사망 운운하는 기록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이렇게 전과를 과장하고 손실을 은폐하여 승전을 과시다고 하더라도 속으로는 고구려 원정에 실패하였음을 부정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누구보다 자존심이 무척 강한 당태종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천하무적을 자랑했던 그로서는 그 실패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다시 고구려 원정을 준비했다.

당태종 역시 수양제와 마찬가지 길을 가기 시작한 것이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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