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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행복은 '변장한 고통', 탐욕·분노·어리석음 버려야 진짜 평화"

김한수 종교전문기자 입력 2020.08.06. 18:03 수정 2020.08.06.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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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만해평화대상 수상자 태국 포티락 스님 인터뷰
2020만해평화대상 수상자 태국 포티락 스님/아속공동체 제공

2020만해평화대상 수상자인 태국 아속(Asoke·‘환희’란 뜻의 태국어) 공동체 설립자 포티락(86) 스님은 “평화는 진정한 지혜로써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에서 해방될 때 비로소 실현될 수 있다”며 “만해대상과 아속 공동체는 인류를 위해 좋은 일, 가치 있는 일, 고귀하며 헌신적인 삶이라는 공통의 사명감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포티락 스님은 청년 시절 태국 연예계의 스타의 명예와 부를 버리고 출가해 만 30세 때인 1974년 ‘무욕’과 ‘청빈’ 그리고 자급자족을 하는 아속 공동체를 창립해 40여년째 이끌고 있다. 승속(僧俗)의 구분을 떠나 사부대중이 함께하는 아속 공동체는 태국 전역에 9개 공동체에 학교와 농장, 유기농 비료공장 등을 두고 자급자족하면서 가난한 이웃에게 저렴한 가격에 음식과 의약품 등을 공급하고 있다. 포티락 스님과 이메일 인터뷰를 통해 그가 추구하는 ‘평화’와 ‘행복’의 의미를 들었다.

2020만해대상 시상식은 12일 오후 2시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 하늘내린센터에서 열린다. 다음은 일문일답.

-스님의 일상생활을 소개해주시겠습니까.

“거의 87세에 가까운 나이라 건강 때문에 간호팀 조언에 따라 6시에 기상해서 밤 9시에는 잠자리에 듭니다. 기상 시간은 엄격히 지키는 편이지요. 6시보다 조금 일찍 깼을 때에도 눈을 감고 좀더 누워있다가 6시 정각에 일어납니다. 밤에는 9시 이전에는 잠자리에 들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요.

하루하루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달라졌습니다. 40대에 제가 법문을 시작했을 무렵엔 새벽부터 해질 때까지 하루에도 서너번씩 법문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그 시절엔 새벽 2시에 기상해 법문 원고를 썼지요). 우리가 공동체를 만들었을 때에는 생존을 위해 다양한 직업 프로젝트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때 저는 육체노동과 행정 업무을 관장했고, 옳은 생활 규칙을 만들어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저는 유기농과 무화학 농법, 청정 비료, 고품질 식품을 만드는 일이 아속 공동체의 주요한 큰 흐름이 되도록 하는 일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이런 일을 하는 한편, 저는 불법(佛法)을 가르치고 법문하고 글 쓰는 일에 매진했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수백권의 책을 냈고 100만권 이상 인쇄했습니다.

포티락 스님이 등잔을 켜고 집필하고 있다.

건강에 관해선 저는 늙어가는 중입니다. 사실 제가 언제 죽게 될 지 정확히 알고 있지만, 여기서 제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은 건강을 회복하고, 삶을 확장시킬 수 있는 영적(靈的)인 힘을 해방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의 장수가 그것을 증명해 줄 것이고 그것은 불교와 인류에게 이로울 것입니다.”

포티락 스님의 아침 운동. 스님은 오전 6시 기상, 오후 9시 취침을 규칙적으로 실천한다.

-청년 시절엔 방송계 스타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 환경을 떠나 출가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방송 MC와 작곡가로 활동했지요. 그렇지만 인기와 영광의 세계를 떠나게 된 것은 논리적으로 진실입니다. 제가 결코 최고의 배우가 되거나 부유해지지 않을 ‘좋은 업(業)’을 가졌다는 것은 일견 부조리한 것처럼 들릴 것입니다. 제가 큰 부(富)를 얻거나 유명한 수퍼 스타가 됐다면 거울에 비친 제 모습에 현혹됐을지도 모릅니다. 역설적으로 그런 높은 수준의 명성과 부에 오를 수 없었다는 것이 좋은 점이었습니다. 덕분에 속세의 것들을 버리기 쉬웠습니다. 대신에 불법(佛法)을 더 풍부하게 할 수 있었지요. 결국, 저는 붓다의 가르침을 지키겠다는 큰 결심을 할 수 있었고, 불법의 길을 계속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연예계 스타 시절의 포티락 스님.

-아속 공동체는 어떤 계기로 시작했습니까.

“아속 공동체는 진리와 함께 시작했습니다. 돌아보면 저는 아속 공동체가 어떻게 될지에 대한 특별한 기대나 비전이 없었습니다. 솔직히 첫 공동체인 파톰(Pathom) 아속을 시작할 때, 저는 공동 소비운동까지 펼치는 공동체가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놀랍게도, 아속 공동체는 항상 시작부터 공동 소비 기능을 갖췄습니다. 아속 공동체는 처음엔 저와 함께 시작했습니다. 이후 저의 팀이나 다른 아속의 제자들이 공동체를 설립하는 데 필요한 미덕을 제시했습니다.(이런 미덕의 중요성은 사랑과 존경을 중심으로 발전합니다. 저는 그간 출간한 책에서 10가지 차원의 사랑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이 제자들 팀은 일생 동안 항상 저를 도왔습니다. 임무를 완수하는 큰 보살행을 위해서는 이러한 훌륭한 조력팀이 필요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쉽게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세상사는 자명한 이치로 드러납니다. 저에게 존재의 의미는 현실을 뛰어넘는 가르침 즉 로쿠타라(lokuttara)입니다. 속세의 이기심과 달리 로쿠타라는 이타적이며 늘 타인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제가 아속 공동체를 시작한 것은 ‘왜’라는 이유를 넘어섭니다. 진리, 자명한 이치 그리고 아속이 아속다워질 수 밖에 없는 것이 있을 뿐입니다.”

-아속 공동체는 의식주뿐 아니라 약(藥)과 공산품까지 생산·자급자족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다양한 분야로 활동을 넓힌 이유가 있습니까.

“아속 공동체가 다른 공동체와 다른 점은 ‘로쿠타라’ 공동체라는 점입니다. 로쿠타라 구성원은 항상 타인을 생각하고 그들을 위해 행동합니다. 로쿠타라 구성원은 정직하고, 직설적이며 때론 무뚝뚝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세속적인 사람들은 속임수와 교묘함으로 타인의 것을 자신이 취하려 합니다.

우리는 항상 자급자족을 위해 노력합니다. 우리 스스로에게 의지하려면 우리 손으로 직접 일을 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일이 벌어지길 기다리지 않는다. 우리는 일을 벌인다.” 생존을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은 농사와 음식입니다. 우리는 먹을 것을 생산할 때에만 스스로 생존할 수 있습니다.

붓다는 먹을 것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재화라고 선언했습니다. 풍족한 식량은 식량 가격의 저렴함(접근성)만큼 중요합니다. 이는 우리가 가난한 대중들에게 좋은 품질의 청정 음식에 접근할 기회를 주기 위해 지속적으로 좋은 품질의 청정 음식을 싼 값에 생산하는 이유입니다.

포티락 스님이 공동체 회원들과 함께 육체노동을 하는 모습.

태국은 생존을 위해 농업 기술과 식량 생산에 의존해야 합니다. 태국은 산업생산의 우선 순위를 농업에서 제조업으로 옮겨서는 안 됩니다. 아속 공동체는 스스로 식량을 생산해 자급할 수 있습니다. 의복과 주택 같은 다른 필수품은 사치할 필요가 없으며 기본적 수준이면 충분합니다.

아속 공동체가 왜 다양한 분야로 확장했는지에 대한 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여러 학문 분야에 걸친 (다양한) 기술은 숙달하기 좋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가치가 있으며 다른 사람을 착취하지 않습니다. 아속 공동체와 저는 우리의 핵심적인 믿음에 대한 헌신을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과 기술을 계속 축적할 것입니다.

저는 항상 “양보다 본질에 집중하고, 달리기보다는 끌기를 선호하며(편안함보다 거친 일을 선택하며), 저항 없이 진리를 추구하며, 넓은 언저리보다는 핵심을 더 공고히 하자”라고 말해왔습니다. 이는 항상 우리의 생활 모토가 돼왔습니다.”

-아속 공동체는 이기심과 욕망을 절제하며 평등과 행복을 추구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기심과 욕망은 인간의 본능인데, 이를 절제하는 시스템은 어떻게 가능한지요.

“우선 평등에 대해 정의하겠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모두가 평등해지는 것은 불가능하고 비현실적입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지 않기 때문에 절대 평등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가장 작은 원자조차도 어느 정도의 레벨 차이가 있습니다. 실재하는 물질이 하나 이상 있다면 자연스럽게 우열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특히 우리가 영적 존재나 지식과 감정 같은 추상적 개념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절대 평등 개념을 적용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실제의 삶에서 사회에는 우월한 층과 열등한 층 양쪽이 포함됩니다. 여기서 우월성이란 도덕 수준과 시민의식 그리고 영적 미덕으로 구분됩니다. 제 생각으로는 우월성은 부나 권력이 아니라 무형적 차원의 영적 고귀함으로 구분됩니다.

평등이란, 영적 우월성을 가진 사람들이 지혜와 미덕으로 열등한 사람들에게 양보할 때에만 실현될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열등한 사람들은 미덕의 수준이 낮고 이기적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욕구와 현재 상태보다 더 높은 곳을 향한 열망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열등한 사람들은 희생의 미덕에 감사하고 자신의 욕망을 통제하는 법을 배워야합니다.

사회의 단합을 유지하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 영적으로 우월한 사람들이 열등한 사람들처럼 행동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이타적 행동은 도덕적 우월성을 뜻합니다. 동정심과 지혜로써 이타적 희생과 상대를 인정할 경우에만 평등 개념에 부합하는 운동장이 실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행복에 대해서도 정의해보겠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행복이란 환상의 가면을 쓴 고통입니다. 행복과 고통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양면은 항상 번갈아 위쪽으로 나옵니다. 고통을 피하려면, 행복 또한 버려야 합니다.

기도하는 포티락 스님.

붓다는 행복과 고통에 대해 깨달은 후 우리에게 어느 한쪽에 깊이 치우지는 것에서 벗어나 중도(neutral sensation)에 이르는 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우리는 감각에 끌려다니거나 감각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중도를 유지해야 합니다. 마음의 중도를 지킬 수 있는 사람들은 실제로 나타난 일을 따라 (헛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마음의 중도를 얻은 사람은 고통에 빠진 사람을 도울 수 있고, ‘변장한 고통’인 행복의 진면목을 이해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양극단에 대한 집착과 탐욕을 내려놓는다면 끝없는 전쟁은 끝나고 평화가 찾아올 것입니다. 그럴 때만이 공(空)과 중도가 실현됩니다. 중도는 편협한 것이 아니라 유연하며 평화와 연대를 위해 어느 쪽이건 함께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한 사람이 인류를 도울 수 있는 길입니다.

역설적으로 가장 사악한 종류의 믿음은 쾌락주의입니다. 쾌락주의는 행복에 빠지는 즐거움을 말합니다. 그들은 이원론(二元論) 즉 행복과 고통의 본질을 구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행복을 선행으로 얻을 수 있은 것처럼 연결하고 마치 행복이 실재하고 영원할 것처럼 집착합니다. 그들은 실제로 행복을 만들어 내고 꾸미는 것은 마음이 벌이는 일이라는 점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결국 우리는 중도에 이르기 위해서 행복과 고통의 양변(兩邊)을 버려야 합니다. 중도의 단계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는 점진적으로 이타심의 관점을 개발하고 방종을 삼가야 합니다. 이타적 개인은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타인의 이익을 위해 바치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취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엔 이런 사람들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는 보살의 특징입니다.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타인을 고통과 행복(변장한 고통)으로부터 구하기 위한 동정심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인류의 선에 대한 이타적 욕망만을 가진 가장 고귀한 사람의 가장 훌륭하고 가장 큰 욕망입니다.

태국어로 ‘장애물’은 천국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상징적으로 천국은 번영과 문명으로 그려지며, 지옥은 썩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장애물은 실제로 마주하기 좋은 대상입니다. 장애물이 없는 삶이란 풍요롭지 않을 것입니다. 적정한 크기의 장애물은 우리의 노력과 인내를 쌓게 해줍니다. 그 덕에 우리는 성큼성큼 전진하지요.

실제로 저는 제자들에게 욕망을 줄이는 방법을 가르침으로써 덜 이기적이 되도록 깨우쳐줍니다. 그러나 마을과 학교, 사원 등으로 구성되는 아속 공동체는 제자들이 자발적으로 저의 가르침을 실질적 삶의 교훈으로 받아들여서 변화하기로 결심했을 때 자연스럽게 존재하게 됐습니다. 아속 공동체 구성원들은 진정한 믿음과 지혜를 통해 공동체에 정착합니다. 이는 수준 낮은 도덕을 가진 이가 아속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긍정적 기능을 합니다. 아무도 아속 공동체에 와서 살도록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서로 도우며 큰 선행을 베풉니다.”

-세계적으로 종교의 영향력은 줄고 있습니다. 종교가 영향력을 회복하려면 어떤 일을 해야 할까요.

“종교의 영향력이 줄어든다는 말은 맞습니다. 현대 세계에서 앞서나갈 종교는 로쿠타라 즉 출세간(出世間)적인 종교입니다. 만해 한용운 선생은 저보다 앞서 길을 개척한 불교 스님이었습니다. 저는 만해 선생의 진정한 종교적 헌신에 감사드립니다. 만해 선생은 제가 불과 10살 때 입적하셨습니다. 저는 너무 어렸고 만해 선생 역시 제가 선생 사후에 불교의 정신을 지키며 보살행의 후배 도반(道伴)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모르셨을 것입니다.

루쿠타라의 개념을 소개하는 데 도움을 주신 부다다사 비쿠(Buddhadasa Bhikku)를 비롯한 다른 보살처럼 만해 선생은 제가 장식할 길을 안내해주셨습니다. 제가 어떻게 만해 선생, 아인슈타인, 라마4세 왕, 간디, 부다다사 스님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 모두가 같은 보살행을 하는 도반이기 때문입니다.

포티락 스님(오른쪽)이 아속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법문하는 모습.

만해 선생의 후학들로 구성된 만해대상심사위원회는 우리가 공동으로 이뤄야할 사명에 대한 저의 평생에 걸친 노력을 평가해주었습니다. 자명하게도, 우리의 약속은 실제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일에 공명(共鳴)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유사성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부정하거나 반론의 여지가 없으며 동의할 수 밖에 없는 이치입니다.

세계의 여타 종교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있는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로쿠타라 종교에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종교가 영광을 되찾기 위해 무언가 추가로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설득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그동안 집중해온 일을 계속 추구하면 될 뿐입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원칙을 계속 전파하면서 우리의 진정한 약속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진실은 결국 드러날 것이며 진실함을 찾는 지적인 사람들은 스스로 무엇을 포착할 것인지 스스로 알아낼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각장애인조차도 보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행동을 통해 이 같은 진리를 증폭하고 확대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입니다.”

-코로나19 사태 이전과 이후의 세계는 완전히 달라질 것이라고 합니다. 스님은 어떻게 전망하시나요.

“저는 기대가 없습니다. 희망은 고통의 원인 중 하나입니다. 저는 희망을 갖지 않습니다. 다만 실제로 할 일을 할뿐입니다. 저는 제가 알고 믿는 바에 따라 제 능력 안에서 노력하고 행동할 것입니다. 올바른 견해[正見]의 안내에 따라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올바른 견해와 이해를 함께 가진 사람들의 협력은 이 세상에서 진리를 효과적으로 진전시키기에 충분한 규모를 제공할 것입니다.”

포티락 스님이 아속 공동체에서 재배한 농산물을 앞에 두고 법문하는 모습.

-만해대상은 만해 한용운 선생을 기념해 만들어졌습니다. 만해 선생은 일제 식민지 시절 승려이면서 불교개혁과 사회개혁에도 앞장섰습니다. 만해 선생의 일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만해 선생은 자신의 믿음과 사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사명은 서로 받아들여지는 지점으로 모아져야 합니다. 만해대상심사위원회는 만해평화대상을 통해 저의 헌신을 인정해주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같은 진리에 대해 같은 종류의 헌신을 공유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인류에게 좋은 일을 위해 가치있고 고귀하며 헌신적인 삶을 함께 살고 있습니다. 이 미덕은 보살행의 신성함이기도 합니다. 만해 선생이 자신의 임무를 아름답게 완수했다는 사실은 우리를 자랑스럽게 만듭니다. 보살행 도반을 대표하여, 손에 손잡고 인류를 위해 우리의 능력 안에서 최선을 다해 창조하고 증진시킵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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