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재의 시시각각] 가난해야만 국민인가

이정재 2020. 8. 7. 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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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과 편 가르기, 가격 통제 범벅
누구를 위한 과속·과잉인가
23차례 주택 정치로도 부족한가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주택 정책의 본질은 속도다. 과하면 탈이 난다. 예컨대 암세포를 죽이는 건 쉽다. 과하게 항암제를 쓰면 된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의사는 없다. 숙주인 사람이 먼저 죽기 때문이다. 부동산도 같다. 집값 잡는 건 쉽다. 세금과 규제를 독하게 하면 된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정부는 없다. 주택은 물론 금융과 경제시스템이 망가져 보호해야 할 서민이 먼저 생사 위기에 몰리기 때문이다.

23번째 부동산 대책은 과속·과잉 범벅이다. 우선 부자에게 매긴 보유세. 이건 징벌세나 다름없다. 1주택자도 비싼 집에서 30년 살면 집을 세금으로 바쳐야 한다. 징벌은 잘못에 대한 반대급부다. 비싼 집을 산 게 징벌 받을 잘못인가. 부자의 불로소득이 배 아프다면 그것만 환수하면 된다. 양도차익 100% 환수법이라도 만들어 한 푼의 이득도 못 보게 하면 된다. 세금으로 집 뺏길 걱정하는 나라를 정상 국가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여당 의원이 “부자에게 세금 더 뜯는 게 왜 나쁘냐”며 “집값이 오르는데 왜 엄살이냐”고 되묻는 건 아무래도 정상이 아니다. 게다가 정부·여당은 이번 대책으로 집값이 내려갈 것이라고 호언장담하지 않았나. 세금은 과잉 금지가 원칙이다. 부자란 이유로 매기는 과잉 세금은 형벌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가난해야만 국민인가. 가난한 국민은 영원히 가난해야 하나. 부자 징벌세를 만든 국회가 답해야 한다.

다음은 전세의 빠른 소멸. 전세는 두 가지 신화를 먹고 산다. 하나는 부동산 불패, 또 하나는 고금리다. 둘 중 하나라도 작동해야 살 수 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두 신화가 모두 깨진 적이 있다. 전셋값은 폭등했고 월세 놓는 집이 전세를 추월했다. 속도가 너무 빨라 “미친 전셋값에 갇힌 대한민국” 소리가 나왔다. 월세에 갇힌 빈곤층은 더 죽어났다. 전세→월세 전환 속도를 늦추는 데 정책이 집중됐다. 백약이 무효였다. 그렇게 죽어가던 전세를 거짓말처럼 되살린 게 이 정부다. 치솟는 집값이 전세의 화려한 귀환을 불렀다.

그래 놓고 이번엔 전세를 갭투자의 원흉으로 몰아 처형 중이다. 급속한 월세 전환의 고통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자 한 여당 의원은 “누구나 월세 사는 세상이 온다”며 “월세가 왜 나쁜가” 되물었다. 과속을 얘기하는데 자동차가 왜 나쁜가 동문서답하는 꼴이다. 백번 양보해 월세 세상이 불가피하다 치자. 3년 내내 뭐하다 지금 이 난리인가. 입에 붙은 야당 탓, 보수 언론 탓일랑 하지도 말라. 헌법보다 바꾸기 어렵다는 선거법을 바꾸고 공수처법도 밀어붙인 여당이 그깟(?) 임대차3법을 처리 못했겠나. 의지가 없었을 뿐이다.

어차피 사라질 전세라지만 야당의 윤희숙 의원 말처럼 “빨라서도”, 경실련의 전망처럼 “느려서도” 안 된다. 그 중간 어디에 연착륙해야 한다. 그걸 덜 고통스럽게 해내는 게 정부의 실력이다. 이럴 땐 역발상도 필요하다. 예컨대 세입자 지원에서 집주인 지원으로 바꿔 보는 것이다. 전세를 안 올리고 10년 유지하면 양도세 감면, 소득공제 혜택을 주는 식이다. 그런데 그런 고려는 아예 없다. 오직 “세입자는 선, 집주인은 악”이라며 부자·서민, 임대·임차인 갈라치기뿐이다. 그러니 코앞으로 다가온 대선 때문에 다시 ‘편 가르기’가 급해진 것 아니냐는 소리가 나오는 것 아닌가.

전세의 종말은 반드시 더 비싼 월세 세상을 낳고, 서민의 삶을 더 어렵게 할 것이다. 월세에서마저 밀려난 빈곤층엔 사글세의 귀환을 부를 수도 있다. 몇 달 치 임대료를 주고 몇 달만 사는 사글세는 주택임대차보호법의 보호도 제대로 받지 못한다. 23번째의 주택 정치가 불러올 험한 세상을 보며 전세가 입이 있다면, “나 대신 사글세랑 잘 살아보슈” 할지도 모를 일이다. 찬성표를 던진 180여 명의 범여권 의원 중 몇이나 자신의 표가 불러올 세상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봤을까. 국회가 기가 막힌 게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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