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선엽 '셀프 영웅화', 연구자들 비판없이 받아적었다"

옥기원 2020. 8. 7. 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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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편찬연구소 서상문 전 책임연구원의 '고백'
종신 자문위원장 꿰차고 공적 미화
입다문 과오들, 재평가 필요
"폐쇄적 분위기에 비판적 질문 못해
편향된 이야기 대중에 확대 재생산"
연구소쪽 "특정인 미화 의도 없어"
죽기 전까지 30여년 '자문위원장'
서상문 전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은 백선엽씨가 사망 전까지 군사편찬연구소 자문위원장이라는 자리를 활용해 자신을 영웅화했다고 비판했다. 한국전쟁 당시인 1951년 8월, 자신의 막사 앞에서 포즈를 잡은 백선엽 육군소장. <한겨레> 자료사진

“백선엽 장군은 사망 전까지 군사편찬연구소 자문위원장이라는 자리를 활용해 자신을 영웅화했습니다. 공적인 자리를 이용해 교묘하게 과오를 감추고 공적을 미화한 것입니다.”

지난 5일 서울 은평구 자택에서 만난 서상문(62) 박사는 고 백선엽 예비역 육군대장의 한국전쟁기 공적이 스스로에 의해 부풀려졌다고 증언했다. 서 박사는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약 13년간 연구원으로 일하며 백 장군이 종신 자문위원장 자격으로 한국전쟁과 관련한 자신의 공적을 미화하고, 소속 연구자들이 백 장군의 이야기를 비판 없이 기록하는 과정을 지켜본 인물이다. 박경석 예비역 준장 등 참전 장성들 사이에서 백선엽의 ‘셀프 영웅화’에 대한 비판이 나온 적은 있지만, ‘셀프 영웅화’ 산실로 지목된 군사편찬연구소 관련자가 백선엽 비판에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먼저 서 박사는 백선엽 영웅담이 확대재생산된 데는 역사적 사실을 균형 있게 기록하는 역할을 망각한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이 크다고 지적했다. 그는 “연구원들이 백 장군에 대해 비판적인 질문을 할 수 없는 폐쇄적 분위기였고, 결과적으로 균형 잡힌 사실이 기록되지 않아 편향된 이야기들이 대중에게 전파된 결과를 낳았다. 전직 연구원으로서 부끄럽다”며 “지금이라도 연구소가 백 장군과 한국전쟁 당시 역사적 사실을 균형 있게 다루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상문 전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이 연구소가 발간한 책을 보며 잘못 기록된 내용들을 설명하고 있다. 옥기원 기자 ok@hani.co.kr

서 박사는 사실상 백선엽씨의 말이 ‘사료’였다고 지적했다. 그는 “자문위원장인 백 장군은 독립군을 탄압한 자신의 간도특설대 활동이나 전쟁 초기 1사단장으로서 실책은 전혀 말하지 않고, 공적인 다부동 전투와 평양 입성 전투만을 과장했다”며 “내막을 살펴보면 다부동 전투는 미 공군 공습과 2개 연대 병력 등의 전폭적인 지원이 방어 성공의 결정적 요소였고, 인근 영천 전투나 낙동강 서부지역의 마산 전투 등도 중요한 전투였는데 다부동 전투만 지나치게 미화됐다”고 했다. 서 박사는 “한국전쟁 때 백 장군 혼자서 대한민국을 구한 것처럼 기록하거나 떠받드는 것은 명백한 역사 왜곡”이라며 평양 입성 전투와 관련해서도 “사실상 북한군 주력 부대가 모두 빠져나간 뒤 무혈입성이라서 과대 포장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했다.

실제 군사편찬연구소가 2005년에 발간한 한국전쟁사 2편 ‘북한의 전면남침과 초기방어전투’를 보면, 전쟁 발생 전날 밤 장교구락부 파티 내용과 전방이 북한군에 밀리는 상황이 열악한 국군의 상황 때문이라고 뭉뚱그려 언급됐을 뿐, 당시 1사단장으로서 백 장군의 책임 등은 구체적으로 서술되지 않았다. 반면 5편인 ‘낙동강 전선 방어작전’ 부분에선 백 장군이 이끄는 1사단의 행적을 중심으로 다부동 전투가 서술되는데 백 장군의 회의 사진과 독사진, 사단사령부로 사용된 동명초등학교에 세워진 ‘백선엽 전적비’ 사진도 실리는 등 그의 업적에 집중해 서술돼 있다.

이와 관련해 군사편찬연구소 관계자는 “한국전쟁에 대한 연구라 백 장군의 이전 과오까진 서술할 수 없었다. 전체적 관점으로 사실을 서술한 것이지 특정 사건이나 개인을 미화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군사편찬연구소가 발간한 한국전쟁사 5편에서 ‘백선엽 공적비’ 사진 등이 실리는 등 백 장군의 공적이 지나치게 미화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 박사는 전쟁 발생 초기 백 장군의 과오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개성, 문산, 파주 등지가 주요 방어지역인 백선엽 1사단장이 한 일은 후방으로 후퇴하면서 패잔병을 모으는 일뿐이었다는 지적이 있고 육군본부 장교구락부 낙성 기념 축하 파티에 참석해 부대 복귀가 늦었다는 의혹과 전방이 속수무책으로 뚫려 서울이 조기에 점령당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지적이다.

<한겨레> 취재 결과, 백 장군은 병상에 누운 상태에서도 자문위원장직을 유지했다. 공직에서 은퇴한 뒤 30여년간 이어진 ‘종신직’이었다. 연구소 관계자는 “지난 6월 한국전쟁 70주년 행사 때문에 자문위원장직 유지가 불가피했다”고 설명했다. 국방부는 백 장군에게 연구소 내 사무실과 접견실, 관용차량, 중령급 개인비서, 활동비 등을 제공했다. 차량은 필요하면 배차해 이용했고, 활동비는 업무량에 따라 월 200만원 한도로 지급했다는 게 연구소 쪽 설명이다. 백 장군은 건강이 악화하기 전까지 매일 사무실에 출근해 자문에 응하고 외부 인사들을 만난 것으로 전해졌다.

서 박사는 백선엽씨가 죽기 전에라도 친일 활동을 사과했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백 장군은 ‘이이제이(적을 이용해 적을 제거한다)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빠져든 것’이라는 변명으로 간도특설대 활동을 합리화했다”며 “한 평생 국가의 녹을 먹은 사람이 죽기 전까지 치명적인 잘못을 사과하지 않은 것은 명백한 범죄”라고 비판했다.

옥기원 기자 o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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