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데이 칼럼] 왜 그 자리에 있는가
집권세력은 가졌다고 믿나
옳은 사람이 옳은 짓 한다
안창호의 말 새겨 따르기를
도산 안창호가 1925년 1월 동아일보에 연재했던 ‘동포에게 고하는 글’이다. 엄혹한 시절, 사그라지는 국민의 애국심에 경종을 울리기 위함이었다. 이처럼 길게 도산의 글을 인용한 건 또 다른 의미로 엄혹한 시절, 그 엄혹을 생산하는 (국민 아닌) 집권세력이 음미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서다. 그들이 과연 나라와 국민에 책임감을 가지고 국정을 운영하고 있다고 믿는 건지 묻고 싶어서다.
그들이 과거 나라와 국민을 위해 얼마나 눈물 뿌리고 분언 토하며 위험을 무릅썼는지는 궁금하지 않다. 반대로 권력자 주변에서 얼쩡거리다 눈에 들어 한자리 차지했다 해도 뭐라 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들이 지금 나라와 국민의 앞날을 자신의 미래보다 한치라도 앞에 두는 ‘영원한 책임감’을 가지고 일하는 건지는 따져 물어야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부정적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법무부가 검찰총장을 쫓아내는 걸 지상목표로 삼은 듯 행동할 수 있겠나. 장관이 직접 수사지휘를 하고 지검장이 총장에게 항명하며 부장검사가 몸을 날리는 액션까지 보이고도, 총장 측근을 엮을 수 없던 코미디는 뭐라 설명하겠나. 그러면서 입에 달았던 검찰개혁안이라는 게 고작 식물 검찰총장을 만드는 거였다니. 국민을 무지렁이로 여기지 않고는 내놓을 수 없는 궤변이다. “정권 수사는 생각지도 말라”는 뻔한 노림수를 법무장관은 진정 나라와 국민을 위한 것이라 주장하는 건지 놀라울 따름이다.
전 정권이 임명한 카이스트 총장을 쫓아내려던 과기부 태도는 또 어떤가. 횡령 등 돈 문제로 감사하고 검찰에 고발해 망신 주는 수법은 전 정권 인사 내치기의 전형적 수법이다. 사실 이 정부만의 수법은 아닌데, ‘적폐몰이’라는 방법은 현 정부의 독창성이 빛나는 대목이다. 전 대통령의 초등학교 동문인데다 영남대 이사 출신이니 적폐로 몰기 최적이었을 터다. 무리수는 결국 국제적 망신을 낳았다. 현장조사에서 “미국법에 따른 적법한 것”이란 증언을 듣고서도 고발을 취하하지 않다가 결국 검찰의 무혐의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이런 무리가 과기부 장관이 국가와 국민에 책임을 지는 방법인지 궁금하다.
이승만 전 대통령 서거 55주기 추모사에서 이 전 대통령을 ‘박사’로 호칭한 보훈처장의 태도도 치졸하다. 집권세력이 싫어한다고 해서 역사를 바꿀 수 있는 건 아니다. 보훈처장은 이전에도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으로 인정하는 것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말했었다. 건국절 논란의 연장선인데, 합의가 필요할 것도 없다. 1919년 중국 상하이에서 설립된 임시정부의 임시 대통령, 초대 대통령도 이승만이었다.
각료들이 이처럼 제 할 일과 반대되는 일을 하고 있는 사이, 행정부를 견제해야 할 집권당 의원들은 정권의 거수기로 스스로 추락한다. 거기에 공정보도를 해야 할 공영방송도 지원군 노릇을 하다 ‘권언유착’ 의혹까지 만들어내고 있다. 국민에 대한 배신이요, 시청자들을 농락하는 짓이다. 아직도 그것이 국가와 국민을 위한 책임감에서 나온 거라고 주장할 텐가. 대통령의 (아니 대통령의 열혈지지자들의) 눈치만 살피다 그런 건 아닌가.
로마 정치가 세네카는 “우리는 같은 왕 밑에 사는 게 아니다. 자기 일은 각자가 처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로마 최악의 폭군 네로 황제 밑에서 한 말이다. 로마 정치인들이 이 말을 듣고 자기 할 일을 제대로 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폭군은 정치인들이 만들어낸 것이란 말이다. 마찬가지로 지금의 집권세력이 폭군을 만들고 있다. 그러려고 그 자리에 있는가. 후세는 그들을 간신이라 부를 것이다.
도산으로 시작했으니 도산으로 끝내자. 이 말을 안창호식으로 말하면 이렇게 된다. 이제라도 깊이 새겨 따랐으면 좋겠다.
“옳은 일을 지성으로 지어나가는 사람은 곧 옳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나를 스스로 경계하고 여러분 형제자매에게 간절히 원하는 바는, 옛날과 같은 옳은 일을 지을 만한 옳은 사람의 자격을 가지기에 먼저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대기자/중앙콘텐트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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