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 오취리는 잘못이 1도 없다

입력 2020. 8. 8. 14:23 수정 2020. 8. 8. 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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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눈] 한국은 교육에 더 힘써야 하고, 무지를 방치하면 안된다

[박세열 기자(ilys123@pressian.com)]
샘 오취리 씨의 사과문을 보니 씁쓸한 기분이 가시지 않는다. 오취리 씨의 행동에 잘못된 부분이 전혀 없었는데도 그는 결국 사과해야 했다. 연예인의 숙명이지 싶다.

본질은 의정부고등학교 학생들이 아프리카 가나의 이른바 '관짝소년단' 패러디를 하면서 얼굴을 검게 칠한 것(블랙 페이스)으로 인종차별적 행위를 했다는 점이다.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이는 명백히 인종차별적 행위로 여겨지며, 해당 학생들(어린 학생이라고 표현하는데, 성년을 목전에 둔 고등학생은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질 수 있는 나이다)에게 오취리 는 그 행위가 분명히 잘못된 것이아고 말해줬다. (한국어와 별도로 영어로 쓴 글을 통해) 인종차별이 여전히 한국 교육의 사각지대에 있으다는 것, 그에 따른 무지의 위험성이 있다는 것에 대해 지적했다. 실제 차별 관련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다고 볼 수 없는 한국 교육의 현실에서, 충분히 인정할 수 있는 발언이다. (아직도 학생인권조례 같은 건 '동성애 조장'이라는 비합리적 이유로 적대시되는 게 한국 사회의 현실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말꼬리 잡기'로 대응했다.

오취리 씨를 비난한 사람들이 비난의 근거로 든 것은 대강 이러하다. '뭘 모르는' 어린 학생들의 초상권을 침해했다는 것, "다른 문화를 조롱하지 않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며 '한국 교육'을 비하했다는 것, 'teakpop'이라는 '케이팝 가십'을 의미하는 태그를 달아 외국인들에게 한류문화의 어두운 면을 부각시키려 했다는 것 등이다. 여기에 '블랙 페이스'가 무슨 잘못이냐는 주장도 은근히 섞여 있다. 정곡을 찔리니 곁가지를 붙들고 말꼬리를 잡아 비난하는 식이다.

오취리 씨의 문장을 아무리 뜯어봐도 한국 교육을 비하하는 것으로 읽히지 않는다. '다른 문화를 조롱하지 않는' 교육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게 무슨 '비하'에 해당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오히려 한국 교육의 부족한 점을 지적했다. 그런데 '어디 감히 외국 출신 연예인이 한국에'라는 반격엔 속수무책이었나 싶다. 의정부고 학생들의 '블랙페이스' 분장 역시 이것이 인종차별적 행위일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발생한 일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런 건 학교에서, 사회에서 잘 가르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군가 이 행동이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해 줘야 한다. 우리는 그렇게 조금씩 사회와 세계에 대해 알아간다. 그는 한국에 살고 있는 '소수자'로써 인종차별적 행위에 대해 해야 할 말을 정당하게 했을 뿐이다. 그리고, 한류 문화의 어두운 면을 들춰내면 안된다는 법이라도 있는 건가.

오취리 씨의 지적대로, 우리 사회는 인종차별적 상황들에 익숙치 않다. 인종이 다양하지도 않거니와 외국인 거주자가 많이 늘었다고 해도 아직 그들을 온전히 우리 사회에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한국의 교육과 문화는 '인종적 한국인'에 오랫동안 조율돼 있었다. 그 '인종적 한국인'의 특성을 칭찬하는 외국인 출연 토크쇼는 TV에서 넘쳐날 정도로 방송되고 있다. 익숙치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자신들의 인종차별 행위에 대해선 상당히 너그럽게 넘어간다. 현실이다. 하지만 현실도 달라져야 한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자. 외국에서 한국인 분장을 한답시고 투명 테이프로 양 눈을 찢어 고정시키는 행위를 했다면, 그 나라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겠는가. '부지불식간에 행했더라도 그것은 인종차별적인 잘못된 행위니 다시는 하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그런데도 '동양인의 눈이 작은 건 팩트인데 어디 우리나라의 교육을 지적질 하느냐'라고 비난이 쏟아진다면?

오취리 씨를 향해 쏟아지는 반응들을 보고 있자면 여러 장면이 오버랩된다. 예전에 미국의 인종차별을 풍자할 때 곧잘 쓰이던 말이 있다. "나는 흑인의 인권을 존중한다. 단, 그들이 집 밖에만 나오지 않는다면." 인종차별에만 국한된 농담은 아니다. 이를테면 패미니즘을 대입해 볼 수도 있다. "패미니즘을 지지한다. 단 그들이 집 밖에만 나오지 않는다면."

이런 심리의 밑바닥에는 '내가 인종차별주의자라는 건 용납할 수 없다'는 게 작용한다. 동질성이 잘 확립된 사회에서 평생 좋은 교육을 받고 나쁜 짓 안하고 잘 살아온 나에게 '무지에 의한 실수' 하나로 인종차별주의자 딱지를 붙이는 건 용납되지 못한다. 일종의 방어 기제인데, 미국을 덮친 인종주의 '백래시'도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칠 수 있는 자유를 빼앗겨 '해피 홀리데이'라고 말해야 하는 크리스천은 스스로 억압받는다고 느낀다. 회사의 남성 중역은 예전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던 일이, 지금은 성차별적 행위로 규정돼 자신의 자유가 제한받는다고 느낀다. 학교의 소수 인종 쿼터는 백인에게 역차별이고, 여성 전용 휴게실은 남성에게 역차별적이라고 한다. 정치적 올바름을 'PC 묻었다'는 말로 조롱거리 삼는다. 멀리 가지 않아도 이런 사례는 꽤 많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정규직에 역차별적이라도 느끼고, '비정규직을 정규직화 하지 말라'고 외친다.

이제 소수자들은 그들의 '소수자성'마저 다수자에 빼앗길 지경이 됐다. 한국 사회의 소수자 오취리 씨는 표현의 자유를 빼앗겼고, 또다른 인종차별적 폭력에 난도질 당했다. 그리고 대중은 그에게 기어코 사과를 받아냈다. 연예인의 숙명이라 치기에도 너무 가혹하다.

이런 일들은 지금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다. '백래시'들이 모인 결과가 미국에서 구현됐다. 트럼프의 등장이다. 트럼프가 당선됐을 때 교양 있고 점잖은 백인 중산층들은 집안 쇼파에 앉아 트럼프를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을 향해 조용히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그가 앞으로 뭘 할 것인지 조금 지켜보자고." 나는 트럼프같은 인간과 다르지만, 세상이 너무 불편해 진 것은 사실 아니냐는 의미다. 그렇게 미국에서 '방관자'들은 늘어갔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미국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지금 이 글도 어쩜 '인종주의적 편견'으로 보여질 수 있을 것이다. '화이트 세이비어(백인이 비백인을 구원하는 것. 일종의 '위선적 인종차별'로 읽힐 수 있는 행위다.)'랄지, '한국인의 짐'이랄지, 혹은 (보잘것 있는 교양은 아니지만) '교양'을 쌓은 평균적 한국인의 위선을 만족시키기 위한 '자기 위안'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은 꼭 해야겠다. 나도 주장한다. 한국 사회는 다른 문화를 조롱하지 않고 이해할 수 있도록 교육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고, 무지를 방치해선 결코 안 된다. 오취리 씨, 당신은 전혀 잘못한 것이 없다.

▲샘 오취리 SNS 갈무리

[박세열 기자(ilys123@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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