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에게 고합니다. 일본인 증오말고 포용을"

길윤형 2020. 8. 14.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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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해내·해외 3000만 우리 민족에게 고합니다. 조·일 양 민족이 자주 호양(互讓·서로 양보함) 태도를 견지하여 추호라도 마찰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전날인 15일 밤 몽양 여운형을 중심으로 계동에서 긴급 구성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안재홍(1891~1965) 부위원장이 정동 경성중앙방송국에서 해방된 조선 민족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처음으로 제시하는 역사적인 연설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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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75돌 해방 뒤 운명의 이틀

해방 당일 밤 조선건준위 긴급 구성
안재홍 부위원장 역사적 대중 연설
갑작스런 해방·무모한 충돌 막으려
처절한 보복 아닌 화해·협력 호소
퇴각 일본에 무력자제 경고 의미도
해방 이튿날인 1945년 8월16일 오후 1시 휘문중학 운동장으로 들어서고 있는 몽양 여운형. 여운형은 전날 밤 해방 조국의 건국을 위해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만들기로 의견을 모았다.

“지금 해내·해외 3000만 우리 민족에게 고합니다. 조·일 양 민족이 자주 호양(互讓·서로 양보함) 태도를 견지하여 추호라도 마찰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한반도가 해방의 기쁨으로 들끓던 1945년 8월16일 오후 3시10분. 전날인 15일 밤 몽양 여운형을 중심으로 계동에서 긴급 구성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안재홍(1891~1965) 부위원장이 정동 경성중앙방송국에서 해방된 조선 민족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처음으로 제시하는 역사적인 연설을 했다. 당시 조선에서 발행되던 유일한 우리말 신문인 <매일신보>는 17일 이 연설에 대해 “건준은 16일 준비위원 자격으로 안재홍이 약 20분 동안 마이크를 통하여 해방된 우리 동포에게 제1성을 보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해방 이튿날인 1945년 8월16일 첫 라디오 연설을 통해 조선 해방의 소식을 전한 민세 안재홍.

당대 조선을 대표하던 최고 언론인이자 비타협 민족주의자로 이름 높았던 안재홍은 해방 직후 국제 정세를 “조선을 핵심으로 한 전 동아(동아시아)의 정세가 급박하게 변동되고 있다”고 분석하며, “이런 민족성패가 달린 비상한 시기에 만일 성실·과감하고도 총명·주밀(주도면밀)한 지도로서 인민을 잘 파악 통제함이 없이는 최대의 광명에서 도리의 최악의 범과(犯過·범죄와 과오)를 저질러 대중에게 막대한 해악을 끼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조선의 ‘갑작스러운 해방’을 불러온 연합군의 승리와 이후 이어질 처절한 미-소 ‘냉전’을 예언한 듯한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안재홍은 이를 피하려면, 첫째 “민족 대중 자체의 일상생활에서 생명·재산의 안전을 도모”해야 하고, 둘째는 한·일 양 민족이 호양의 태도를 취해 “일본인 주민의 생명·재산의 보장을 실현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안재홍은 이어 △치안확보를 위한 경위대 결성 △무장대 즉 정규군 편성 계획 △식량·통화·물가 등 경제 정책 △친일파 처우 등 주요 현안들에 대한 건준 나름의 정책 방침을 제시했다. 일제 시대 무려 9번이나 투옥돼 7년3개월 옥살이를 했던 ‘불굴의 독립투사’인 안재홍이 일제에 대한 ‘처절한 보복’이 아닌 ‘화해와 협력’을 호소한 것이다. 미-중 ‘신냉전’과 역대 최악의 한-일 관계라는 이중고를 겪고 있는 현시점에서 다시 곱씹어봐야 할 ‘역사적 교훈’으로 보인다.

“한·일은 호양협력할 수밖에 없다”는 안재홍의 메시지는 일본에 대한 ‘경고’이기도 했다. 안재홍은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기 시작하던 1944년 12월 오카 히사오 경기도 경찰부장 앞에서 일본의 패전 가능성을 언급하며 “당신들이 퇴각할 때 양 민족 사이에 큰 마찰을 일으켜 피차간에 대량 유혈이 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양 민족은 지리상의 관계로 무슨 형식으로든지 영구한 병존호영(竝存互榮) 관계를 깨뜨리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패망 직전 독립운동가 등에 대한 예비검속을 준비하던 일본에 “살육을 일으키면 양 민족은 새로이 영원한 원수가 되고 말 것”이라고 경고한 것이다.

일왕의 항복 선언이 담긴 1945년 8월16일치 <매일신보>

안재홍의 호소대로 한-일은 해방 후 극심한 혼란 속에서도 무모한 유혈 충돌을 벌이지 않았다. 해방 직후 총독부 총무과장이었던 야마나 미키오가 정리한 <조선총독부 종정의 기록>(1945년 집필·65년 간행)을 보면, 16일부터 23일까지 총독부의 물자·인력 공출 등을 시행하며 민중들과 갈등을 빚었던 조선인 경찰관에 대한 폭행·협박·약탈 사건은 총 111건이었지만 일본인 경찰관에 대한 범죄는 절반 수준인 66건에 그쳤다. 16일부터 25일까지 총독부에 보고된 일본인 살인 피해 역시 6명(조선인은 21명)에 불과했다. 냉철한 집단 이성으로 감정을 억누르며 최악의 파국을 피한 것이다.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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