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는 모두 절멸" 동물들의 코로나 시국선언

김지숙 2020. 8. 21.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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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멀피플] 예술인 30명의 '절멸 선언' 퍼포먼스
창작그룹 이동시가 20일 오전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절멸, 질병X 시대 동물들의 시국선언’ 퍼포먼스를 벌였다. 이날 행사는 ‘비대면 방식’으로 진행돼 기자회견 사진은 참가자들이 각자 발언한 모습을 추후 합성하는 방식으로 제공됐다. 이동시 제공

“나 요조는 오늘 이 순간 뱀으로서 말합니다. 세상은 끝나가고 있습니다. 오래 살고 싶은 당신이 아무리 저를 잘라 구워 먹고, 소주에 퉁퉁 불은 저의 시즙을 마셔대도 소용없을 것입니다”

서른 명의 작가, 과학자, 시인, 활동가들이 동물이 되어 발언대에 올랐다. 뮤지션 요조는 뱀이, 작가 이슬아는 돼지, 영장류학자 김산하는 멧돼지가 됐다. 동물이 된 참가자들은 동물 가면을 쓰고 발언대에 올라 인간에게 억울한 사연을 풀어냈다. 인간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다 낭독한 뒤 참가자들은 예외없이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절멸’을 선언한 것이다.

_______ “나는 오늘 동물로서 말한다”

이날 동물이 된 모든 인간들은 같은 문장으로 입을 뗐다. “나는 오늘 이 순간 동물로서 말합니다.” 20일 오전 창작그룹 ‘이동시’(이야기와 동물과 시)는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절멸, 질병 X 시대 동물들의 시국선언’이라는 주제로 릴레이 퍼포먼스를 벌었다. 이동시는 2년 전부터 ‘동물축제반대축제’ ‘동물당 창당 퍼포먼스’ 등의 작품으로 동물, 환경, 기후위기를 예술로 표현해온 창작집단이다.

이날 퍼포먼스에는 요조, 이슬아, 강하라, 김한민 등 동물의 권리를 위해 꾸준히 활동해온 예술인들이 참여했다. 동물이 된 참가자들은 미리 준비해온 선언문을 1~2분 정도 낭독한 뒤 그 자리에 쓰러지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오늘 시국선언이 인간보다 먼저 절멸을 예감한 동물들의 유언”이라는 게 주최 측의 설명이다.

퍼포먼스는 최근 수도권 내 코로나19 확진자 급증을 고려해 ‘비대면 기자회견’이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진행됐다. 한날 한 장소에 모여 기자회견을 하되, 서로 시차를 두는 것이다. 참가자들은 오전 10시부터 차례로 현장에 도착해 각자의 선언을 낭독한 뒤 퇴장했다. 시국선언에 참여한 30여 명 가운데 17명이 현장을 찾아 선언문을 낭독했다. 이동시는 “각각 참가자들의 사진과 영상을 현장 촬영해 추후 합성하는 방식으로 기자회견 모습을 공유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김한민 시셰퍼드 활동가는 코로나19 중간 숙주로 지목받은 천산갑으로 발언대에 올랐다. 이동시 제공
뮤지션 요조는 “뱀은 온순하고 우아한 동물이지만 인간들에게 위협적인 동물이라는 오해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이동시 제공

시국선언 첫 번째 주자는 천산갑이었다. 머리에 천산갑 탈을 쓴 김한민 활동가가 발언대에 올랐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유례없는 관심을 받은 천산갑은 “나는 코로나바이러스의 중간 숙주로서 언급되면서 위험한 동물로 지목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왜 중간 숙주가 되었을 가능성이 큰지는 얘기하지 않는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우리는 매년 10만 마리 이상이 야생에서 잡혀 죽는다. 머리카락과 같은 재질인 우리의 껍질이 약 효능을 가진다는 거짓된 믿음 때문에 전세계 8종의 천산갑 모두가 심각한 멸종위기에 처해있다. 이렇게 씨를 말리고 있으니 바이러스에도 더 노출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_______ ‘코로나 주범’ 몰린 박쥐·천산갑의 반론

‘또 다른 숙주’ 박쥐도 선언에 동참했다. 박쥐의 입장을 대변한 정혜윤 CBS 피디는 현장 참석 대신 선언문을 보내왔다. 정 피디는 “나는 니파, 사스, 코로나 바이러스의 원인으로 지목되었고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내가 다가간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나에게로 왔다. 그 뒤로 많은 것이 파괴되었다”고 적었다. 그는 바이러스 확산 때마다 도살처분 되는 돼지, 사향고양이, 밍크, 천산갑 등 동물의 처지를 이야기한 뒤 “누구도 더는 건들지 말라!”고 일갈한다.

참가자들은 인간의 얼굴과 대변하는 동물의 얼굴이 각각 반씩 그려진 선언문 카드를 들고 발언대에 올랐다. 돼지를 대변한 이슬아 작가(왼쪽)와 호저를 대변한 유계영 시인. 이동시 제공

뒤이어 사육곰, 개, 소, 닭, 멧돼지, 사향 고양이, 돼지 등 17종의 동물들도 시국선언을 이어갔다. 이슬아 작가는 쫑긋한 귀와 돼지코를 붙이고 발언대에 올랐다. 이 작가는 돼지가 태어나 오직 고기로 키워지고, 온갖 방식으로 먹히고, 때로 산 채로 묻히는 과정을 단문의 문장으로 그려냈다. 돼지의 선언문은 “모두 아프게 될 것이다. 내가 이렇게나 아프기 때문이다. 고통은 돌고 돈다. 내 몸에서 당신 몸으로”라는 예언으로 마무리됐다.

퍼포먼스를 마친 이슬아 작가는 “동물과의 관계, 이대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 작가는 “소·돼지는 가장 많이 소비되는 육류이면서 각종 전염병에 도살처분 되고, 밀집 사육 당하는 동물들이다. 인간에게 가장 많이 착취되지만 생명으로 잘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돼지를 대변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어 “인간이 동물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작가는 매 작품에서 타자가 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다. 이 불가능한 작업을 통해 우리가 알아야 하는 목소리에 좀 더 귀 기울이자는 의도를 담았다”고 설명했다.

_______ 팬데믹 근본 원인은 동물학대

동물들의 시국선언에 앞서 김한민 시셰퍼드 활동가는 ‘질병X 시대’라고 쓴 손팻말을 들어 보였다. 이동시는 “현재 코로나19 사태가 채 끝나지 않았지만 이미 질병X 시대가 왔다”고 진단했다. 질병X는 2018년 세계보건기구(WHO)가 예견한 ‘세계 대유행 바이러스 8가지’ 가운데 가장 마지막인 미지의 바이러스를 뜻한다.

이동시는 코로나19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이 자연과 동물을 착취하는 인간의 생활방식에 있다고 꼬집었다. 이동시 제공

이동시는 “영장류학자 제인 구달도 팬데믹의 근본 원인은 동물 학대에 있다고 말했다. 앞으로 도래할 질병 X 또한 코로나와 같은 인수공통감염병일 확률이 매우 높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재정립되지 않으면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공멸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인간보다 먼저 절멸을 선언한 동물들이 남긴 유언은 열 가지다. 매 항목이 따끔하지만, 가장 눈에 띄는 철퇴는 두 번째 유언이다. “세 가지 마약을 끊어라. 탈-성장, 탈-개발, 탈-육식!”

김지숙 기자 suoop@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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