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 전 '유학생 간첩단' 사건 재심 항소심도 무죄
재판부 "국가의 존립·안전에 실질적 해악 끼칠 행위인지 입증 부족"
[경향신문]
전두환 정권 때 이른바 ‘구미(歐美)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재판에 넘겨져 사형을 선고받고 십수 년을 복역한 이들이 재심 재판의 2심에서도 1심에 이어 무죄를 선고받았다.
서울고법 형사6부(재판장 오석준)는 21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양동화(62)·김성만(63)씨에 대한 재심 2심에서 검사 항소를 기각하고 무죄를 선고했다.
1985년 전두환 정권 국가안전기획부는 양·김씨 등이 미국과 서독 등지에서 유학할 때 ‘북괴’에 포섭된 뒤 국내에 잠입해 간첩 활동을 했다고 대대적으로 발표했다. 양·김씨는 북한 지령을 받은 자와 회합·통신하고, 북한 지령 수행 목적으로 서울에 잠입했다 탈출한 혐의 등으로 기소됐다. 1년 만에 법원에서 사형 판결이 확정됐다. 양·김씨는 13년2개월 동안 수감돼 있다가 1998년 광복절 사면으로 풀려났다. 구미 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옥살이를 한 <야생초편지>의 저자 황대권씨(65)와 이원중씨(57)를 포함해 4명이 함께 2017년 9월 재심을 청구했다.
재심 1심인 서울중앙지법 형사33부(재판장 손동환)는 지난 2월 이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기소된 지 35년 만의 무죄였다. 1심은 고문 등 가혹행위에 의한 진술과 강제 연행, 영장 없는 압수수색 등 불법수사가 있었다며 상당수 증거를 배척했다.
검사는 양·김씨에 대해서만 항소했다. 검사는 2심에서 양·김씨가 북한 또는 북한 대사관에 다녀온 사실 자체는 인정하고 있고, 당시의 시대 상황을 감안하면 이는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행위라며 유죄를 선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심 판단도 무죄였다. 2심 재판부는 현행 국가보안법이 이 법을 확대해석하거나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부당하게 제한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한 점을 짚었다.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하는지는 실질적 해악을 끼칠 명백한 위험성이 있는 경우로 좁혀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2심 재판부는 “검사가 제출한 증거들 가운데 증거능력이 없는 증거들을 제외한 나머지만으로 양·김씨 행위가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실질적 해악을 끼칠 구체적이고 명백한 위험성이 있는 행위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며 “1심 결론을 유지한다”고 밝혔다. 당초 재판에서 관련자들이 ‘양·김씨로부터 북괴노선에 동조하는 말을 들었다’라고 증언했다고 하더라도 신빙성이 없다고 했다. 이들이 당시 안기부 등으로부터 고문을 당하거나 협박을 받았고, 법정에 안기부 직원이 있어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잘못 증언했다고 재심 재판에서 증언을 번복했기 때문이다.
양씨는 2심 판결 선고 직후 “긴장을 많이 했는데 재판부가 잘 판단해주셔서 감사하다”며 “인생 2막을 살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김씨는 “자유민주주의 원리에 매우 부합하는 판결이 나왔다”며 “북한을 이롭게 하거나 국가 안전을 해치는 행동을 했다고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검사가 상고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구미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재심 청구를 하지 못한 피해자들은 아직 남아 있다.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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