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경 칼럼] 대통령은 반역을 허하라

이하경 입력 2020. 8. 24. 00:40 수정 2020. 8. 24. 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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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오류' 김정은도 경제 실패 인정
열혈 지지층 눈치만 보는 문 정부
잘못 인정 안하고 오만·불통·독주..
무능한 간신 쳐내고 민심 경청을
이하경 주필

민주당 원로인 유인태 전 의원은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이다. 20대 때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고도 웃었다. “‘미친 X들, 이게 무슨 사형감인가. 동대문경찰서에 가서 따귀 몇 대 맞고 나올 일인데…’라고 생각하니 웃음이 나오더라”고 했다. 상황에 압도되지 않고 단숨에 본질을 소환하는 자유인이다.

그가 모처럼 문재인 정권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민주당에선 말 한마디만 잘못하면 소위 ‘문빠’들한테 문자폭탄이 날아오는데 열혈 지지층한테만 끌려다니면 당의 미래가 없다.” 유인태는 참여정부 초대 정무수석으로 ‘민정수석 문재인’과 함께 노무현 대통령을 보좌했고, 2012년 문재인의 대선 출마를 설득한 인연이 있다. 그의 직언에는 사심(私心)이 없다.

미래통합당은 지난 총선에서 열혈 지지층인 태극기부대에 끌려다니다 참패했다. 하지만 김종인 비대위원장 체제는 황교안 시대와 다르다. 주호영 원내대표는 코로나19 전국 확산의 기폭제가 된 광화문 집회의 주역 전광훈 목사를 향해 “공동선(善)에 반하는 무모한 일은 용서할 수 없으며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쏘아붙였다. 문 정권의 추락을 막아준 ‘극우 야당’은 사라지고 있다.

국민들은 23차례나 허공에 총을 쏘아댄 최악의 부동산 실정(失政)에 부글부글 끓고 있다. 코로나19 재확산 이후 강력한 방역 조치로 저소득·저학력·여성·청년 등 취약계층이 최악의 생계 위기에 내몰리고 있다. 하지만 당 대표 후보들까지 홍위병의 눈치를 보느라 과감한 비판과 파격적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관심·논쟁·비전 없는 3무 전당대회”라고 비판한 조응천 의원은 “내부총질하지 말고 미통당으로 가라”는 문자폭탄에 시달렸다.

마침내 통계가 부동산 실정을 감추는 요술 무기로 둔갑했다. 김현미 국토부 장관은 한국감정원 시세를 근거로 “문 정부 3년간 집값이 11% 올랐다”고 했다. “50%가 넘는다”고 한 경실련 발표를 체감지수로 받아들이는 국민은 바보가 됐다.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8·4 대책 후에도 전·월세가 치솟자 “신규 계약만 집계하던 통계 방식을 바꿔 갱신 계약도 포함하겠다”고 했다. 문 정부는 2년 전 소득주도 성장 성적표에 불리한 통계가 나오자 통계청장을 갈아치웠다. 통계청장은 물러나면서 “통계가 정치적 도구가 돼선 안 된다”며 눈물을 흘렸다.

국제사회는 통계를 분식(粉飾)하면 불이익을 준다. 북한이 2015년 우방국인 중국 주도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가입이 좌절됐던 것도 통계 때문일 것이라고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분석한다. 그리스는 통계를 조작하다가 국가 부도를 겪었다.

민심과 동떨어진 권력자들의 비상식은 “우리 대통령은 어떤 잘못도 없다”는 열혈 지지층의 무오류주의 맹신에서 출발한다. ‘무오류의 절대존재’인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도 지난주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경제 실패를 스스로 인정했다. 그런데 개방된 민주주의 국가인 한국에서는 집권세력의 자체 비판이 금기가 되고 통계가 선택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남북이 뒤바뀐 이 기괴한 장면은 한국 민주주의 퇴행의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야당은 지지층을 확장하고 정권을 되찾기 위해 죽기살기로 노력하고 있다. 김종인은 광주 5·18묘역을 찾아 무릎을 꿇었다. 새누리당 시절에는 “전형적 포퓰리즘”이라고 걷어찼던 ‘기본소득’을 정강정책 1호로 제시했다. ‘약자와의 동행’ ‘경제민주화 구현’도 정강정책에 들어간다. 박근혜 탄핵·이명박 구속 대국민 사과, 비례대표에 호남 우선 공천이라는 카드도 꺼내들 태세다. 김종인이 코로나 4차 추경을 먼저 주장하고 정부가 난감해하는 장면까지 나왔다. 민주당의 핵심 정책과 담론, 의제를 모조리 통합당이 가져가고 있다.

그런데 집권 세력은 아직도 민심을 읽지 못하고 있다. 친일파 무덤을 파헤치고 부동산을 잡기 위해 수도를 이전하겠다고 목청을 높인다. 국회 외교통일위원장인 송영길 의원은 “주한 유엔사령부는 족보가 없다”고 했다. 한·미 워킹그룹을 ‘일제 통감정치’에 비유했다. 사실도 아닌 부적절한 발언이다. 조국·윤미향·박원순의 위선에 지친 국민을 불안하게 한다.

문 대통령은 3년 전 취임사에서 “국민과 수시로 소통하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다.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국민은 “대통령이 도대체 어디서 뭐하고 있느냐”고 묻고 있다. 이제는 실체가 뚜렷하지 않은 추상과 관념이 지배하는 구중궁궐을 박차고 나와 범부(凡夫)의 꿈과 희망, 탄식과 눈물로 가득찬 ‘지금, 여기의’ 시간과 공간에 정주(定住)해야 한다. 눈과 귀를 가리는 무능한 간신들을 쳐내고 직언과 반역(叛逆)을 허(許)해야 한다. 그래야 대통령의 선한 초심을 실현할 수 있다.

상식을 거부하고 민주주의를 질식시키는 진영의 정치, 패거리 정치는 지긋지긋하다. 모두가 열혈 지지층의 노예가 돼 똑같이 생각한다면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어렵게 건설한 민주공화국의 위엄이 이렇게 허물어져선 안 된다. 시간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

이하경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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