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망 씌워 보호하지만..'뜨거운 한반도'서 얼마나 버틸까

박기용 2020. 8. 26.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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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변화 멸종의 위기, 빙하기 식물을 찾아서]
② 설악산 눈잣나무와 홍월귤
사람 힘으로 생존하는 '눈잣나무'
잣까마귀·다람쥐 등이 열매 못먹게
서식지 철망 씌워 종자 보호에도
낮은 지역 소나무들은 치고 올라와
아고산대 개체수 확연히 줄어들어
곰들이 즐겨 먹는다는 '홍월귤'
툰드라 지역 서식 극지·고산식물
설악산 정상 100여 개체 알려졌지만
실제 관찰 가능한 건 2개체뿐
그나마 시들었거나 말라죽은 모습
때론 사람이 더 무섭다
등산객들 서식지 캐묻고 다녀
최악의 경우 개체 훼손 우려도
20일 설악산 중청대피소 인근 눈잣나무 자생지. 잣까마귀, 다람쥐 등이 눈잣나무 열매를 먹는 것을 막으려 철망을 씌워놓았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지난 20일 오전 오색에서 대청봉으로 향하는 설악산 등산로. 산행 3시간쯤부터 전나무가 보이기 시작했다. 내소사, 월정사 숲길에서 봤던 우람함이 없는, 작은 성탄절 나무 같은 인상이었다. 동행한 공우석 경희대 교수(생물지리학)가 “전나무가 보이면 해발고도 1000~1300m의 산 중턱에 온 것”이라고 말했다. 소나무과 침엽수인 전나무는 해발 1000m 일대의 추운 환경에서 유래했다. 각종 숲길에 쓰여 평지에서도 잘 사는 걸로 흔히 오해한다고, 공 교수는 덧붙였다. 주변을 둘러보자 생선가시처럼 생긴 분비나무의 고사목들과 바람에 쓸린 기이한 모습의 작고 낮은 나무들이 곳곳에 위태하게 서 있었다.

이날 산행은 역대 가장 긴 장마로 계획보다 한달이 늦어진 일정이었다. 이 산 정상엔 눈잣나무와 노랑만병초, 홍월귤 같은 ‘빙하기 식물’이 산다. 과거 빙하기 때 한반도에 자리잡았다 다시 기온이 오른 간빙기 때 북쪽으로 이동하지 못한 채 한반도 산꼭대기에 남은 식물들이다. 한반도 자연사를 이해하는 열쇠이며, 기후변화가 심화하면 멸종할 생태계 최약자다. 이들은 주로 시베리아의 툰드라, 타이가에 사는데, 세계 남방 한계선이 바로 이 설악산 정상이다. 남한에선 오직 이곳에서만 이들을 볼 수 있다.

20일 설악산 대청봉으로 향하는 탐방로에서 마주친, 꼰 형태로 말라 죽은 잣나무.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복원된 눈잣나무

서식지 해발고도 1708m의 대청봉은 한겨울에 영하 25~30도까지 기온이 떨어지고 나무를 휘게 하는 강풍이 분다. 중청대피소가 있는 대청봉과 중청봉 사이가 눈잣나무의 남한 내 유일한 자생지다. 눈잣은 ‘누운 잣나무’의 줄임말로, 일반 잣나무와 달리 춥고 습하고 바람이 많은 환경에 적응하려 키가 작은 모습으로 바뀌었다. 외국에선 ‘꼬마 소나무’(dwarf pine)라 부른다. 떨어져서 보면 인조잔디 같은 색으로 주변 나무들과 구분된다. 바람이 없거나 세지 않은 곳에선 줄기가 곧추서 소교목으로 자란다. 나무 모양이 보기 좋고 사철 푸르러 북한에선 관상용으로 공원이나 정원에 심기도 한다. 각종 기암으로 빚은 설악의 절경과 멀리 동해가 내려다보이는 이곳에서 눈잣나무는 이 열매를 먹고 사는 잣까마귀들과 겨우 살고 있었다.

20일 설악산 중청대피소 인근 눈잣나무 자생지. 잣까마귀, 다람쥐 등이 눈잣나무 열매를 먹는 것을 막으려 철망을 씌워놓았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대청봉에서 중청대피소로 가는 600m 길은 2012년 말 나무데크로 만들었다. 언뜻 지나기 편하게 해놓은 시설로 보이지만, 등산객이 주변을 훼손하지 못하게 막는 목적이 더 크다. 국립공원공단은 나무데크를 만들면서 당시엔 거의 훼손된 서식지를 복원하려 주변의 눈잣나무들을 이곳으로 옮겨 심고 철로 된 종자 보호망을 씌웠다. 잣까마귀, 다람쥐 등이 열매를 먹는 걸 막고 증식용 종자를 채집하기 위한 목적이다. 이곳의 눈잣나무는 사실상 사람의 힘으로 생존하고 있었다.

길희영 국립수목원 연구사는 “대청에서 보는 식물 대부분이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의 적색목록에 올라 있을 것”이라고 했다. 세계자연보전연맹은 절멸, 위급, 위기 등으로 구분해 지구 생명체의 보전 상태를 정리해놨다. 이대로 온실가스에 의한 ‘지구 가열’이 지속돼 기후가 변하면 눈잣나무 등은 조만간 개체가 하나도 남지 않는, ‘절멸’ 등급으로 바뀔 가능성이 높다. 인위적인 종 복원 노력도 지구 기후의 거대한 변화 앞엔 무력할 수밖에 없다. 중청대피소의 눈잣나무 군락지엔 과거 볼 수 없던 소나무의 모습도 군데군데 보였다. 공 교수는 “한라산에서도 그렇고, 더 낮은 지역에 살던 소나무가 이곳 고산지역까지 점점 서식영역을 확대하는 중이다. 눈주목, 눈측백 같은 다른 아고산대 나무들도 개체수가 확연히 줄고 있다”고 했다. 국립공원공단이 중청대피소 옆에 설치한 기후변화 모니터링 장비가 키 작은 나무들을 지키는 허수아비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지난 20일 설악산 정상 인근에서 <한겨레> 취재진과 공우석 경희대 교수, 국립수목원, 국립공원공단 관계자들이 남한에선 이곳에서만 자생하는 빙하기 식물들을 살펴보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 “개체수 더 늘긴 어려워”

중청대피소를 지나 소청봉으로 가던 등산로 주변에선 그동안 국립수목원이 관찰해온 노랑만병초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등산로를 벗어나 수풀을 헤치고 십여미터 들어가 주변 나무들을 걷어낸 자리에 겨우 몇 포기가 땅에 납작 엎드린 채 있었다. 풀이 아닌 나무로 분류되지만 키가 작고 옆으로 눕는 특징이 있다. 류머티즘 등의 약재로도 쓰이나 기본적으론 독성식물이다. 러시아 극동지역과 몽골, 중국, 일본 북부의 해발 1500~2700m 사이 고지대에 주로 산다. 눈잣나무처럼, 설악산이 지구상 가장 남쪽에 위치한 자생지다. 2018년까지 5년 동안 이곳의 노랑만병초를 관찰해온 안종빈 국립수목원 연구원은 “중청과 소청 사이 수십 개체가 존재하지만, 다른 나무들에 뒤덮여 나날이 피압(키가 큰 나무에 덮여 햇볕을 받지 못하는 상태)이 심해지는 중이다. 더는 개체수가 증가하긴 어려워 보인다”고 했다. 노랑만병초는 환경부 멸종위기 야생생물 2급, 세계자연보전연맹 적색목록의 ‘위기’ 등급에 올라 있다.

20일 설악산 정상 인근에서 서식 중인 노랑만병초.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이곳에선 알래스카나 그린란드 등지에서 주로 사는 홍월귤도 볼 수 있었다. 다른 빙하기 식물들처럼 툰드라나 타이가 지역에 주로 살고, 빙하의 가장자리에서 발견되기도 하는 극지·고산식물이다. 작은 앵두 같은 열매를 곰들이 즐겨 먹어 ‘베어베리’(Bearberry)로도 불린다. 설악산 정상엔 100여 개체가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날 실제 관찰이 가능한 건 2개체뿐이었다. 그나마도 하나는 산앵두 사이에서 거의 시들었거나 말라 죽은 것처럼 보이는 상태로 남아 있었다.

“설악산엔 홍월귤과 다른 종인 월귤이 있는데, 이곳에서 직선거리로 60㎞가량 떨어진 강원도 홍천 풍혈의 월귤 군집과 유전적으로 연결돼 있을 가능성이 있어요. 1300m의 고도차가 있는 걸 고려하면 과거 2만여년 전 빙하기 때 한반도 기온이 지금보다 6~9도 낮았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이 일대가 모두 빙하기 식물들의 서식영역이었던 거죠.” 공 교수의 설명이다.

22일 설악산 정상 인근에서 확인한 ‘빙하기 식물’ 홍월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 “홍월귤 어디 있는지 아세요?”

조사를 마치고 대청봉으로 돌아와 다시 오색으로 향하는 하산길에 올랐다. 지나던 한 등산객이 취재진과 동행한 국립공원공단 직원에게 다가와 “이곳에 홍월귤이라는 게 있다는데 혹시 어디 있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공단 직원은 선뜻 위치를 알려주지 않았다. “가끔 관심을 보이는 등산객들이 있는데 사진만 찍고 가면 몰라도, 최악의 경우 아예 개체를 훼손해버려 문제가 된다”는 우려에서다. 희귀식물을 캐내 아예 가져가거나 다른 이들이 볼 수 없도록 사진을 찍은 뒤 없애버리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산꼭대기에 사는 빙하기 식물들은 희귀한 특성 탓에 기후변화만이 아닌 사람들에 의해 훼손되는 위험에도 시달리고 있었다.

설악산 정상 인근에서 강한 바람으로 인해 한 방향으로 휜 나무가 보인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한반도 내 고산지대에 겨우 남아 있는 빙하기 식물들은 한반도의 산줄기 방향이 남북으로 나 있는 덕을 봤다. 남북으로 뻗은 산줄기는 뿌리가 있는 식물에게도 이동 통로 구실을 했다. 빙하기에서 간빙기로 가는 1만여년의 장구한 시간 동안 한반도 식생은 서서히 변화해갔고 빙하기 때 자리잡은 극지식물들은 이제 상대적으로 기온이 낮은 산꼭대기에만 남아 있다. 동서로 뻗은 알프스나 피레네산맥이 있는 유럽과는 다른 모습이다. 공 교수는 “한반도는 동식물이 움직이는 이동 통로이자 혹독한 기후를 피해 찾아드는 피난처 구실을 해왔다. 한반도 자연사를 간직한 빙하기 식물들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는 지금처럼 온실가스가 늘어나는 경우 금세기 말 지구 평균기온이 4.7도, 한반도의 경우 5.7도까지 오를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박기용 기자 xe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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