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내식 없어 승무원들 눈물로 사과할 때 회장은 그룹 재건 꿈꿨다

석민수 2020. 8. 2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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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1일. 인천국제공항에서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향하는 아시아나항공 541편은 출발시각 3시간을 넘어서도 출발을 하지 못했습니다. 지연 사유는 기내식 미탑재. 3시간을 기다렸는데도 비즈니스석 기내식은 다 실리지 않았고 결국 공항을 출발했습니다. 11시간이 넘는 비행을 공복으로 해야 하는 승객들의 항의가 이어졌고, 승무원들은 승객 앞에서 무릎을 꿇고 허리를 숙이며 사과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2년 전 아시아나항공의 '노밀(no meal) 사태', 기내식 대란 첫날의 풍경입니다. 이날에만 80편의 항공기 가운데 51대가 1시간 이상 지연 출발했고, 36대는 기내식을 다 싣지 못하고 공항을 떠났습니다. 그해 3월 건설 중인 새 기내식 공장에 불이 나면서 기내식 사업자 교체에 차질이 생겼고, 임시방편으로 너무 작은 업체에 임시로 기내식 공급을 맡기면서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사흘 뒤 결국 박삼구 당시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이 고개를 숙이고, 사태 수습을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두 달 동안 간편식이 기내식으로 나오는 등 승객 불편은 계속됐고 일부 승무원들은 "출근하기 두렵다"며 정신적 피해를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태의 발단, 박삼구 전 회장과 그룹 전략경영실에서 시작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2015년 계약이 끝나가던 '알짜' 기내식 사업권을 대가로 그룹 재건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려고 무리하게 업체를 바꿨던 것입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어제(27일) 아시아나항공의 30년 치 기내식 사업권을 담보처럼 활용해 그룹 지배회사인 금호고속이 1,600억 원의 자금을 무이자로 조달하도록 도운 금호아시아나그룹에 총 320억 원의 과징금을 물리고, 박삼구 전 회장과 경영진 2명을 검찰에 고발했습니다.

■박삼구 회장의 그룹 재건 계획…자금 마련에 안간힘

2013년 11월 박삼구 회장은 금호산업 대표이사로 그룹 경영에 복귀했습니다. 2009년 7월 그룹 유동성 위기의 책임을 지고 경영일선에서 물러난다고 기자회견 한 지 4년 4개월만입니다. 때마침 재무구조 개선 절차에 들어갔던 계열사들도 속속 정상화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고 박 회장은 본격적으로 그룹 재건을 시작했습니다.

문제는 박 회장의 장악력이었습니다. 채권단 관리를 받으면서 2015년 4월 기준 박 회장과 아들 박세창 씨가 아시아나항공의 최대주주이자 그룹 지배구조 정점인 금호산업 지분을 10%밖에 가지지 못했습니다. 이에 그는 2015년 10월 금호기업(현재 금호고속)을 설립한 다음 계열사 지분을 연이어 확보해 지배력을 높여가려고 했습니다.

그해 말 6,730억 원을 투입해 금호산업을 인수했고, 이듬해 금호터미널(2,700억 원), 2017년 금호고속(4,370억 원)을 사들이는 데 이어 금호타이어 인수에도 뛰어들었습니다. 연이은 인수·합병(M&A)에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자 그룹 컨트롤타워인 전략경영실은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계약만료를 앞둔 아시아나항공의 기내식 사업권을 활용해 자금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아시아나항공 30년 치 기내식 사업권, 금호고속 자금조달에 활용


전략경영실은 2015년 싱가포르 홍릉그룹 계열의 투자자문업체 스프링파트너스를 통해 아시아나항공 기내식 사업권을 가져가는 대신 금호고속(舊 금호홀딩스)에 투자하는 '일괄거래'를 기획했습니다. 2003년부터 기내식을 공급하던 LSG스카이셰프코리아와 기내식 분야 세계 2위인 스위스 게이트고메(게이트그룹), 싱가포르항공 계열의 SATS 등 다수의 해외 업체에 이를 제안했고, 당시 중국 하이난그룹이 대주주로 있던 게이트그룹이 이에 응했습니다.

2016년 말 게이트그룹이 60%, 아시아나항공이 40% 지분을 투자해 '게이트고메코리아(GGK)'를 설립했고, 2018년 7월부터 30년간 공급하기로 계약을 맺었습니다. 이어 2017년 3~4월 게이트그룹 소속 다른 회사가 금호고속의 신주인수권부사채(BW) 1,600억 원어치를 인수했습니다.

신주인수 행사가격은 시가의 1.5배로 비싸고, 채권 금리는 0%였습니다. 김근성 공정위 내부거래감시과장은 "BW는 형편이 어려운 기업이 발행하는 경우가 많은데 금리나 신주인수권 행사가격을 투자자에 유리하게 설정하는 게 일반적"이라며 "금호고속의 BW는 신주인수권이나 채권 금리 모두 투자자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했다"고 했습니다.

금호아시아나 측은 "두 회사가 각자 거래를 추진하면서 이익을 극대화하고자 최선을 다했고 유리한 조건을 끌어낸 것"이라며 "각각 독립적 거래로 서로 연계되거나 대가 관계에 있지 않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공정위는 은밀한 부속 계약, 부속 합의로 두 거래가 이어져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정진욱 공정위 기업집단국장은 "2016년 12월 아시아나항공과 게이트그룹이 합작투자 계약을 맺을 때 '사이드 레터'가 있었는데 BW 계약을 (기내식 거래의) 선행 또는 해지조건으로 규정했다"며 "전략경영실이 해외 기내식 업체와 접촉할 때 주고받은 이메일에서도 금호고속에 투자하는 것이 없다면 기내식 사업을 넘겨줄 의사가 없다는 내용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기내식은 항공업에서 '알짜사업'…아시아나 잠재 수익이 금호고속으로


기내식은 항공분야에서 알짜 중의 알짜로 꼽히는 사업입니다. 최근 대한항공이 코로나19로 승객이 줄어 경영난에 빠지자 기내식 사업을 매각해 자금을 마련한 것이 이를 방증합니다. 기내식 거래처를 바꾸기 전인 2017년 LSG스카이셰프코리아는 전체 매출 1,890억 원 가운데 70%에 가까운 1,280억 원을 아시아나에서 올렸습니다. 영업이익은 344억 원으로 영업이익률이 18%를 넘었습니다.

독일 루프트한자그룹 계열인 LSG 측은 금호고속 자금투자를 요구하는 금호그룹 측에 "법 위반 소지가 있다"며 대신 아시아나항공의 지분율을 20%에서 40%로 높여주고, 아시아나항공에 3천억 원을 투자하겠다고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금호고속 BW 인수를 대가로 GGK가 사업권을 가져가면서 아시아나항공은 LSG는 물론 다른 해외 업체와 더 유리하게 기내식 거래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잃었다는 게 공정위 판단입니다. 반대로 BW 발행으로 금호고속이 아낀 조달비용은 약 162억 원으로 추정됩니다. 아시아나항공의 잠재적 이익이 금호고속을 지원하는 데 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내식 논란'은 현재 진행형…매각에 영향 줄까?

'기내식 대란'으로 브랜드 이미지가 추락하고, 항공기 리스 등 차입금 부담으로 자금난에 시달리면서 아시아나항공은 매각 수순을 밟고 있습니다. 재계 7위였던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아시아나항공과 계열사들이 매각되면 그룹 총자산이 5조 원을 밑돌아 대기업집단에서 빠질 운명에 놓였습니다.

금호아시아나 측은 "LSG와 계약 기간 만료에 따라 정상적으로 거래를 종료했고, 우수한 능력을 보유한 GGK와 계약해 기내식 비용 절감, 고객 만족도 향상 등 상당한 경제적 이익을 얻었다"며 "기내식 공급가의 투명성 확보와 합작투자법인(GGK)에 대한 관리·감독 강화도 이룰 수 있었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기내식 논란'은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지난해 GGK는 137억 원의 기내식 대금을 받지 못했다며 아시아나항공을 상대로 국제중재위원회에 중재를 신청했습니다. 기내식 판매 단가 산정방식에서 이견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항공업계에서는 대주주가 바뀌면서 회사 입장도 바뀐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기내식 대란이 일어났던 2018년 7월 게이트그룹의 대주주 하이난그룹의 왕젠 회장은 프랑스 남부에서 돌연 사망했습니다. 게이트그룹도 지난해 싱가포르 사모펀드(PEF)인 RRJ캐피탈로 매각됐습니다. 금호아시아나그룹에서 주장하던 '전략적 제휴'도 사실상 끝났습니다. 게이트그룹에서 금호고속에 투자했던 BW 가운데 1년 만기(280억 원)와 2년 만기물(280억 원)은 모두 불리한 조건의 신주인수 대신 돈을 돌려달라고 요구했고, 금호고속은 전환사채(CB) 발행 등으로 자금을 모아 가까스로 상환했습니다.

아시아나항공 매각을 추진하는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은 어제 매각 우선협상대상자인 HDC현대산업개발의 정몽규 회장을 만났습니다. 이 자리에서 매각 대금 등과 관련해 최후통첩을 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아시아나항공은 물론 그룹 전체를 난맥상으로 몰고 간 박삼구 회장 등 그룹 최상층에 대한 이번 공정위 제재가 향후 매각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가늠할 수 없습니다.

금호아시아나 측은 "기내식 관련 거래는 서울남부지검이 시민단체가 2018년 배임 등의 혐의로 고발한 사건에 대해 이미 불기소 처분을 했고, LSG가 제기한 기내식 계약 연장 거절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 1심에서도 아시아나항공이 전부 승소했다"며 "정상 거래임을 소명했음에도 공정위가 이 같은 결정을 한 것은 당혹스럽다"고 밝혔습니다.

석민수 기자 (ms@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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