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재의 밀담] 도망만 다닌 베테랑 조종사 격추..세기의 공중전 승자는 AI

이철재 입력 2020. 8. 30. 05:01 수정 2020. 8. 31.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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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이하 현지시간)부터 20일까지 미국 메릴랜드주 로럴에 있는 존스홉킨스 대학 응용물리연구소(APL)에서 흥미로운 '게임' 이벤트가 벌어졌다. 이벤트의 주요 내용은 인터넷을 통해 중계됐다

그런데 이 이벤트 중계를 지켜본 이들 중 게이머는 많지 않았고, 주로 군 관계자와 연구자들이었다. 실제 전투기 조종사와 인공지능(AI)이 게임과 비슷한 항공전 시뮬레이터로 겨루는 이벤트였기 때문이다.

AI 탑재 전투기인 EDI가 단독으로 임무를 수행한다는 내용의 영화 ‘스텔스(2005년 개봉)’의 트레일러. [유튜브 FilmTrailersChannel 캡처]


그런데 결과는 5대0. 승자는?
AI였다. 그것도 AI의 완승이었다. 5번을 싸웠는데, 인간 조종사는 단 한 발도 쏘지 못했다. AI는 15발을 쏴 인간 조종사의 전투기를 5번 격추했다. 체스ㆍ퀴즈 프로그램ㆍ바둑에서 인간을 무찌른 AI가 곧 공중전에서도 인간을 무찌를 날이 성큼 다가왔다는 평가다.

조만간 AI 탑재 전투기가 단독으로 임무를 수행한다는 내용의 영화 ‘스텔스(2005년 개봉)’의 장면을 SF가 아닌 현실에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외계인 고문소’ DARPA가 기획한 이벤트
‘게임’ 이벤트의 정식 명칭은 알파독파이트(AlphaDogFight), 주최자는 미국 국방부 산하 방위고등연구계획국(DARPA)이다. DARPA는 인터넷ㆍ컴퓨터 마우스ㆍ윈도ㆍGPS 등 21세기 일상에서 흔하지만, 없어선 안 될 기술을 개발한 곳이다. 워낙 혁신을 쏟아내기 때문에 ‘외계인을 잡아 고문해 연구를 시키는 곳’이라는 농담도 붙어있다.

미래전에서 F-35A 전투기가 '충성스런 윙맨(Loyal Wingman)'이라고 불리는 무인기 6대를 이끌고 비행하고 있다. [유튜브 미 공군연구소 계정 캡처]


‘개싸움’을 뜻하는 도그파이트(Dog Fight)는 전투기끼리의 근접전이다. 미사일이 나오기 전까지 항공전은 기관포로 적을 격추하기 위해 서로의 꼬리를 잡아야 했다.

그래서 보통 빙글빙글 돌면서 싸우는데, 마치 개가 싸우는 모습하고 비슷하다고 해 도그파이트라고 불린다. 이번 ‘게임’도 F-16 바이퍼 2대 사이의 도그파이트로 진행됐다. 미사일 공중전은 싱겁게 끝날 수 있기 때문에 ‘진검승부’를 펼치는 도그파이트 방식을 채택했다고 한다.

DARPA가 심심풀이로 알파독파이트를 연 게 아니었다. DARPA가 야심 차게 추진하고 있는 공중 전투 진화(ACE) 사업의 하나였다. ACE는 AI 무인 전투기의 공중전 능력을 키워서 앞으로 한 명의 전투기 조종사가 여러 대의 AI 무인 전투기와 함께 전투를 벌이게 하는 게 목표다.

지난 2018년 미 공군의 공군연구소(AFRL)가 공개한 동영상에선 F-35A 전투기 1대가 6대의 무인 전투기를 이끌고 다니는 장면이 나온다. F-35A 조종사가 적의 지대공 미사일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무인기는 활강형 폭탄으로 적 미사일을 파괴한다. ACE는 이 같은 무인기 개발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알파독파이트에 참가한 AI는 미국의 헤론 시스템스에서 개발했다. 헤론의 AI는 18일 APL의 테스트를 통과했고, 19일 다른 7개 회사에서 출품한 AI와의 토너먼트를 거쳐 전투기 조종사의 상대로 뽑힌 것이다. 헤론이 앞서 물리친 AI는 록히드 마틴ㆍ보잉 등 쟁쟁한 미국 방산 대기업의 제품들이었다.

헤론은 알파독파이트를 위해 1년 동안 AI에게 40억 번의 모의 공중전을 치르게 했다. 이는 사람으로 치면 12년의 경험치를 쌓게 한 셈이다. 그래서인지 DARPA는 헤론의 AI를 다른 AI보다 더 공격적이고, 사격 솜씨가 더 뛰어나다고 평가했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AI의 기동
상대 전투기 조종사도 만만찮았다. 뱅어(Banger)라는 콜사인(호출부호)을 가진 베테랑 조종사였다. 그는 주방위공군(ANG) 소속으로 미 공군 무기학교(AWS)의 강사 코스를 졸업했다. AWS는 미 해군이 엘리트 조종사를 양성하는 탑건(Top Gun)과 비슷하다. 뱅어의 F-16 비행시간은 2000시간이 넘는다. 그런데도 일방적인 패배로 끝났다.

인간 전투기 조종사와 인공지능(AI)간의 가상 근접 공중전인 알파독파이트 1회전 동영상. 인간 조종사(노란색)이 AI(녹색)에게 쫓겨 다니다 결국 격추 판정을 받았다. [유튜브 DARPAtv 계정 캡처]

뱅어는 공중전이 끝난 뒤 에어포스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평가했다.

“인간 조종사는 자신의 안전을 위해 경험과 규칙에 따라 비행하지만, AI는 그런 게 없다. 또 AI는 순간 반응이 빠르다. 사람 같으면 인지→분석→판단→행동을 거치면서 나름 시간이 걸리는데, AI는 나노초(10억분의 1초) 수준으로 이 과정을 처리한다. 그래도 교전 횟수가 늘면서 오래 버틸 수 있었다.”

온라인 전문 매체인 밀리터리닷컴의 분석에 따르면 헤론의 AI는 사람이라면 심장이 터질만한 기동을 펼쳤다고 한다. 헤론의 AI는 속도를 전혀 줄이지 않고 뱅어의 전투기 30m 가까이까지 붙은 뒤 턴을 했다. 이런 기동은 AWS에서도 가르치지 않는다. 너무 위험하기 때문이다.또 헤론의 AI는 단 한 번도 뱅어가 공격에 유리한 위치를 점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뱅어는 교전 내내 도망만 다녀야 했다.

알파독파이트를 관전한 현역 미 해군 F-18 호넷 조종사는 “마지막 5번째 교전에서 두 전투기 모두 9G(중력가속도)의 회전 기동을 했는데, 사람이라면 피가 머리로 몰려 정신을 잃을 수 있다. 그런데 헤론의 AI는 그러한 염려 없이 기동하면서 뱅어를 재빨리 찾았다”고 평가했다.

알파독파이트에서 헤론의 AI와 가상 공중전을 벌이고 있는 현역 F-16 전투기 조종사인 뱅어. [DARPA]

이번 알파독파이트가 공중전에서 AI의 첫 승리는 아니다. 이미 2016년 미 공군과 신시내티 대학 연구팀은 알파(Alpha)라는 AI를 개발한 뒤 퇴역 전투기 조종사와 붙게 했다. 당시도 AI가 승리했다.


머스크는 ‘전투기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했지만…
전기 자동차 테슬라와 민간 우주선 스페이스X로 유명한 기업인 일론 머스크는 지난 3월 “전투기의 시대는 끝났다. 미래의 전쟁은 기존 항공기가 아닌 자율형 무인기로 벌어질 것”이라고 장담했다.

퇴역 전투기 조종사인 진 리가 2016년 미 공군과 신시내티 대학이 개발한 AI인 알파와 가상 공중전을 벌이고 있다. 당시도 알파가 진 리를 이겼다. [UC 매거진]


하지만 그의 발언은 곧바로 반발을 불렀다. 미첼 항공우주연구소의 더글러스 버키 소장은 “테슬라의 자율주행 자동차는 2차원의 세계인 땅에서 달린다. 그런데도 2019년 자율주행 도중 교통사고가 3건이 일어났다”며 “3차원적으로 펼쳐진 공중전에 적합한 AI를 개발하려면 시간이 훨씬 더 많이 걸린다”고 지적했다. AI와 무인기의 잠재력은 있지만, 개발 목표와 혼동해선 안 된다는 논리다.

알파독파이트 만으로 공중전의 미래를 논하기는 이르다는 분석이 많다. 미 공군과 해군에서 전투기 조종사로 활약했던 C. W. 레모인은 "AI가 가상 공중전에 최적화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이 됐기 때문에 공정한 게임이 아니다"고 평가했다. 게이머가 현역 전투기 조종사와의 공중전 게임에서 이길 수도 있지만, 이는 실제 전투기 조종 능력과는 별개라는 논리다.

알파독파이트의 전장은 실제와는 차이가 있으며, AI에게 적합한 전투환경이라는 분석도 있다. 또 AI는 전장에 대한 모든 정보를 미리 입력해놨기 때문에 유리했다고 한다.

아직 AI에겐 갈 길이 멀다. 영화 ‘스텔스’의 세상이 당장 펼쳐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AI의 미래는 어둡지 않다. 록히드마틴에서 AI 개발을 책임지고 있는 리 리톨츠는 디펜스원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AI를 프로그래밍할 때 사람의 경험에 기반을 둬야 할까? 아니면 스스로 시행착오를 거치도록 할까? 만일 AI에게 규칙을 가르치면 결국 성능을 제한하게 한다. 시행착오가 낫다.”


단독 작전은 못 하지만, 조종사를 도울 수는 있어
알파독파이트에서 알 수 있듯 AI가 전투기 조종사를 당장 대체하기는 현실적으로 힘들다. AI는 아주 제한적인 상황에서만 사람을 이기는 수준이다. 다양한 변수와 상황을 고려해야 하는 실제 전투를 AI가 치르려면 더 많은 기술적 진보가 필요할 것이다.

호주와 보잉이 손잡고 개발하고 있는 스텔스 무인기 로열 윙맨. [유튜브 보잉 계정 캡처]


그래서 세계 각국에선 전투기 조종사가 여러 대의 AI 무인기를 몰고 다니는 방향으로 개발하고 있다. 군사 전문 자유 기고가인 최현호씨는 “AI가 발전하고 있지만, 아직 전투기에선 바둑의 알파고 같은 AI가 나오지 않았다. 지나친 환상을 갖지 말라”고 단언한다.

그래서 미국과 유럽의 6세대 전투기는 유인 전투기(미 해군의 차세대 대공 지배(NGAD)) 또는 유ㆍ무인 겸용(영국의 템페스트, 프랑스ㆍ독일ㆍ스페인의 미래 전투기(FCAS))으로 나가고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하지만 최현호 씨는 “AI가 전투기 조종의 업무 부하를 줄이고 조종에 집중하도록 해줄 수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유인기가 한 팀을 이룰 다수의 무인기를 통제하는 역할을 맡는다. 개념상 미 공군연구소 동영상에서 나온 ‘충성스런 윙맨(Loyal Wingman)’에서 더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 윙맨은 전투기 대형에서 가장 앞선 장기(長機)의 뒤에 따르는 요기(僚機)다. 대개 장기의 왼쪽이나 오른쪽에서 날면서 장기를 엄호하거나 돕는다. 미국을 비롯해 러시아, 중국, 영국, 프랑스ㆍ독일, 호주는 적극적으로 '충성스런 윙맨'을 연구하고 있다. 이들 무인기는 아직까진 공대지 유도 폭탄을 투하하는 정도에 그치는 수준이다.

미국의 크레이토스가 개발하고 있는 XQ-58A 발키리는 사람이 조종하는 F-22 랩터와 F-35 라이트닝Ⅱ를 엄호하면서, 적의 대공 무기나 레이더를 파괴하는 임무를 맡는 게 목표다. 발키리끼리 무리를 이뤄 날아다니면서 조종사의 지시를 수행하는데, 자율 비행도 가능하다고 한다. 미 공군은 스카이보그(Skyborg) 프로그램을 통해 F-15EX나 F-35에 무인기 통제 능력을 줄 계획이다.

유럽의 에어버스는 유로파이터와 파나비아 토네이도 전투기에서 데이터링크를 사용해 무인기를 통제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이 기술은 독일ㆍ프랑스ㆍ스페인의 차세대 전투기인 FCAS에 들어갈 예정이다. 영국도 모스키토(모기)라는 '충성스런 윙맨'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러시아의 크론스타드트는 29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렸던 포럼서 그럼(천둥)이라는 무인기를 선보였다. 이 스텔스 무인기는 정찰, 타격, 전자전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고 한다. 중국은 지난해 스텔스 무인기를 공개했는데, 역시 '충성스런 윙맨'으로 개발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 공군이 유인 전투기를 보조할 목적으로 개발 중인 XQ-58A 발키리가 시험 비행을 하고 있다. [미 공군]


호주는 미국의 보잉과 손잡고 아예 이름이 로열 윙맨(충성스런 윙맨)인 무인기를 개발하고 있다. 5월 시제기가 공개됐다. 올해 시험 비행을 할 예정이다. 호주 언론에선 활주로에 있는 로열 윙맨을 포착하기도 했다.

이철재 기자 seaja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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