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력발전기 날개에 '검은 색칠'..'충돌 위험' 알아챈 새들 살렸다

이정호 기자 2020. 8. 30.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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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노르웨이 연구진이 새 충돌을 막기 위해 고안한 풍력발전기. 발전기 날개 3개 중 1개에 검은색 페인트칠(점선 안)을 해 새들이 잘 볼 수 있게 했다. 노르웨이자연연구소 제공

지난해 12월21일(현지시간) 미국 플로리다주 웨스트 팜 비치에서 열린 젊은 보수주의자들의 모임에 등장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독특한 주제의 연설을 했다. 바로 ‘풍력발전의 실체’다. CNN에 따르면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나는 누구보다 풍력발전기에 대해 잘 알고 있다”며 “가격이 비싼 데다 대부분 중국과 독일에서 만들어진다”고 포문을 열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은 새가 풍력발전기와 충돌해 희생되는 문제를 집중 공격했다. 그는 “캘리포니아에서 풍력발전기는 흰머리수리를 죽이고 있다”며 “누군가 흰머리수리를 쏜다면 10년은 감옥에 갇혀야 할 것”이라고 쏘아붙였다. 흰머리수리는 미국의 ‘국조(國鳥)’이기도 하다.

■ 한 해에 32만마리 ‘쾅’

세계 육상풍력시장 성장 이면엔
미국서만 연 32만마리 ‘새의 희생’

풍력발전기는 바람의 힘을 이용해 터빈을 돌려 전기를 생산한다. 터빈은 전체적으로 바람개비처럼 생겼는데 대개 ‘블레이드(Blade)’, 즉 거대한 날개 3개로 구성된다. 비행기에 달린 프로펠러와 비슷한 모양이다.

금속이나 강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터빈의 날개는 대략 시속 250㎞ 정도의 속도로 돌아간다. 날개에 맞은 새는 예외 없이 치명적으로 다치거나 죽는다. 2013년 연구에 따르면 미국에서 한 해에 풍력발전기와 충돌해 죽는 새는 32만여마리로 추정된다. 인간이 만든 건물이나 자동차, 송전선 때문에 훨씬 많은 새가 죽지만 분명 무시할 수 없는 숫자이다.

화석연료의 퇴장과 함께 풍력발전 확대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다. 지난해 국제재생에너지기구(IRENA) 통계에 따르면 2018년 세계 육상풍력시장의 누적 설치 규모는 542GW(기가와트)였는데 2050년에는 5044GW로 10배 가까이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연평균 성장률이 무려 7.2%에 이른다. 이대로라면 풍력발전기에 부딪쳐 죽는 새들이 훨씬 더 늘어날 가능성이 큰 것이다.

풍력발전기와 충돌해 죽은 새의 사체가 땅에 방치돼 있다. 불가리아조류보호협회 제공

■ 해결책은 ‘검은색 페인트’

‘날개 3개 중 1개 검은색 페인트칠’
노르웨이 연구진, 이색 묘안 내놔

그런데 과학계에서 최근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고안했다. 그것도 복잡하거나 비싸지 않은 방법이다. 바로 풍력발전기 터빈을 이루는 길쭉한 날개 3개 가운데 1개에 검은색 페인트를 칠하는 것이다. 터빈 날개는 대개 흰색처럼 밝은 빛을 띠는데 여기에 확연히 눈에 들어오는 검은색을 입히는 것이다.

연구진이 주목한 건 새의 눈이 머리에 붙어 있는 구조다. 새는 인간이나 육식동물과 달리 눈이 대부분 측면에 하나씩 달려 있다. 포식자에게서 몸을 재빨리 피하고 먹이를 신속히 탐지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이 때문에 정면 시야는 제한된다. 눈이 정면을 향해 배치된 인간이나 육식동물과 달리 앞에서 도사리는 장애물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충돌할 가능성이 큰 것이다.

이 때문에 연구진은 정면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새가 쉽게 알아볼 수 있는 확실한 ‘교통 안내 표지판’을 개발하기로 한 것이다. 연구진은 다양한 색상의 페인트를 풍력발전기 터빈의 날개에 발랐다. 페인트를 바르는 패턴도 줄무늬와 물결무늬 등 모두 7가지를 시험했다. 이 가운데 실험실에서 진행된 테스트에서 가장 효과가 좋았던 건 아무 무늬 없이 새카맣게 칠한 날개였다.

■ 희생 조류 70% 줄어

정면 못 보는 새에겐 ‘교통 표지판’
죽을 확률 70% 줄여줘 기대 이상

연구진은 68개의 터빈이 운영되는 노르웨이 스몰라 섬의 대규모 풍력발전단지에서 현장 시험에 돌입했다. 터빈 가운데 4개를 선정해 날개에 검은색 페인트를 칠했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2013년부터 3년간 관찰한 결과 검게 칠한 날개가 설치된 터빈에 충돌해 죽은 새는 6마리였다. 같은 기간에 대조군으로 설정돼 원래의 흰색 날개를 유지한 채 운영됐던 4개의 터빈에선 18마리가 죽었다. 새가 터빈에 부딪쳐 죽을 확률이 70% 감소한 것이다.

연구를 주도한 로엘 메이 노르웨이자연연구소 박사는 영국 BBC를 통해 “더 확실한 결과를 얻기 위해선 다른 풍력발전단지에서 추가 시험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터빈의 날개에 검은색 페인트를 바르는 일이 새의 충돌 가능성을 현저히 떨어뜨린다는 결과는 나왔지만 그 효과가 서식 환경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연구진은 “네덜란드와 남아프리카에서 추가 실험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풍력발전을 깎아내리려는 화석연료 예찬론자들의 단골 공격 메뉴였던 ‘새 충돌’을 해결할 날이 다가오고 있다.

이정호 기자 r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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