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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운동권의 종말

김범수 입력 2020. 08. 31. 21:58 수정 2020. 09. 01.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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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대학생이었던 2010년 전후는 대학문화에서 운동권의 황혼이었다.

평범한 대학생이 원했던 것과 운동권의 가치는 너무나 많은 차이가 있었다.

타협과 실용주의를 내세운 '비(非)운동권'이 학생들의 선택을 받아 대학문화의 주류로 자리 잡았다.

이번 정부에서 주류가 된 운동권은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고 여기면 '적폐', '토착왜구'로 몰고, '내편'이 일으킨 물의에 대해서는 내부 단결을 위해 사소한 '치부'로 여기고 미화하는 괴물이 된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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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대학생이었던 2010년 전후는 대학문화에서 운동권의 황혼이었다.

운동권의 활동이 없던 것도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MB정부 당시 2008년 광우병 반대 촛불시위, 2012년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 등 운동권의 마지막 불꽃 같은 일련의 사건들이 있었다.

그때마다 총학생회였던 운동권은 586세대 선배들처럼 “구국의 강철대오”, “단결투쟁”을 외치며, 온갖 집회에서 공권력과 맞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김범수 경제부 기자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학생들의 냉소였다. 평범한 대학생이 원했던 것과 운동권의 가치는 너무나 많은 차이가 있었다. 학생들이 원했던 것은 자기개발을 통한 자아실현이었다. 하지만 운동권은 개인보다는 단체, 자아실현보다 사회정의였다. 더 나아가 운동권은 자신들을 따르지 않는 학생들을 향해 사회정의도 모른다며 배타적 태도와 심지어 선민의식까지 드러냈다.

학생들이 사회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학생들은 무의미한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대화와 협상을 통해 원만하게 해결하는 것을 원했다. 폭력을 정당화하는 투쟁방식에 대한 반감도 컸다.

학생들의 마음을 읽지 못한 운동권은 마치 북유럽 신화에서 신들이 한순간에 죽음을 맞이한 ‘라그나뢰크(신들의 황혼)’처럼 대학교에서 일순간에 사라졌다. 타협과 실용주의를 내세운 ‘비(非)운동권’이 학생들의 선택을 받아 대학문화의 주류로 자리 잡았다. 

민주주의가 여러 이념 중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상대와의 ‘타협’을 전제로 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마지막 대척점이었던 파시즘은 내부 단결을 도모하고 외부를 향한 투쟁을 전개했지만, 폭력의 굴레 속에 큰 전쟁을 일으킨 뒤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운동권에게 내재된 세계관은 ‘이분법’이다. 서슬 퍼렇던 군사독재 시절, 운동권은 민주화를 위해 바리케이드를 치고 싸워야만 했다. 군사독재에 대항하기 위해 강한 단결력이 필요했고, 타협은 곧 죽음이었다. 이 같은 이분법적 사고관은 내부 단결에는 탁월했지만, 상대를 절멸의 대상으로 봐야만 그들의 세계가 유지된다는 한계가 뚜렷했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저서 ‘선악의 저편’에서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운동권은 군사독재라는 괴물과 싸워 결국 승리했지만, 민주화 이후 정치와 시민사회 각 분야로 진출하면서 이분법적 세계관도 그대로 가져갔다.

이번 정부에서 주류가 된 운동권은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고 여기면 ‘적폐’, ‘토착왜구’로 몰고, ‘내편’이 일으킨 물의에 대해서는 내부 단결을 위해 사소한 ‘치부’로 여기고 미화하는 괴물이 된 것일지도 모른다.

새로운 변화를 읽지 못하는 문화는 결국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아직 운동권은 상상의 바리케이드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지만, 평범한 시민들은 대화와 타협, 그리고 통합을 갈망한다. 이 같은 흐름을 외면한다면 대학문화에서 운동권이 황혼을 맞이했듯, 사회에서도 운동권의 종말은 필연적이다.

김범수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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